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17
제117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페어차일드지. 페어차일드는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고.”
쎄잉꺼는 문득 창밖 난민지구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링로드가 지나가는 곳의 이권은 어마어마했고 더군다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링로드가 가개통된 지금도 쎄잉꺼 본인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페어차일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쎄잉 동생, 돈은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지.”
“그건 그래요. 돈은 거짓말을 안 하죠.”
쎄잉꺼는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페어차일드와의 거래가 성사되었을 때 과연 어떤 것이 이득일지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요?”
“그것도 정 대령이 알아서 할 거야. 봉기만 일어나면 육군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여긴 한국 땅입니다. 그것만 믿고 나서기엔 좀…….”
“걱정 마. 정 대령이 그건 물밑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놈의 병대(兵隊)는 보통이 아니야.”
“병대요?”
“놈은 사상최강의 팀을 꾸리고 있어. 괜히 마이크로웍스를 공격한 줄 알아?”
체잉꺼가 궁금하다는 듯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이크로웍스와 아선은 왜 공격한 거죠?”
“흐흐흐, 거기에 아미타여래가 있었다더군. 마이크로웍스 놈들 CIA를 통해 그놈의 신병을 받아서 전후에 마이크로웍스 어딘가에 봉인했대.”
여기 있는 보스들 중에는 간위예 전쟁 참전자들이 많았고, ‘특별병과번호’에 소문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
“아미타여래라면…… 그 중국군 2개 사단을 마비시켰다는 그…….”
“그래, 한국군 따위 아미타여래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보스들은 수군거리며 저마다 전쟁 때 들은 아미타여래에 관한 소문들을 말했다.
웡꺼는 테이블을 쿵쿵 두드려 각 보스들을 주목시키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어때, 다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잖아? 안 그래요? 롱 형님?”
롱꺼는 말없이 술잔만 따랐다.
이미 웡꺼와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된 모양이었다. 롱꺼와 형제들은 또다시 술잔을 들이키며 웡꺼의 계획에 찬성했다.
봉기.
230만 난민 중 전투 병력이 10만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웡꺼가 부리는 병력은 최소 2, 3만 단위였고 각 보스들의 부하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한국군 1개 사단 정도는 우스웠다.
이제 롱꺼 패거리는 단순히 폭력조직이 아니라 난민국가로서 발돋움을 하려 한다.
그들이 계획대로 국가가 성립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월미도 코앞에 그것도 링로드 구간에 알박기를 당하는 셈이다.
그걸 대한민국이 팔짱끼고 지켜본다?
쎄잉꺼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일단 술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롱꺼에게 말을 걸었다.
“롱 형님. 그 새끼말입니다. 중부서의 이진영. 왜 그놈을 죽이지 말라는 거죠?”
롱꺼는 술잔을 내려놓고 쎄잉꺼를 쳐다봤다.
“그냥.”
“그냥이요? 웡 형님 말씀해보세요. 그 짭새 새끼가 망친 사업이 한두 개인 줄 아십니까? 폐선지구에 구축함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웡 형님도 사업이 많이 위축되었잖아요.”
웡꺼가 북중국에서 무기를 밀수하는 루트는 주로 잠수함이나 배를 이용한 해로였다.
그런데 대한민국 해군이 앞바다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또한 웡꺼의 인신매매 사업 역시 이진영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 천도영 납치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보육 로봇의 감시를 강화했고 인질극 몸값으로 돈을 버는 게 힘들어졌다.
“쎄잉 동생 말이 맞습니다. 롱 형님 왜 그 경찰 놈을 싸고도시는 건가요? 굴다리에 들어왔을 때 죽여버리면 누가 알겠습니까?”
롱꺼는 불쾌하다는 듯 탁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웡, 너는 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난민의 아이도 납치했었지? 근데 그 녀석은 오직 실종된 난민의 아이를 찾기 위해 이곳 중화대루에 왔다. 겁도 없이 말이지. 배짱도 배짱이거니와 과연 누가 우리 동포들의 진정한 이웃이냐? 너? 아니면 이진영?”
“…….”
