Numbers RAW novel - Chapter 110
제110화
두 발의 포탄을 옆으로 피했을 때 대공포가 EV-1의 사각을 노렸다.
그러나 EV-1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슬라스터 노즐을 가동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쎄잉꺼의 조직원도 보험 사기단 놈들도 순간 총을 쏘는 걸 잊어버렸다.
EV-1의 검은 몸체가 발레의 점프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며 대공포의 예광탄을 전부 피하고는 랜드쉽의 5미터 앞에 착지했다.
랜드쉽 안에서는 승무원들이 완전히 패닉에 빠져있었다. 전차병들에게 가장 악몽은 적이 탱크위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EV-1과 이진영은 무릎을 꿇듯 자세를 낮춰 고속으로 이동했다.
랜드쉽은 그 이름답게 덩치가 있었고 자세를 낮추고 고속이동하는 적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놈들을 포탑을 내려서 앞에 화망을 만들었지만 앗하는 순간 EV-1은 전차 등짝에 올라섰다.
카앙!
파일벙커가 주포 포좌에 박히고 펑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EV-1은 파일벙커로 찢어버린 장갑 안쪽으로 아예 식스팩을 분리해서 박아버렸다.
0거리에서 식스팩이 터지면서 화려하게 폭발이 일어나고 오렌지 불빛과 함께 랜드쉽의 등짝 장갑이 박살 났다. 그러나 랜드쉽은 랜드쉽. 궤도폭격을 막는 장갑이 식스팩 폭격만으로 뚫릴 리가 없었다.
핑핑.
대공포가 전차 위의 EV-1을 노리고 정신없이 발사되고 EV-1의 검은 장갑에 불꽃이 튀겼다. 새로 도입된 프레임은 제이미 킴의 입김인지 무려 대공포를 씹어버렸다.
EV-1은 다시 한번 파일벙커를 내리꽂으면서 부시마스터 포로 랜드쉽의 대공포를 갈아버렸다.
아무리 랜드쉽이 튼튼하다지만 포좌나 포신까지 강화할 수는 없었다.
둥둥둥!
맥없이 랜드쉽의 포좌들이 박살 나고 차례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EV-1은 전에 이진영에게 공격헬기 서펜트 정도는 제압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지금 이 로봇은 지상전의 왕자라 불리는 랜드쉽을 압도하고 있었다.
파일벙커가 길거리 하수도공사를 할 때처럼 여러 번 랜드쉽의 뚜껑을 두드렸다.
마침내 안쪽의 부품이 보이자마자 EV-1은 허리에 달린 공격헬기용 로켓포를 파일벙커로 뚫은 구멍에 박고는 전차 위에서 몸을 날렸다.
슈슈슉.
로켓탄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면서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 저 새끼들 대체 뭐야.”
보험 사기단 놈들은 EV-1의 가공할만한 성능에 완전히 전의를 잃었다. EV-1은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공격 로봇보다 강했고 랜드쉽까지 박살 내 버렸다.
EV-1이 폴짝 전차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랜드쉽 장갑을 파고든 로켓탄이 폭발하면서 전차 내부에서 내부폭발이 일어났다. 랜드쉽 차체가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두동강 나면서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고 주변에 있던 쎄잉꺼의 조직원들이 폭발에 휘말렸다.
랜드쉽이 박살 났다.
쎄잉꺼의 조직원들은 충격에 빠져 총을 쏘는 것도 잊었다.
“呢機器人就係鬼哦. (저 로봇은 귀신이야.)”
그 귀신 로봇은 어느새 무위공 이순신의 브릿지 구획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쎄잉꺼 조직원들은 뒤늦게 와아아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브릿지로 몰려갔다.
이진영은 핏기가 빠져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경위님 괜찮으십니까? 혈압이 안 좋습니다.
“괘, 괜찮아. 그보다 빠, 빨리 위로.”
이진영은 이를 악물고 EV-1의 등 뒤에 매달려있었다. EV-1은 아까 이진영이 한 것처럼 짚라인 모듈을 항공모함의 브릿지 위에 걸고 단숨에 항공모함의 아일랜드 위로 치고 올라왔다.
