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12
제112화
붕괴가 멈춘 폐선 안은 고요했다. 쎄잉거 패거리들의 고함 소리도, 엑소슈트의 기동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EV-1은 어두운 폐선 안에서 청각센서를 소나모듈처럼 가동했다.
랜서와 한승우는 어떻게 된 것일까? 위에서 붕괴에 휩쓸려 죽기라도 한 것일까?
“아직 살아있을 거야. 제 1기병 출신에다 그 정도 솜씨라면 죽었을 리가 없어.”
한승우는 엑소슈트 랜서를 마치 자기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랜서는 팔라딘과 달리 인공지능이 탑재되지 않은 모델이었고 오직 인간의 머리와 체력만으로 그 정도 기동을 보여준 것이다.
아무리 랜서가 헤비급은 아니라지만 한승우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제조사 호리코시도 깜짝 놀랄 것이다.
중동에서 랜서의 별명은 랜서가 아니라 ‘싼쵸’였다. 기사는커녕 돈키호테의 종자만도 못하다고 병사들이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한승우가 조종하는 랜서는 기사 그 자체였다.
북경 전투는 광저우 전투 못지않았고 한승우는 중국군의 살인 로봇과 중국 정예 엑소슈트 부대를 상대로 살아남은 강자였다.
전쟁이 만들어낸 괴물.
종종 언론들은 사고를 친 퇴역병들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그러나 한승우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찬사는 없었다.
이진영은 한층 더 씁쓸함을 느꼈다. 우주유영자격증까지 있는 중장기병이 사회에 나와보니 고작해야 라종 인생이었다. 자신만 라종 인생이면 모르지만, 딸이 아파서 팔다리가 썩어가는 걸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진영은 온몸에서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음이 훨씬 더 아팠다.
내사 혐의를 받고 있는 처지에 한승우를 놓아주려고 한 건.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던 건.
자신도 까딱 잘못했으면 한승우 꼴이 되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가족이 보험등급으로 고통받는데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신분을 빼앗아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유혹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업의 설계자 봉식이는 인간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한승우를 살인자로 만들었다. 한승우는 그가 한 말대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딸을 살리기 위해 가종 보험의 아이를 죽였을 때 한승우는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한승우우우우! 끝장을 내자아아아!”
EV-1의 소나모듈도 별 소득이 없자 이진영은 없는 힘을 쥐어짜서 고함을 질렀다.
대답 대신 날아온 건 총탄이었다. EBR-11E의 레일건 탄자가 구멍을 내면서 이진영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EV-1은 바로 진압방패로 이진영을 가리고 부시마스터 포로 응사했다.
팡!
붕괴를 막기 위해 해체업체가 임시로 세워놓은 쇠파이프 기둥들 너머로 파랗게 저격총이 박살 나는 장면이 보였다.
– 원격 모듈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광학위장으로 숨어있던 랜서가 EV-1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메인 카메라를 당했기 때문에 한승우는 상부해치를 밑으로 내리고 머리만 빼꼼 내민 상태였다.
랜서는 다시 지긋지긋하게 근접전을 걸어왔다.
집요함만 따지자면 한승우는 천수관음 그 이상이었다. 놈은 파일벙커가 달린 랜서의 오른쪽 팔로 EV-1의 다리를 잡고 롤러대시를 뒤로 가동했다.
EV-1의 프레임에 이진영이 깔리면 끝이었다. 장갑으로 보호받는 엑소슈트와 달리 기계보병들은 뒤로 전복되면 로봇에게 깔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진영도 광저우에서 고스톱만 친 건 아니었다. 그는 바로 고정후크를 풀고 EV-1에서 뛰어내렸고 바로 EV-1의 등 뒤 트리거 케이블을 뽑아서 손에 쥐었다.
EV-1은 뒤로 쓰러지기는커녕 애프터버너를 가동해서 자세를 바로잡고 랜서의 팔을 뿌리쳤다.
