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19
제119화
신희정은 너스레를 떨며 일본도를 들고 다니는 광학위장한 암살자랑 신나게 싸운 이야기를 했다.
신희정이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정 대령은 신희정이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를 공격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홍콩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일본도를 든 암살자를 격퇴했고, 그놈이 특별병과번호 중 한 명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 홍콩 경찰 엄청 이뻤어요. 제복을 입었는데.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
이진영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을 받아넘긴 신희정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소득은 있었어요. 놈들이 노리는 게 뭔지도 알아냈구요.”
이진영도 위스키를 한 잔 더 들이켜고 조용히 신희정의 말을 기다렸다.
“아미타여래.”
“아미타여래?”
“못 들어 봤어요?”
이진영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신희정을 바라봤다.
“중국군 2개 사단을 마비시켰다는군요.”
“예? 어떻게?”
“아미타여래는 ‘미래’에 올 부처죠. 제가 홍콩에서 참전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놈은 예언가처럼 자신이 관여한 전투 양상을 전부 예언했대요.”
“북중국군 사단을 해킹했다…….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해요. 마치 장기 말이 어디로 올지 예상하듯 그가 예상한 곳에 궤도폭격이 떨어졌다는 거.”
“예, 그거에요.”
아무리 미국의 궤도폭격이 무시무시하다고 한들 지하통로와 밤에 이동하는 북중국군 병력을 제대로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홍콩의 참전자들은 정확히 북중국군의 이동 경로에 맞춰서 궤도폭격이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그, 아미타여래가 바로 마이크로웍스 본사에 봉인되어 있었어요.”
“마이크로웍스 본사에요?”
신희정은 통신기에서 재머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보고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줄였다.
“마이크로웍스는 아미타여래의 신병을 CIA에게 넘겨받아 그 사람을 연구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신희정은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뜸을 들였고 이진영은 빨리 말하라며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때렸다.
“아미타여래와 이브이 원이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이진영은 이번에도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 이브이, 미국에 가 있죠? 미 국방부가 어쩌고 했겠지만, 사실은 제이미 킴인가 하는 부사장이 이브이 원을 미국으로 긴급 소환한 겁니다. 명목은 정비지만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고요.”
또 신희정이 뜸을 들이자 이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제 생각에는 아미타여래의 백업이 이브이 원인 것 같아요.”
이진영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EV-1의 정체가 특별병과번호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봐요. 이브이는 로봇 3원칙의 한계까지 이익형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공할 만한 성능.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요.”
한승우 사건에서 EV-1은 내사 중이라 제약이 많을 텐데도 틸트로터를 해킹하지 않나 주변 오만가지 것들을 다 해킹했다.
그리고 이진영은 계속 겹쳐져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김수겸의 팔을 쏘거나, 한승우의 엑소슈트 앞에서 0거리 미사일 폭격을 해서 그를 무력화시키거나.
이 두 가지는 보통의 로봇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인간의 정신을 백업하는 건 아직 불가능하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마이크로웍스가 그걸 성공했다면요? 아미타여래의 복제품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의 복제품이라면 당연히 로봇 3원칙에는 구속받지 않지요. 아미타여래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니까요.”
이진영은 그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해요. 아미타여래가 그냥 사람이라면 어떻게 중국군을 해킹하거나 중국군의 진격을 막은 거죠?”
신희정은 멋지게 이진영에게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특별병과번호의 소유자들은 모두 특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개조 인간이에요.”
“사이보그라고요?”
“예, 불법적인 인체실험으로 만들어진 괴물들로 추측됩니다. 그 배경에는.”
신희정은 어디서 구했는지 불타다 만 녹색 파일을 올려놓았다.
“육군 국방과학연구소?”
“여기 보면 대량의 마약성 약물이 유통된 게 보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가 극비리에 마약을 가져온 거예요. 이놈들이 마약 장사를 할 것도 아니라면 거의 톤 단위로 필로폰을 들여왔어요.”
이진영은 문득 정 대령의 부하 중 한 명이었던 근육질 여자 군인 ‘이 중사’를 떠올렸다. 그 여자는 분명 다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도 로봇처럼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이진영은 연이어 또 다른 사례를 생각해냈다.
“그러고 보니 천수관음도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살아남았죠.”
“맞아요, 경위님. 천수관음이 흘린 피와 부상으로 볼 때 놈은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합니다. 놈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놈들이 사이보그라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그거 말고도 이건 북중국군 문서인데 포로를 상대로 인체실험을 한 흔적이 있습니다.”
간체자로 빼곡하게 쓰인 기밀문서.
이진영은 북경어는 할 줄 몰랐지만, 간체자는 드문드문 읽을 줄 알았다.
“근데 여기 쓰인 특정한 능력이라는 건 뭐죠? 특정한 능력 계발을 위해 실험을 했다? 건물? 건물 계획?”
“그건 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아미타여래의 뜬소문이나 부동명왕의 소문들로 미뤄봤을 때 놈들이 전부 모이게 되면 위험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정 대령의 병대라는 건 지금 이 특별병과번호를 모으고 있다는 거군요.”
“그때는 천수관음 하나였지만 지금은…….”
이진영은 술을 들이켰다.
“최소 다섯 명?”
“일곱 명이요. 아직 코드네임조차 안 알려진 두 장이 더 있어요.”
천수관음, 아미타여래, 부동명왕, 제석천왕, 야차왕.
