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26
제126화
창고는 길쭉한 상자 모양이었다,
그래도 첨단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었고 안에 공조 장치도 달려 있었기에 습기 때문에 물건이 상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 상자들이 천장까지 빼곡히 쌓여있었다.
운반 로봇은 상자들 중 하나 앞에 서더니 이진영이 올라설 수 있도록 발판을 턱하고 내렸다. 이진영과 EV-1이 발판에 올라타자 로봇은 그 둘을 약 3층 높이에 있는 창고에 두 콤비를 내려놓았다.
– 확인을 마치시고 저를 다시 불러주십시오.
로봇은 두 사람을 위층 발판에 올려놓고 다시 짐을 실으러 휑하니 이동했고 접수 로봇이 창고 문을 열어줬다. 기이잉하고 창고문이 아래에서 위로 열리고 조명이 확 밝아졌다.
지금까지 어두운 곳을 걷다가 갑자기 밝은 조명이 비치자 이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잘 정리해놨군.”
기숙사 관리 로봇도 마구잡이로 물건을 던져놓지는 않았다.
골판지 박스에 진소홍의 물품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고 박스에 안 들어가는 물건은 뽁뽁이 완충재로 포장해 놓았다.
이진영은 일단 큰 물건들부터 살폈다. 접이식 화장대, 가습기…… 어차피 기숙사에 다 기본옵션으로 들어가 있는 터라 학생들의 소지품은 옷과 이불, 책 등이 거의 다였다.
– 컴퓨터 콘솔을 찾았습니다.
“오케이. 바로 감식해. 그리고오오.”
이진영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스를 열다 민망해했다. 하필 제일 처음 연 박스가 속옷 박스였을 줄이야.
그는 화려한 붉은색 브래지어를 검지와 엄지로 들어 올렸다가 박스에 되돌리고는 박스 자체를 EV-1에게 넘겼다.
“네가 조사해.”
– 오, 그런 쪽에 취미는 없으신 모양이군요.
“얌마. 나 형사야. 이딴 일로 내사과에 잡혀가고 싶지는 않다고.”
이진영은 박스에서 나온 삼색 볼펜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삼색볼펜에는 한글로 ‘입학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볼펜은 ‘입학 키트’에 들어있는 물건이었고 그냥 기념품이 아니었다. 또한 ‘오리엔테이션’에 온 ‘내국인 전형’ 신입생만이 입학 키트를 받을 수 있다.
“유학생 전형이 아니라 내국인 전형이라니. 공부 진짜 잘했겠네.”
이진영은 볼펜을 따각거리다 박스에 던져넣고 이번에는 다른 박스를 열어 책을 파라락 펼쳤다. 아직도 공부할 때는 종이책을 많이 쓴다. 아무리 디스플레이가 발달해도 사람들은 종이에 대한 질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인공지능 설계라…….”
인공지능 설계 전공책에는 빼곡이 중국어로 적혀 있었고 이진영은 대충 책을 훑어보면서 넘겼다.
“이브이, 근데 왜 인공지능 설계에 인간이 필요한 거지?”
– 로봇의 한계 반응은 인간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만약 인공지능 설계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전에 도은주 과장이 말한 게 있었지. 네가 마하로 이동하면 그 위에 탄 나는 산산조각이 날 거라는 그런 이야기.”
– 예, 맞습니다. 인공지능의 이익형량이나 방향성에 관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방향성이라…….”
그 대목에서 이진영은 EV-1을 빤히 바라봤다.
인공지능은 특정 업무에 맞도록 설계된다. 청소 로봇에게는 고도의 감정 기능이 필요 없지만, 반대로 배우 로봇에게는 인간 뺨치는 감정 기능이 필요했다.
제조사와 인공지능 설계자들은 용도에 맞게 각 인공지능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EV-1의 설계 방향성은 뭘까?
신희정은 EV-1이 세계 최초로 인간의 두뇌를 백업한 로봇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것도 특별병과번호 중 한 명인 아미타 여래의 뇌를 복제한 인공지능.