공중에 날아오른 EV-1이 다시 위에서 부시마스터 포를 쏘려고 하자 랜서는 엑소슈트의 팔로 로봇의 다리를 후려치며 옆으로 빙글 돌았다.
부시마스터 포탄이 아슬아슬하게 랜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고 랜서는 보수 파이프를 잡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이진영에게 달려들었다.
이진영은 트리거 케이블을 잡은 상태로 보병용 엑소슈트를 뒤로 가동시켰다.
“엑소슈트를 상대로 마리오네트라고? 단단히 미쳤군!”
기계보병이 파트너 로봇과 따로 떨어져서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원격 트리거 케이블로 조종하는 걸 마리오네트라고 불렀다.
이진영은 외다리로 보병용 엑소슈트를 기동하며 EV-1과 나란히 뒤로 내달렸고 한승우는 이진영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이진영은 가설 파이프 사이를 넘나들며 총탄을 피했고 총알이 파이프에 튀면서 요란하게 불꽃이 번쩍였다.
한승우의 상대는 이진영이 아니라 EV-1이었다. 로봇은 랜서가 이진영을 노리고 옆을 보인 사이 주먹으로 랜서의 옆구리를 들쑤셨다.
“하하하하. 이 쌔끼! 싸움 좀 할 줄 아는구나!”
EV-1은 인정사정없이 아까 턴픽모듈에 뚫린 옆구리를 후려쳤다. 피 몇 방울이 랜서의 옆구리에서 튀어나오고 랜서의 프레임이 크게 휘청였다.
랜서는 인공지능이 없는지라 안에 타 있는 중장기병의 움직임에 그대로 반응한다. 랜서가 움찔하며 순간 동작이 멈춘 사이 이진영이 저격총으로 한승우의 머리를 노렸다.
“난 죽지 않아!”
파앙!
한승우는 랜서를 반사적으로 돌려서 저격총탄을 피했다.
가각.
한승우가 눌러쓴 우주용 헤드모듈 한쪽이 뜯겨 나갔지만 그 헤드모듈 덕에 치명상을 피했다.
팡팡팡.
이진영은 연달아 저격총을 쐈고 한승우는 그 자리에서 턴픽기동을 하며 무도회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처럼 피했다.
EV-1은 랜서가 턴픽기동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랜서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을 때 또 돈가스 놀이를 하듯 랜서의 발을 자신의 발로 찍었다.
롤러대시 모듈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 EV-1은 턴픽의 초합금 말뚝으로 랜서의 롤러대시 모듈을 박살 냈다.
랜서는 급히 뒤로 몸을 빼려고 했기 때문에 아직 롤러대시가 가동 중이었다. 소형 캐터필러가 초합금 말뚝에 드득하고 끊어지면서 작은 보기륜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캐터필러의 철편과 롤러대시의 바퀴가 산탄총처럼 앞으로 튕겨 나간다. 이로써 랜서는 종전처럼 롤러대시를 사용한 기민한 움직임을 취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당하고만 있을 한승우가 아니었다. 한승우는 고릴라처럼 긴 엑소슈트의 팔을 뻗어 부시마스터의 포신을 잡았다.
EV-1은 급히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랜서가 포신을 우그러뜨리는 게 더 빨랐다.
퍽석.
대구경 레일건이 박살나면서 파란 전류가 퍼드득 옆으로 튀겼다.
“이걸로 장군 멍군이다!”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부시마스터 포가 날아갔으니 EV-1과 이진영은 랜서보다는 화력 면에서 열세였다. 이진영이 가진 저격총으로는 한승우의 머리를 노리지 못한다면 랜서의 장갑을 뚫을 수는 없었다.
한승우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바로 두 콤비를 몰아붙였다.
이제 한승우는 부시마스터 포를 경계하며 무리하게 인파이터 복서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진영처럼 외다리로 뒤로 슥 물러나면서 자동소총을 쐈다.
“시팔, 한승우! 비겁하게 승점만 벌어놓고 판정승을 노릴 셈이냐?”