롱꺼는 식당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관우상을 보고 두 손을 모으며 예를 취했고 웡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난 놈을 지켜보고 있다. 재밌는 녀석이야. 우리랑 대립하면서도 난민들을 돕고 있다. 그놈 토요일에는 난민 급식소에서 일하는 거 알고 있냐? 그놈 주변에는 항상 난민 아이들이 많이 따라다니지. 와와 거리면서. 놈은 난민이라고 차별하지 않아. 그러니 사람들이 따를 수밖에.”
쎄잉꺼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놈이 동포들을 잘 대해준다고 하나 놈을 본보기로 죽여놓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제 사업장을 두 번이나 들쑤셔 놓았어요.”
쎄잉꺼의 입장에서는 부하들도 많이 죽었고 사업도 꽤 타격을 입었다.
“내버려 둬. 경찰 하나가 뭘 어쩔 수 있기에? 그냥 당분간은 지켜보자고. 그 로봇과 이진영이 어떻게 될지는. 혹시 또 알아? 우리에게는 봉기를 위한 또 다른 카드가 될지.”
말을 마친 롱꺼는 음산하게 웃었다.
쎄잉꺼와 웡꺼는 롱꺼가 오랜만에 웃는 걸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롱꺼의 잔인함과 집요함은 두 보스 이상이었다. 그가 저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이진영에 대해 무슨 안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롱꺼가 지켜보자고 말했으니 두 사람도 더 이상 이진영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이진영의 이야기를 끝으로 보스들의 회합은 끝났다.
사실 영업시간이나 사업 배분에 대해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더 남아있었지만 그건 롱꺼가 정할 일이었고 잠꺼 같은 군소 보스들은 그저 통보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롱꺼가 롤스로이스 리무진에 타는 걸 시작으로 중화대루에 모였던 보스들이 다시 굴다리 곳곳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보스의 차량이 떠나자 다시 중화대루 앞에서 편폭이 터지며 화려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용탈을 든 용춤꾼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흉내 내며 북소리에 맞춰서 관광객들 앞에서 춤을 춘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은 마치 나날이 높아져 가는 롱꺼의 위세를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잠복한 경찰 요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수염을 휘날리는 용을 쳐다봤다.
“뭔가 큰 게 터지겠어. 큰 게.”
x에필로그1 요원번호 007
무의도 페선지구 사건 두 달 뒤 이진영은 완치판정을 받고 중부서에 복귀했다.
“빠라바라라빰! 강력전담부 제 44 대응팀장님께서 행차하십니다아!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아아!”
이진영은 팀장이라 찍힌 신분증을 마패처럼 들고 강력전담부 안에 들어왔다.
“어이고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슈퍼캅 이진영 경위 아니십니까요오! 제가 미리 양탄자를 깔아놨습니다요!”
양탄자는 그냥 신문지였다. 이진영은 익살스럽게 신문지를 밟고 레드카펫을 밟는 시늉을 했다.
강력전담부 동료들은 승진 아닌 승진을 한 이진영에게 야유를 보내며 반갑게 맞아줬다.
폐선 사건 때는 과다출혈로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해서 그런지 동료들은 더더욱 격하게 이진영을 반겼다. 이진영도 한 명씩 악수나 포옹을 하며 직장에 복귀한 즐거움을 실감했다.
“오호라, 이게 누구신가 같은 경위 계급에 같은 팀장, 23팀장 아니신가?”
이진영은 23팀장과 어깨동무를 하며 옛 상사를 놀렸다.
“이진영이 아주 잘 났어 증말? 아주 뭐 암행어사라도 되셨냐?”
“어허, 이진영이가 뭡니까. 이진영이가? 같은 팀장직급인데 상호 존대허셔야지요?”
“아오, 이 새끼 누가 승진시킨 거냐? 내가 내사팀에다가 확 찔러버릴까 보다.”
“아이고 그건 쫌. 이효진 팀장은 다시 보고 싶지 않거든요?”
“잘 해라잉? 내가 니 비위 사실을 한두 개 알고 있냐? 확 찌르는 수가 있어.”
이진영은 익살스럽게 두 손을 파리처럼 비비는 시늉을 하며 굽신거렸다.
“게 누구 없느냐? 팀장님의 사무실로 안내하거라!”