신희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이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은 어떤 상황과 어떤 의도를 가지고 EV-1을 설계한 것일까? 인간에 거의 가까운 인공지능?
실제로 EV-1은 보통의 로봇이라면 할 수 없는 이익형량을 여러 번 보여줬다. 이진영이 EV-1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로봇은 왼팔 팔꿈치에 달린 작은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뭔가를 들어 보였다.
– 속옷들 사이에 이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빌로드 천으로 덮인 작은 함. 반지 케이스였다.
“이브이, 네가 열어봐. 조심스럽게.”
– 엑스레이로 확인해봤는데 폭탄은 아닙니다. 안에 들어있는 건 반지입니다.
“에이 혹시 또 모르잖아. 걔랑 친한 애가 인간해방 애들이랑 같이 있었다고.”
– 진소홍의 소셜미디어를 참고해본 결과 러다이트 계열 동아리에 가입한 적 없습니다.
하필 인공지능 학과의 서영은이 인간해방 계열 학생운동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바람에 이진영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나 참.”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반지를 열었다. 반지 케이스의 상단부에 ‘티파니 앤 코’라고 영어로 찍혀 있었고 반지 역시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 티파니 앤 코의 전임에 따르면 최신 모델이라고 합니다.
“최신 모델이고 나발이고 딱 봐도 비싼 거잖아?”
이진영은 반지를 들고 밝은 불빛에 비춰봤다. 반지는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EV-1의 말대로 티파니의 최신 커팅 기술이 적용되어 어느 각도에서 봐도 영롱하게 빛났다. 이진영은 문득 반지 안쪽에 영어가 각인된 것을 발견했다.
“씨 엑스 에이치(CXH)? 이건 뭐, 무기 형식번호라도 되나?”
– 천샤오홍의 북경어 한어병음 이니셜입니다.
진소홍의 북경어 발음을 한어병음으로 쓰면 CHEN XIAO HONG이었고 CXH는 그 이니셜이었다.
“아, 그럼 이것도 이니셜이라는 건데. 뭐야 이게.”
CXH 옆에는 JHK라는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고 누가 봐도 JHK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J.F 케네디를 연상시켰다.
“일단은 존 에이치 케네디건 뭐건 일단은 남자겠군. 이건 커플링이겠고. 이게 여기 있다는 것은.”
– 헤어진 남자친구가 줬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고렇지. 제이에이치케이라. 아, 어제 같은 과 서영은인지 하는 애한테 전화번호를 받아둘 걸 그랬네.”
서영은의 끊임없는 수다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이진영은 그만 번호를 받아두는 걸 깜빡했다.
– 서영은, 검색했습니다. 소셜미디어 음성통화로 접속할까요?
“어? 어…….”
이진영은 망설였다.
– 연결했습니다. 영상통화고 통신기에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이브이, 가끔은 좀 명령을 기다리라고.”
수화기 너머에서 꺅꺅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 이브이라고요? 아! 형사님이다! 야! 내가 어제 만났다던 그 형사님이야! 페이스북 메시지로 전화 주셨어! 형사님 옆에 있는 거 그 이브이죠! 랜드쉽을 박살 냈던.
이진영은 귀에서 수화기를 멀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학생?? 학생?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오케이?”
서영은 주변에도 EV-1의 팬이 있는지 같이 꺅꺅대며 ‘이브이 최고’를 외쳤다. 인공지능 설계학과 학생들이 EV-1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엑소슈트와의 두 차례 격전에도 승리로 이끈 무시무시한 검은 로봇.
난민들에게 귀신 로봇으로 불리는 최강의 공격 로봇.
EV-1의 팬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여대생들의 수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무튼 학생.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이거 보여? 지금 진소홍의 짐이 있는 곳에 왔는데 이게 발견되었어.”
– 아, 언니가 하고 다니던 반지다. 그치? 어?
“혹시 이 반지 준 사람을 본 적 있어?”
– 아뇨, 언니 남자친구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다른 여대생이 손으로 V자를 만들면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 소홍 언니 남친이 누구였지? 하도 많이 바뀌어서.
