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25
제125화
이진영의 집도 한승아가 오게 된 후 많이 바뀌었다. 한승아의 그림도 붙어있고 식탁도 새로 샀다. 칙칙한 벽지도 새로 도배했고 무엇보다 이진영은 퇴근길에 더 이상 술을 사지 않았다.
이혼할 때 시간이 멈춰있던 집에 다시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승아가 작은 방으로 자러 가면 이진영은 불을 끄고 봉천동 시가지와 강남을 응시했다.
“진일수에게도 진소홍은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겠지.”
이진영은 오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사건 개요를 정리했다.
확실히 진소홍의 실종은 미심쩍었다.
외국인으로 서울대에 들어오려면 보통 노력을 한 것이 아닐 텐데, 장래가 촉망받는 유능한 인재가 어째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사랑인지 아니면 더 좋은 취업처 때문에 서울대를 포기한다고 해도, 외국인 등록을 미룬 건 이상해. 뭔가 일이 터진 거야.”
* * *
다음날 이진영은 한승아를 로비에게 맡기고 일단은 중부서로 출근했다.
휴일인데도 강력전담부는 주말이 없었다. 각 팀의 당직 직원들이 이진영에게 목례를 하거나 인사를 했고 이진영은 자신의 개인사무실로 들어갔다.
“어이, 김쌍혀이는 집이지. 매트, 크피 한 잔 찐하게 말아와 줄래?”
이진영은 매트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EV-1을 불렀다.
“이브이, 진소홍 사건 내사 착수하겠다고 서장님에게 보고해. 일단 외국인 실종사건이긴 하니까.”
–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종자의 관할은 강남서입니다.
“내산데 뭐. 서장님도 별말 안 하겠지. 게다가 우리 팀에 온갖 잡다한 일을 몰아주는 마당에 이런 거 들이판다고 누가 뭐라 그러겠어?”
EV-1은 바로 내사번호가 찍힌 문서를 모니터에 출력해줬다. 이제 진소홍 사건은 정식적으로 내사 사건이 되었고 이진영은 이 사건을 ‘수사 착수’까지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자였다.
이진영은 법무부 발행 외국인 등록증과 진소홍에 관한 각종 서류들을 꼼꼼히 살폈다.
“어? 팀장님 나오셨네요?”
“오우 김대현 대원. 너 당직 아니잖아?”
“축구화를 두고 가서요.”
“으응.”
이진영은 김대현이 입고 있는 형광색 축구 유니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뭐 고민하고 있으세요?”
“어, 어제 웡꺼의 요리사의 딸. 실종사건. 아, 쓸데없이 기네. 요리사의 딸.”
“아아, 그거요? 뭐 진전 좀 있었어요? 어 내사번호 땄네?”
서장은 이런 내사 사건 따위는 직접 결재하지 않고 행정 로봇이 알아서 분류한 후 문제가 있으면 알려준다.
김대현은 내사번호가 찍힌 문서를 스크롤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이상한데요. 출입국 관리소에도 등록을 안 하다니. 게다가 웡꺼의 요리사의 딸이. 음.”
“내 말이.”
“뭐 시키실 것 없으신가요?”
“아직은 내사 단계니 넌 그냥 뽈이나 차러 가.”
“옙, 위대하신 팀장님의 명 받들어 가보겠슴다.”
김대현은 씩씩하게 경례를 붙이고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내사번호도 땄겠다 슬슬 나가봐야겠군.”
지금 단서는 한승아의 창고물품 밖에 없었다. 내사 단계지만 서장의 결재에 따라 번호가 나온 이상 이진영은 각종 공공 인공지능과 사기업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얼씨구? 윤숙희씨? 자네는 또 왜?”
“저 당직입니다.”
“아 그랬나? 오케이 그럼 수고하셔.”
“팀장님, 그 사건 어떻게 되었나요? 웡꺼의 요리사의 딸의 실종.”
“윤숙희씨 뭔가 계속 길어지잖아. 그냥 요리사 딸 사건이라고 하자고.”
“예, 아무튼 그거요.”
“내사 착수했고 지금 요리사의 딸의 기숙사의…… 아 씨 글 못 쓰는 소설가도 아니고 뭐 이렇게 ‘의’가 많아. 진소홍이 창고에 남긴 물품 수색하러 갈 거야.”
“지원 필요하신가요?”