이진영은 팀장으로 승진한 후 넓은 강력전담부 한쪽에 개인사무실이 생겼다. 그는 투명 유리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역시 승진은 하고 볼 일이구먼.”
이진영은 책상의 인터폰을 눌러서 김상현 형사를 불렀다.
“어이, 김상현 대원 코오피 한 잔 뽑아와 봐?”
– 아 형님, 그냥 밖에 나와서 마셔요. 뭐 하러 사무실에서? 그리고 행정 로봇도 있는데 왜 나한테 그래요?
“개인사무실에서 마시는 커피 맛이 끝내줄 것 같아. 아예 책상에다 커피 전용 버튼을 만들까 생각 중이다. 버튼만 띡 누르면 딱 커피를 대령하는.”
– 쫌 있으면 아주 거기다 살림을 차리시겄네.
“아, 그리고 내 팀원들 집합시켜 주겠어? 내 한 번 봐야겄다.”
– 그것도 밖에 나와서 하믄 되지 왜 또 부르고 난리랩니까?
“어허, 김상현 대원 하늘 같은 팀장님의 말쌈을 거부할 셈인가? 경찰도 상명하복 몰라? 어쭈, 하극상이야?”
–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유리벽 너머도 김상현이 투덜대며 자판기에서 손수 커피를 뽑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44대응팀의 구성은 김상현이 행보관에 해당하는 선임수사원이었고 이진영까지 총 7명이었다.
이진영은 새로 배속된 다섯 명의 팀원 중 한 명을 알아봤다.
“그…… 이세화 팀장님 밑에 있던…….”
“엡, 김대현입니다.”
“인천시경 아동범죄 전담팀 아니었나?”
“아하하, 그게 이세화 팀장님 그만두시고 끈 떨어진 연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아이고, 안 됐네, 그려.”
“그냥 좌천은 아니에요. 44대응팀이 뭐 종합팀이라고 하던가요? 제가 아동범죄 전문 스펙을 쌓았으니 그쪽을 전담할 겁니다. 상부에서는 뭐 스페셜리스트 플래툰 시스템이라고 하더군요.”
이진영은 잠시 생각하다 한숨을 쉬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인천 청장님이랑 서장님이 나를 비롯해 우리 팀을 여기저기 빡세게 굴린다는 거군. 그리고 여기 있는 팀원분들은 각자 스뻬셜리스트, 전문가들이시고?”
“정답입니다.”
활기차게 대답한 사람은 귀엽게 생긴 여경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에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여경이 칼각으로 경례를 했다.
“임은혜 순경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습니다!”
임은혜는 무슨 군대처럼 경례를 붙였다.
“댁은 특기가 뭐지?”
“암호와 컴퓨터 해킹입니다!”
“아.”
김상현은 이진영의 앞에 턱하니 김대현을 비롯해 새로 배속받은 사람들의 이력서를 놓아주었다.
“카이스트? 뭐야. 왜 경찰이 된 거지?”
“경찰 24시를 보며 중부서를 늘 동경했습니다!”
이진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김상현도 깝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저보다 선배시네요? 근데 경사? 전상영 경사님? 어디 계시죠?”
이진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전상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저, 팀장…….”
“아이 깜짝이야!”
어느 틈에 들어온 건지 전상영은 이진영의 뒤에 서 있었고 이진영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파일을 떨어뜨릴 뻔했다.
“누, 누구세요?”
“전상영, 나.”
“예?”
“사고를 좀 쳐서. 폭발로. 잘 부탁.”
53세의 늙수그레한 중년 남자가 짧게 말했다. 이 남자는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진영은 이력서를 보고서야 이 중년 남자 전상영이 폭발사고를 크게 냈다는 한 줄을 바라봤다. 딱 봐도 전상영은 폭파전문가라기보다는 음침한 폭탄 테러리스트 같았다.
“아무래도 스뻬셜리스트는커녕 사고뭉치를 모아놓은 것 같은데?”
이진영은 남은 두 명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한 명은 전투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로마 병사 같은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진영 또래의 여자였다.
여자는 안경을 쓰고 옛날 간호사 가디건을 입은 평범한 외모였다.
“서울시경 중대 성범죄 수사국에서 전출 왔습니다. 윤숙희입니다. 반갑습니다, 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