코드네임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놈들의 능력이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알 듯 모를 듯. 추측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진영과 신희정은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이브이와 아미타여래가 관련이 있다는 건 알겠어요. 근데 왜 놈들은 한국의 마이크로웍스와 아선을 때린 거죠?”
신희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제 추측이지만 정 대령 개인의 원한이 아닐까 싶어요. 여기 소문으로는 정 대령은 검은 방에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났다더군요. 불도 안 켜진 검은 방에서 꼬챙이로 으휴…….”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
“예,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조심해요. 놈은 집요하고 잔인한 놈이니까.”
이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상황은 그쪽이 더 심각하지 않나요? 내사팀장 말로는 CIA와 정보국 양쪽에서 쫓긴다면서요?”
“흐흐흐, 정보국이 왜 내사에서 내사로 끝나는지 알아요? 똥을 푸짐하게 싸도 잘만 보자기로 싸서 버리면 불문에 부칩니다.”
“죄송하게 됐군요. 제가 싼 똥을 그쪽이 처리하게 되었다니.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신희정은 멋지게 씩 웃었다.
“예, 괜찮아요.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뜬금없이 정보국의 모토를 말하자 이진영은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신희정도 낄낄 웃으며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아 그리고 중요한 걸 깜빡했네.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민지구 특히 굴다리는 전 세계에서 수배를 피해 숨어들어온 범죄자들로 넘쳐난다. 깊숙한 곳은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전혀 닿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신희정 역시 추적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일까?
하지만 이진영은 신희정의 능력이라면 홍콩이나 동남아 일대에 숨어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웡꺼는 풀려나는 대가로…….”
“20억. 알아요. 이미 소문으로 들었어요.”
“아뇨, 한 푼도 안 줬어요.”
“예? 마약 공장이 터져나가서 길길이 날뛰던 웡꺼가 한 푼도 안 받고 정 대령을 풀어줬다고요?”
“예, 대신 더 어마어마한 걸 약속했죠. 이 난민지구 전체입니다.”
이진영은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 대령은 경위님도 알다시피 페어차일드와 연결되어 있지요. 그리고 페어차일드는 이 신간척지를 갖고 싶어 안달이고요. 짧게 정리하면 웡꺼와 페어차일드가 정 대령을 매개로 손을 잡았습니다.”
신희정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첩보를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희정은 춘절에 롱꺼 산하의 모든 보스들이 모여든 회합 사진을 보여주고, 페어차일드의 변호사가 롱꺼의 고문변호사와 만나는 장면도 보여줬다.
“자, 잠깐. 웡꺼와 페어차일드가 손을 잡았다면 뭐 어떻게 되는 거죠?”
“웡꺼가 병력을 모으는 이유는 여기선 삼척동자도 알죠.”
이진영은 전율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봉기, 놈들이 봉기하려고 하는군요. 완전히 신간척지의 지배권을 틀어쥘 테고. 어쩌면 방벽 근처까지 놈들이 먹으려 들 거고요. 그리고 그 뒷배를 페어차일드와 CIA가 봐주고.”
“그리고 간척지의 지분을 나눠 가지는 거겠지요. 후후, 경위님이라면 금방 알아챌 줄 알았어요. 제기랄, 진작 알았어야 하는 건데.”
정 대령이 풀려나면서 페어차일드와 신간척지의 역학관계는 기묘하게 변했다. 이진영은 말없이 술을 때려 넣으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먹구름을 느꼈다.
이진영이 폐선지구에서 난리 친 이후로 몇 달 동안 웡꺼 패거리들이 잠잠하던 이유가 있었다.
“요원님은 이제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아뇨, 정 대령을 잡을 때까지는 보자기에 똥을 다 퍼담은 건 아니니까 당분간은 도망자 신세입니다. 후후후, 요원번호 007은 정지 상태랄까요?”
이진영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냐는 표정으로 신희정을 바라봤다.
“진짜예요. 제 국정원 요원번호 끝자리가 007이에요. 그래서 국장님이 제임스 본드라고 부르죠.”
이진영은 다 마시고 체리만 남은 보드카 마티니 잔을 씁쓸하게 쳐다봤다.
“아무튼, 경위님, 더 시끄러워질 겁니다.”
“그렇겠죠. 웡꺼가 봉기하고 페어차일드가 PMC를 투입할지도 모르고요.”
“아, 페어차일드 개발의 PMC면 레드아리마로군요. 그 자식들 전쟁 때도 지랄 같았지요.”
신희정과 이진영은 동시에 진저리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드아리마는 페어차일드 개발의 계열사였고 사실상 페어차일드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일단 월급이 빵빵하기 때문에 특수부대 제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었고 이들의 장비는 미군도 저리 가라 할 만큼 최신형이었다. PMC 주제에 제트 공격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레드아리마는 간위예 전쟁에서도 페어차일드의 이득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뛰어들어 페어차일드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심지어 수틀리면 한미연합군도 공격했다.
고전 게임 마계촌의 빨간 아리마 악마 그림이 붙은 패치는 미군에서도 보기만 하면 진절머리를 쳤다.
“하필 이때 팀장으로 승진하다니. 경찰 상부에서도 노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스페셜리스트라고는 온갖 사고뭉치들만 가득하고요.”
이진영은 짧게 아까 본 44팀 팀원들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신희정은 낄낄거리면서 이진영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다.
“아무튼 승진 축하합니다. 그리고 저도 슬슬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 같군요.”
“예에, 저도 이제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네요.”
이진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 바텐더에게 술값을 계산하려고 했다.
그러자 신희정은 ‘넣어둬, 넣어둬.’를 연발하면서 척하고 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