– 그러게. 언니 예뻐가지고 인기 많았잖아? 학생회장이랑도 사귀었고.
여대생들은 참새처럼 짹짹대며 진소홍의 남자관계를 다 까발렸다. 공과대 학생회장에, 무슨 일식요리사에 그중에는 마이크로웍스 설계주임도 있었다.
실종된 진소홍은 연애에 있어서 개방적인 모양이었다. 이진영은 여대생들이 불러주는 남성 편력을 전부 받아적고 물었다.
“그중에 혹시 JHK라는 이니셜을 가진 사람은 없어? 혹은 별명이라도.”
– 언니가 사귄 사람들은 거의 한국 사람이었을 거에요. 아 한 명 딱 있다. JHK, JHK. 존인가?
– 아 그네에, 그 사람 이름이 존 어쩌고였던 것 같은데?
이진영은 눈을 빛냈다.
“그 사람이 누구지?”
– 홍대에서 만난 미군이라던가?
“미군?”
– 예, 장교라서 옷이 멋졌어요. 하얀 제복이었는데.
“미 해군이로군. 계급이 뭔지는 알겠어?”
–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미 해군 정복은 일반인이 계급장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오케이, 고마워.”
– 아! 저희 잠시 이브이랑 이야기 좀 해도…….
“미안 지금 어이쿠 방해전파가아아아아아아.
이진영은 어설프게 연기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 방해전파 패턴은 바꾸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끄러. 아무튼 대충 용의선상이 나왔군.”
– 지금 확인할까요?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x2 RING, RING, RING.
이진영은 그 호들갑스러운 여대생인 줄 알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에도 인천 중부서 서장이었다.
“어? 서장님?”
– 어 이진영이. 지금 어디야?
이진영은 어둑어둑한 창고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냥 바닥강남에 그…… 김치말이 국수 먹으러요.”
– 강남에?
“휴일이고 출출하기도 하고. 서장님은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나요?”
– 아니이, 지금 사건을 급하게 배당해야 해서. 니네 사사팀이 제격이거든.
“뭔데요?”
– 로봇 탈취 사건. 요새 러다이트 계열에서 로봇을 잡아와서 걸어 다니는 폭탄으로 쓰는 건 알고 있지? 이번에 저쪽 송도에서 폭발사고가 터졌어.
“아, 예. 저희 팀이 맡겠습니다. 전상영 선배가 전문가이기도 하고.”
– 어, 그래. 그거 말고도 맡길 사건이 많으니까 서에 오면 확인해.
“예, 알겠습니다. 췅성.”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서장이 직접 사건을 대응팀에 배당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 이거로군요.
EV-1은 로봇 탈취 폭탄 사고에 대해서 보여줬다. 아선과 마이크로웍스 폭파사고 이후 그동안 잠잠했던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또 크게 한 건 사고를 쳤다.
러다이트 놈들의 테러는 특히 인간해방전선을 주축으로 점점 과격화되었고 이번에는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무차별 폭탄 테러에 주말에 공원에 나온 일가족이 휘말렸고 그 아버지가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중태.
“제기랄, 서로 돌아가야겠군. 하지만…….”
그러나 이진영은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각 팀장들은 독자적으로 수사개시를 할 수도 있지만, 상부에서 내려오는 사건 배당은 주로 강력전담부 부장이 한다.
“이브이 일단 현장으로 돌아가자.”
– 한승아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동물원은 언제 가냐고 하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는 일요일 오후에 한승아와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했었다.
이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양딸이고 친딸이고 못난 아버지로군. 이브이 내가 직접 이야기할게.”
이진영의 친딸 역시 형사 아버지를 둔 탓에 공휴일이나 명절에 아빠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이진영의 이혼 사유도 가정에 소홀하다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형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4시간 비상체제였다. 국가가 가종보험 혜택을 괜히 주는 게 아니다.
이진영은 투덜대면서 다시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왕복이었다. 아마 탄환라인이 아니었다면 두 번 오고 가는 걸로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