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13
제113화
어마어마한 굉음을 심지어 인천 시가지 근처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 광경을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에서 TV로 지켜보던 도은주는 ‘어떡해’를 연발하며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진영과 EV-1은 붕괴 전에 항공모함 잔해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했다.
비행갑판이 박살 나고 아일랜드 구조물은 형체도 없이 찌그러져 02번이라는 함번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아직 저 안에 있다면 로봇이고 사람이고 완전히 쥐포가 되었을 것이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이진영은 끔찍한 고통에 제정신을 차렸다.
“이브이! 한승우!”
– 저는 팔 하나와 롤러대시 하나가 망가졌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진영은 완전히 먼지에 둘러싸여 있었고 EV-1이 잔해에 깔려 카메라 헤드가 찌그러진 걸 볼 수 있었다. 두 콤비는 두터운 폐선 외벽이 완전히 덮이면서 생긴 공간에 있었다.
주변은 찌그러진 파이프나 침대 프레임 같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폐차장 파쇄기처럼 뾰족뾰족하게 이진영을 찌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봇도 사람도 무사하다?
이진영은 문득 이마 위로 뜨거운 액체가 툭툭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V-1도 이 어마어마한 붕괴 속에서도 어떻게 무사히 살아남았는지 뒤늦게 알아챘다.
“어떻게…… 아!”
한승우는 마지막에 이진영을 죽이려고 엑소슈트의 팔을 뻗은 게 아니었다. 랜서가 몸을 둥글게 말아 이진영과 EV-1을 감싸고 있었고 랜서의 등 뒤와 팔다리에는 고슴도치처럼 파이프와 잔해가 박혀 있었다.
랜서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저 파이프와 잔해들은 이진영과 EV-1을 꿰뚫었을 것이다.
“왜? 왜지?”
“흐흐흐. 아깝잖아. 광저우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이, 이딴 곳에서 죽으면. 잘 가시게 마지막 관광객.”
한승우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진영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숨을 거뒀다.
이진영은 방금 전까지 혈투를 벌였던 한승우가 자신을 구해준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우리는 왜 그렇게 처절하게.
“한승우…….”
x8 믿으니까~~ 궉정마쎄이요우~~~
EV-1은 이진영이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얼마간의 시간을 주고 말했다.
– 경위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이진영은 말없이 눈물을 닦았다. 그 사이 EV-1은 이진영을 등 뒤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잔해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이진영은 한승우를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은 소나모듈로 잔해들을 헤치고 나와 어렵지 않게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EV-1의 검은 몸체는 눈에 딱 뜨였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쎄잉꺼 놈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대전차 로켓도 날아오고 놈들의 테크니컬 트럭에서 다련장 포탄도 날아온다.
하지만 EV-1은 무려 랜드쉽을 박살 낸 로봇이었고 이깟 공격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봇은 멋지게 선회를 하며 총탄과 로켓을 피하면서 바다 쪽으로 달렸다.
“이, 이브이. 왜 바다 쪽으로 가는 거냐?”
–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원이 어디서 오는…… 아…….”
이진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 삼화 구급 두둥둥, 삼화 구급, 삼화 구급 믿으니까아아~ 걱정마쎄이요우~
119 구급차는 물론 경찰도 이곳에 지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에 더 가까웠지만.
아무튼 쎄잉꺼 패거리들이 활개 치는 이곳에 구급차를 타고 돌입할 정도로 미친놈들은 없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저 사람들을 제외하면.
통통배에 탄 삼화 구급 응급구조사들이 배에서 내리면서 중기관총과 자동유탄발사기 등을 설치했다.
EV-1의 양옆으로 기관총탄이 피융피융 스치고 지나가며 EV-1을 거의 따라잡은 테크니컬 트럭의 바퀴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트럭은 폐선 잔해에 부딪히더니 호떡처럼 한 바퀴 뒤집히고 나서 펑하고 터져 버렸다.
저 뒤에 따라오는 놈들의 진로에 유탄이 미친 듯이 처박히면서.
퐁퐁퐁퐁.
불꽃이 탄착점을 따라 터졌다.
쾅쾅쾅쾅!