판정승?
한승우도 이진영이 과다출혈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마리오네트로 무리하게 기동을 했기 때문에 위험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진영! 미안하게 되었군! 하지만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기조야에게 신분증을 샀다! 미국으로 갈 거야! 그래서 아이랑 궤도 엘리베이터 관광도 하고 우주유영도 가르쳐줄 거야! 이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꼭 보여주고 싶거든! 더러움으로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라종 인생이 아니라! 내 딸은……. 내 딸은 부잣집 아이로 살아가게 될 거다아아!”
한승우의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처절한 아빠의 마음이었다.
그는 딸과 같은 또래의 아이를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딸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보수용 파이프가 휙휙 지나가며 푸른 전류와 붉은 불꽃이 튀긴다.
그리고 그때 EV-1이 트리거 케이블을 분리했다.
“이브이! 뭐 하는 거야!”
EV-1은 애프터버너를 가동해서 랜서를 따라잡았다.
아웃복서처럼 뒤로 물러나서 총을 쏘던 한승우는 EV-1이 돌격하는 걸 보고 급히 턴픽을 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한쪽 롤러대시 모듈을 잃었다는 걸 깜빡했다.
가가각.
바닥에 부서진 롤러대시 모듈이 갈리고 EV-1은 한승우의 엑소슈트를 두 팔로 잡았다.
“이런 미친! 넌 로봇이잖아!”
EV-1의 흉부장갑 아래에는 예비용 미사일이 하나 숨겨져 있다. 예전 고가다리에서 육군 로봇과 붙었을 때 문제가 된 바로 그 미사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EV-1의 트리거모듈은 분리되어 있고 이진영은 통신기가 없어서 무선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 중상해와 살해 외에는 1원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EV-1은 법원장 김수겸을 체포했을 때와 똑같은 말을 남겼다.
쾅!
대전차 미사일이 근접에서 터지면서 화려하게 폭발이 일어났다. EV-1의 흉부장갑도 폭발로 날아가고 랜서의 쇠모루를 닮은 전면장갑도 박살이 났다.
이진영은 뒤늦게 랜서와 EV-1에게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이브이이이! 한승우!”
EV-1의 프레임은 예전처럼 아선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로봇은 전면장갑과 일부 장비가 날아가는 것 빼고는 놀랍게도 폭발에도 끄떡없었고 쓰러진 한승우의 엑소슈트 모델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승우와 랜서의 상황은 달랐다.
대전차 미사일이 0거리에서 직격하면서 쇠모루를 닮은 장갑판이 날아갔고 한승우의 헤드모듈도 반쯤 뜯겨 나가 피를 흘리는 한승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배에는 파편이 박혀 있었다.
– 죽지는 않을 겁니다. 랜서의 전면장갑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의료지원도 이미 불렀습니다.
EV-1은 의료 로봇처럼 짧게 브리핑했다. 한승우는 치명상을 당하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EV-1은 절묘하게 한승우가 부상을 당해 무력화될 정도의 폭발을 의도했다.
이진영은 터벅터벅 로봇과 한승우에게 걸어와 어이없다는 듯 허허허하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승우. 당신을…… 뭐였냐, 이브이?”
– 의료보험법 위반, 경관 살해 미수. 그리고 사인의 재물 손괴죄입니다.
“아, 재물손괴는 너? 아무튼 알아들었지? 자 정신 차려. 딸한테 돌아가야지?”
한승우는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헤드모듈 사이로 씩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2차 붕괴가 시작되었다.
EV-1은 반사적으로 이진영을 감쌌지만, 그보다 먼저 랜서의 하나 남은 팔이 이진영을 덮치려고 했다. EV-1은 랜서의 팔을 잡으려다 파편이 이진영을 덮치는 걸 막지 못했다.
다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이진영과 EV-1, 한승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콰앙!
항공갑판이 기어코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땅에 처박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위공 이순신함의 마지막 폐선 부분이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