윤숙희는 진지한 얼굴로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확인했다.
“아이고 마님, 강남 갈 건데 누굴 쏘시려고요? 그리고 이브이만 있으면 되니까. 댁은 당직이나 스셔.”
“아뇨, 여대생이 실종되었다면 십중팔구는 성범죄와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정황을 보니…….”
윤숙희는 EV-1이 공유해준 문서들을 한눈에 훑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그녀는 성범죄에 관한 한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유능한 경찰관이었다.
“음, 필요하면 말할게. 필요하면. 아니 뭐 내사 사건에 다들 이리 우르르 관심을 보이고 그러나?”
“민원인이 웡꺼의 요리사니까요.”
확실히 진소홍의 실종 사실보다 민원인이 웡꺼의 요리사라는 것이 더 자극적이었다.
실제로 중부서에 오는 기레기 로봇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벌써 납치되어 성폭행 당했네 어쨌네, 웡꺼의 공격부대가 납치범을 목매달았네 하는 자극적이고 추측에 불과한 보도들을 양산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대는 당직 경관이니 상황 공유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이진영은 윤숙희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중부서를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때.
“저 팀장.”
“아 깜짝이야! 아니 선배 제발 좀…… 근데 선배는 당직도 아닌데 왜 나온 거예요?”
“취미생활.”
전상영은 자신의 자리에 있는 로봇을 가리켰다. 한 주 전부터 그는 EOD-폭발물 처리 로봇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술은?”
“예, 쫌 일이 있어서요.”
“아 웡꺼의 요리사의…….”
“아 됐어요. 무슨 김 수한무 삼천갑자 동방삭이야? 고만, 고만. 아무튼 그거 단서 확인하러 갑니다. 아, 도움 필요 없어요. 이브이 원만 있으면 됩니다.”
전상영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 한동안 이진영을 바라보다 자리에 앉아서 궁시렁댔다.
“선배, 걱정 마요. 조오오은 술 살 테니까. 그럼 나갑니다?”
전상영은 뒤를 돌아보며 빵끗 웃었다. 이럴 때는 참 감정을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이진영이 강력전담부를 나올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 팀장님, 그거 어떻게 됐어요?
“어, 임은혜 순경. 댁은 그냥 집에서 잠이나 쳐 자셔요? 알겠지요?”
– 아뇨, 웡꺼의 요리사의…….
이진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의 옆에는 기잉하고 어느새 로봇 행거에서 나온 EV-1이 대기했다.
– 다들 궁금해하는군요.
“그래, 이브이. 그놈의 웡꺼의 요리사니까. 아, 강남으로 갈 거니까…….”
– 모든 무장은 이미 해제했습니다.
EV-1은 척하면 척이었다. 이진영은 다시 탄환라인을 타고 몇십 분 만에 강남으로 되돌아왔다.
강남역은 서울대 저리 가랄 정도로 경찰들과 사설 경비회사 로봇들이 깔려 있었다. 강남 모노레일 역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만 해도 검색대를 세 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마이크로웍스 한국지사 폭파 테러의 여파였다. 강남의 고층 빌딩이 테러리스트에게 폭파당해 파편이 흩뿌려지는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이크로웍스와 아선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기반이자 먹거리였다. 경찰과 경비회사들은 또다시 그런 테러가 있을까 봐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안 사건에는 꼭 바퀴벌레처럼 끼어드는 세력이 있었다.
“제기랄 눈 베렸다. 육공새끼들이 강남역을 점거하다니.”
흡사 쿠데타군이 도심에 진주하는 것처럼 육군과 육군 공안부는 전차와 무장병력을 주둔시켰다. 모노레일역에 무장한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전쟁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다른 정부 부처는 괜히 주가가 떨어질 수 있다며 국방부에게 난리를 쳤지만, 국방부와 육군은 테러 대비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강남역에는 각각 다른 세 개의 검색대가 설치되었다. 이진영은 그 중 마지막 육군의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이었다.
언제나 이진영의 광저우 헬 스카잔 점퍼가 말썽이었다.
“어이, 당신 뭐야?”
“뭐긴 뭐야 경찰이다.”
정복 차림의 육공 요원은 이진영의 신분증을 보고 비웃었다.
“인천서 경찰이 왜 여기에?”
“김치말이 국수 먹으러 왔어.”
“말이 쫌 짧으시네?”