항모 위는 비행 갑판이 조금 남아있었고 그 위에 하얀 엑소슈트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엑소슈트는 이진영이 장비한 보병용이 아니라 중장기병용 엑소슈트였다.
– 랜서입니다.
“나도 알아.”
랜서는 미국의 제식 엑소슈트였고 한국군에도 한 대대 분이 도입되어 있었다. 이진영은 차체에 ‘제 1기병’의 푸른색 말대가리 부대마크가 찍혀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승우는 상부 해치를 열고 나와 EV-1의 등 뒤에 타 있는 이진영을 바라본다. 기병용 헤드모듈을 썼지만, 이진영은 한승우의 눈동자를 응시하듯 뚫어지게 노려봤다.
“나중에 알았어. 13사단 기계보병, 광저우의 마지막 관광객이었을 줄이야. 그쪽도 좆뱅이 좀 치셨군. 그리고 세상에 랜드쉽을 박살 내다니. 저거 박살 내려고 우리 부대원이 몇 명이 죽었는지 아쇼? 제정신이요?”
“흐흐흐. 내가 한 건가. 이 녀석이 한 거지.”
이진영은 맥없이 EV-1의 머리를 두드렸다.
“아이는 괜찮나?”
“걱정해준 덕분에 수술도 잘 마쳤소.”
한승우의 아이는 A급 영리보험 가입자인 아이의 신분으로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이진영은 뒤늦게 버스에서 자신이 구해낸 아이가 바로 한승우의 딸이란 걸 알아차렸다. 이 보험 사기의 핵심은 신분 바꿔치기를 할 사람이 반드시 사고 현장에 있어야 했다.
“그 아이였군. 참 이뻤는데. 아이가 무사하다니 그건 불행 중 다행이야. 아니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필이면 내가 그 버스에 탔으니.”
“흐흐흐, 영 오발탄 같은 손님이구먼 그래. 하필 당신이 그 버스를 탔을 줄이야. 아무튼 왜 날 만나자고 한 거요? 봉식이에게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더만요?”
“돌아가쇼.”
한승우는 말없이 난장판으로 변한 폐선지구를 돌아봤다.
“이제 와서 돌아간다 한들 난 사형일 텐데? 경찰을 죽이려고 했고, 당신 말대로라면 공안에서 폭탄 테러범으로 쫓고 있으니까?”
“다, 당신이 이뻐서 돌아가라는 게 아니요. 당신 아이한테……. 후회될 일은 하지 마시오. 나도 딸내미를 둔 아빠라…….”
이진영은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나도 잘 알아. 그 막막함. 애는 아픈데 라종보험이라 근처 병원에서 거부할 때 얼마나 좆같은지도.”
한승우는 이진영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승우, 당신과 나는 같아. 난 단지 운이 좋아 경찰이 되었을 뿐……. 그, 그래. 그래서 놓아주고 싶은 거요. 가쇼. 어차피 잡힐 테지만 조금이라도 아이와 함께 놀아주시오. 아이에게 좋은 기억은 남겨야 하지 않겠소?”
한승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오. 난 당신과 다릅니다. 너, 너무 많이 온 것 같아. 당신은 경찰이지만 난 그냥 살인자요.”
“살인자?”
“난 이 일에 가담하면서 열여덟 명을 죽였소.”
“아…….”
“가종이나 A급 보험을 든 사람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야 후환이 없으니까. 그리고 저 뻘밭에 파묻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오?”
한승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통쾌하드만. 신났소. 이 빌어먹을 새끼들은 돈이 많다는 이유로 내가 겪은 수모와 고통들을 모를 텐데. 다 죽여버리자 하는 생각도 들었소. 근데, 막상 내 아이의 차례가 되어 다른 아이를 죽이려니까 미치겠는 거라.”
이진영은 한승우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한승우는 단순히 수술 대기 때문에 절박하게 이진영에게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죽여야한다.