삼화 구급의 가세에 쎄잉꺼 놈들은 주춤했다. 그러나 이대로 쎄잉꺼의 영역에서 이진영이 빠져나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EV-1의 롤러대시를 노리고 레일건이 날아왔다. EV-1은 이진영을 떨어뜨리는 건 면했지만 롤러대시가 박살 나는 바람에 뛰어야 할 판이었다.
EV-1은 뻘밭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좌르르륵 미끄러졌다.
아직도 EV-1의 뒤에는 트럭에 탄 놈들이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 위이이잉하는 롤러대시 소리와 함께 랜서와 파이크맨 엑소슈트 두 대가 멋들어지게 EV-1의 뒤로 선회했다.
랜서와 파이크맨에는 식스팩 모듈이 각각 4개나 달려 있었고 놈들은 미사일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위로 올라간 미사일은 다시 아래로 내리꽂히면서 확산탄 탄자를 발사했다.
EV-1의 뒤를 따라오던 트럭이나 쎄잉꺼 놈들은 50여 발의 확산탄이 일제히 터지자 그 자리에서 2, 30명이 그대로 몰살당했다.
쎄잉꺼 놈들의 추격이 주춤해진 사이 엑소슈트 파일럿은 이진영을 등 뒤의 구급캡슐에 실어 넣었다. 두 명의 엑소슈트 파일럿은 능숙하게 이진영에게 수혈부터 했다.
“아이고오, 불법 장비가 기관총뿐만이 아니었네. 아무튼 수고를 끼쳤구먼요.”
이진영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엑소슈트 파일럿은 혈액팩을 꺼내서 이진영에게 긴급수혈을 하다가 ‘빠라바라밤’하는 빵빠레 소리를 내며 이진영의 경례를 받아줬다.
전에 삼화 구급에 방문했을 때 커피를 준 바로 그 응급구조사, 김간이었다.
엑소슈트 파이크맨이 방패를 펼치고 이진영의 긴급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 파이크맨은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중장갑으로 둘러싸인 중장형이라 로켓이나 직사화기 따위는 그냥 씹어버렸다.
랜서는 그 사이 씽하고 뻘밭을 내달려 어느새 통통배로 향했다. 눈과 섞인 뻘이 그 뒤로 파라락 검은 물감처럼 흩뿌려지며 EV-1과 두 대의 엑소슈트가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진영의 구급캡슐이 안전하게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자 상륙해서 로켓을 쏘던 응급구조사들도 하나둘 배로 돌아갔다. 엑소슈트 두 대는 레일건을 난사하며 쎄잉꺼 놈들의 추격을 뿌리치다가 나중에야 통통배로 되돌아왔다.
“가즈아아아! 얘들아아아!”
대원들이 모두 되돌아오자 삼화 구급의 박영수 원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배의 키를 돌렸다.
이 통통배도 불법 개조된 응급구조선이라 속력이 만만치 않았다.
삼화 구급은 가끔 해난구조에도 투입되는지라 이런 쾌속선을 두 척이나 갖고 있었다.
어느새 쾌속선은 쎄잉꺼 놈들을 뿌리치고 인천 앞바다 멀리 나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쎄잉꺼 놈들도 잡을 수 없다.
인천 앞바다에는 해군의 구축함이 상시 대기 중이었고 배를 타고 쫓아왔다간 바로 물고기 밥이 된다.
응급구조사들과 로봇의 솜씨는 끝내줬다.
그들은 이진영의 혈압을 잡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파편을 꺼내는 수술을 시작했다.
이진영은 마취액이 들어오는 나른함을 느끼면서도 박영수에게 물었다.
“원장님. 이거 장사 되겠어요? 방송국이 찍고 있을 텐데? 엑소슈트로 미사일을 쏘고 난리를 치다니?”
“하하하, 경찰관을 구한 영웅인데 경찰이 뭐라 그러겠나? 그리고 출동하기 전에 그쪽 상관인가 하는 사람이 뒤를 봐준다 그랬어. 돈도 두둑하게 뜯어내야지.”
이진영은 울상을 짓는 이민호 부장을 떠올리며 또다시 씁쓸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안보수사국의 특활비가 많이 축날 것이다.
이진영은 삼화 구급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잠이 들었다.
“걱줭마쎄이요우.”
* * *
여름에 이어 신년 댓바람부터 월미도 신간척지에서 난리가 났으니 뉴스 앵커들은 난리였다.