“그쪽은 말이 길었고?”
한 판 붙을 기세가 되자 EV-1이 이진영의 옆으로 슥 다가왔다. EV-1의 검은 프레임은 굉장히 위압적이었고 육군의 공격 로봇 KF-37보다도 위엄이 있었다. 사실상 EV-1의 양산기가 KF-37이니 그럴 만도 했다.
“뭐, 뭐야 이건? 공격 로봇인가?”
“경찰 로봇이지 뭐긴 뭐야?”
이진영은 검색대를 빠져나오며 핀잔을 줬다. 검색대에서 이진영의 부분 의수가 또 한 번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는 별 제지 없이 강남역 바깥으로 나왔다. 강남 모노레일역에서는 엘리베이터로 바닥강남까지 금방 갈 수 있었다.
바닥강남과 강남은 같은 지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손바닥만 하게 햇빛이 비치고 아래쪽은 싸구려 네온싸인과 백열전구 조명이 비치는 영원한 밤이었다.
이진영은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EV-1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로봇은 가는 동안 한성 스토리지에 대해 짧게 브리핑했다.
– 한성 스토리지에서 보관하는 물건들은 얼마간 보관하다가 6개월 후, 월미도로 보냅니다.
“월미도 어디?”
– 폐차장입니다.
“아, 거긴 임대료가 싸니까. 아무튼 운이 좋았군. 까딱하면 또 폐차장까지 기어들어갈 뻔했어.”
월미도 남쪽에 있는 쓰레기장인 폐차장, 그리고 월미도 서쪽 무의도 외곽에 폐선지구.
둘 다 이진영이 혈전을 치른 곳이었다. 요즘 그는 이 두 곳 이야기만 나와도 으으으하며 진저리를 쳤다.
두 곳 다 쎄잉꺼의 영역인 걸 생각해보면 어째 그는 웡꺼보다 쎄잉꺼 쪽과 악연이 더 깊었다.
* * *
한성 스토리지 창고는 정말 의외의 장소였다.
“뭐야, 이거 20세기 지하철역이잖아?”
‘강남’이라고 적힌 사각탑 표지판이 이진영을 반겼다. 사각탑 아래로 닳아서 번들번들해진 계단이 희미한 조명에 반짝였다. 이 오래된 지하철역은 고가형 모노레일이 완공되고도 한동안은 가동되었다.
그러나 점점 주변의 빌딩이 높아지고 지하철 자체가 슬럼화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성 스토리지는 지하철 역사와 선로 등을 이용하여 창고를 만들었다.
이진영은 닳고 닳은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왔다. 이곳도 굴다리처럼 어지간한 우범지역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계단에는 술에 취한 노숙자가 이진영이 다가오는 걸 보고 손을 내밀었다.
“한성 스토리지 손님이 꽤 있는 모양이군.”
이진영의 뒤에도 기업의 회사 로봇 둘이 박스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강남 위층에서 바로 아래였으니. 장사가 잘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시설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강남역의 시그니처였던 알록달록 타일이 어두운 조명에 반짝였고 저 멀리 개찰구를 개조한 접수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물건을 가져와 맡기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회사 로봇도 있는가 하면 매춘부로 보이는 여자가 트렁크를 맡기기도 했다
한성 스토리지의 접수 로봇은 휴머노이드가 아니었고 치과 의료 로봇처럼 문어발이 달린 로봇이었다. 로봇은 짐을 접수하고 바로 작은 트럭을 닮은 운반 로봇에게 인계하면서 동시에 접수까지 받고 있었다.
“경찰이다. 사건 수사를 위해 물건을 좀 봐야겠어.”
– 영장을 보여주십시오.
“아니, 민원인 보호자의 위임장은 있어.”
–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접수 로봇은 서류들을 온라인에서 확인하고 바로 이진영에게 말했다.
– 경관님, 물건이 많아서 이동하기는 힘들고 운반 로봇이 창고로 안내해 줄 겁니다.
한성 스토리지에는 인간형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하나도 없었다. 업종 특성상 휴머노이드보다는 짐 나르기 기능에 충실한 로봇이 더 써먹기 편했다.
이진영은 지게차와 트럭이 합쳐진 것 같은 로봇의 뒤를 따라 옛 강남역 선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콘크리트가 깔려 있고 벽에는 습기 때문에 물이 축축하게 흘러내려 이끼가 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