한승우는 자신의 아이와 바꿔치기한 누군가의 아이를 이미 죽였다. 이 놈들은 단순히 의적놀음을 한 게 아니라 죽인 사람의 신분증을 이용해 돈을 빼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놈들은 강도살인범이었다.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난 이미 딸을 볼 낯이 없소.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오. 빌어먹을 라종보험. 빌어먹을 돈. 총알이 아니라 돈과 보험료가 우리를 찢어발길 줄 누가 알았겠소? 아직도 귓가에 선하오. 환자분은 라종 접수자라 기다려야 합니다. 접수번호 라종 9669030 환자분, 수술 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접수번호 라종 9669030 환자분의 보호자? 국가 보증보험 지급신청이 거절되었습니다. 접수번호 라종 9669030. 접수번호 라종 9669030……. 마치 접수번호가 죄수번호처럼 낙인이 찍혀 내 딸의 이름이 라종 9669030인 것처럼 들렸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딸의 인생도 라종 인생이라고 판사가 선고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소.”
한승우의 말에 이진영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라종 인생이라고 다른 아이들을 놀리는 것이 괜한 일이 아니었다. 라종, 그냥 보험 등급상의 분류가 이 시대에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
이진영은 소드 타워에 사는 아이와 한승우의 아이를 떠올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대한민국의 의료기술과 의료 로봇의 발전은 선진국 중에서도 최고를 달리고 있다. 예전에는 난치병이라 여겨지던 암이나 백혈병도 나노머신의 눈부신 성장으로 모두 치료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의료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지는 않았다.
국가가 전쟁 중 부상을 당한 민간인들의 막대한 치료비를 피하기 위해 졸속으로 국가 의료보험법을 개정했고 그 결과 한승우 같은 피해자가 생겨났다.
그깟 의료보험 등급이 뭐라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목구멍이 포도청. EV-1은 소송이 걸린 이진영의 신세를 그렇게 비유했지만 라종보험 환자들에게는 보험 등급이란 실제로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별소리를 다 했군. 뭐 그렇소. 난 다른 아이를 죽인 파렴치한 살인자에 딸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지만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딸에게 살인자라는 걸 들키고 싶지도 않소.”
한승우는 하늘위에 뜬 엑소슈트를 노려봤다.
“블랙스와트가 강하하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경찰은 이 사건이 뭔지도 모르나 보군.”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한승우가 뭘 하려는 건지 이진영도 알고 있었다.
이진영이 총을 겨누기도 전에 한승우는 엑소슈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엑소슈트 랜서가 식스팩에서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했다.
EV-1은 미사일의 인공지능을 해킹하면서 다섯 발의 미사일을 교란했고 남은 한 발은 이진영이 저격총으로 쏴버렸다.
다섯 발의 미사일은 제각각 다른 궤도로 날아가더니 두 발이 쾅쾅 무위공 함의 갑판에 처박히고 다른 세 발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난데없이 날아오른 미사일에 하늘에 떠 있던 틸트로터가 깜짝 놀라서 고도를 더 높이는 모습이 보였다. 눈구름을 뚫고 상공까지 치솟아 오른 미사일이 자폭하고 오렌지색 불빛이 먹구름을 잠깐 밝혔다가 사라졌다.
불꽃놀이를 보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항공갑판 위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두 발의 미사일이 터지면서 잔해가 사방으로 튀고 EV-1은 진압방패로 날아오는 파편들을 쳐냈다.
미사일 탄착 충격으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폭발진동으로 EV-1의 센서도 순간적으로 무력화되었을 때였다.
– 랜드쉽을 이긴 기계보병과 싸우다니! 영광이오!
폭발연기를 뚫고 랜서가 EV-1을 들이받으면서 파일벙커가 곧장 이진영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EV-1이 장비한 부시마스터 포는 랜서의 측면장갑이나 관절부를 박살 낼 수 있었고 한승우는 처음부터 부시마스터 포를 봉쇄하기 위해 접근전을 걸었다.
광저우나 북경에서 수없이 벌어진 엑소슈트 간의 근접전이 또다시 이 항공갑판 위에서 재현되었다.
파칵.
EV-1은 어깨를 들어서 파일벙커를 피했고 로봇의 검은 장갑에 파일벙커가 튕기면서 불꽃이 튀었다.
랜서는 휘청거리는 EV-1의 다리를 발로 찍으려고 했지만, 돈가스 놀이를 하듯 EV-1은 발을 피하고 되레 랜서의 다리를 발로 후려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