정치 프로그램에서는 난민들을 더 이상 수용하지 말고 내쫓아야 한다는 주제로 토론을 했고, 경제 프로그램에서는 테러와 신간척지 문제로 한국의 일사분기 경제가 흔들릴 거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정작 이 대형사고를 친 이진영은 2주째 얌전히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가종 환자의 노란 명찰을 차고 침대 위에서 감자칩을 먹고 있었다.
치료받는 동안 얼마나 야식과 간식을 즐겼는지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어이, 로봇 편의점에서 라면이랑 삼각김밥 좀 사다 줘. 아, 핫바도 잊지 말고.”
– 예 알겠습니다. 결제는 현금으로 하겠습니다.
경찰상조회에서는 이진영의 부가치료비를 부담하는 건 물론 이진영에게 간호 로봇을 붙여줬고 그 덕에 이진영은 뭐하나 불편함 없이 호사스러운 병원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진영이 있는 곳은 4인실이었지만 가종 환자 전용 병실이라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TV를 돌려가며 신나게 병원 생활을 즐겼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을 때 병실문이 벌컥 열렸다. 이진영은 문 쪽을 바라보며 감자칩을 와삭 씹었다.
“오…….”
이효진과 내사팀이 이진영을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속속 병실로 들어왔다.
“이야, 오랜만이네요. 얼굴 다 까먹을 뻔했네.”
“이진영이. 수술도 잘 받았고 감자칩까지 먹는 걸 보니 입도 잘 나불댈 것 같네에?”
이효진은 이진영의 감자칩을 뺏어서 와삭거렸다.
“아니, 팀장님은 내 담배도 뺏어가더니 감자칩까지 뺏어가네. 이거 내사로 찌를 겁니다.”
“찔러봐.”
이효진은 일부러 보호자용 철제의자를 기이익 끌어당겨 이진영의 옆에 앉았다.
“아 근데 빈손으로 오신 겁니까? 사람이 문병을 오고 그러면 주스라도 사갖고 와야지.”
“주스는 됐고. 너한테는 더 좋은 걸 가져왔지.”
이효진은 이진영의 배 위에 서류파일을 팍하고 올려놓았다.
“어떤 요술을 부린 거냐? 내사 종결이라니? 너한테 걸린 혐의가 몇 갠 줄이나 알아?”
“제가 한 요술 하거든요? 원래 꿈이 마술사였어요.”
“언제는 소설가였다메?”
“아이들은 꿈이 자주 바뀌는 법이죠.”
“너 이 새끼. 보험 사기 살해단이라니? 이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거고?”
“그런 요술을 부린 거죠.”
“자꾸 기어오르지?”
이효진이 몸을 앞으로 숙이자 이진영은 움찔하며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잡았다. 이효진은 씩 웃으면서 감자칩을 와삭거렸다.
“걱정 마. 니 거는 냄새 나서 다시 잡고 싶지도 않아.”
“거 참 다행이네요. 팀장님,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아니, 난 끈질긴 여자거든?”
“아, 전 그런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후후 넌 내 타입인데 어쩌냐? 아무튼 또 보게 될 거야. 이진영 경위. 아직 네 혐의는 다 풀리지 않았거든.”
“또 뭐가 남았을까요?”
“불법무기 소지.”
“그걸로 엮기엔 힘들 텐데요? 저는 운이 아주 좋다고요? 제가 가는 곳마다 무기가 떨어져 있고 전 정당방위로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뿐이니까요.”
“이 새끼가 진짜.”
이효진은 감자칩을 와삭거리면서 사냥개 같은 표독스러운 얼굴로 이진영을 쏘아봤다.
“웡꺼와 거래한 거 내가 나중에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리고 반드시 네 옷을 벗겨주지.”
“그러시든지요.”
“빽 좋다고 나대지 마라.”
“제가 가진 빽이라고는 쎄면빽 밖에는 읎습니다.”
“신희정 날아가듯 이민호 국장도 날아갈 수 있어.”
이진영은 그 대목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희정이 날아가다뇨?”
“정보국에서 내사 중이야. 마이크로웍스 테러 사건 혐의로.”
“내사라고요?”
“알잖아. 정보국? 걔네들이 육공이나 경찰한테 자기들 사건 넘기는 거 봤어? 무조건 내사로 시작해서 내사로 끝나는 거지.”
“아…… 그러면 신희정 요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