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30
제130화
이진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은주와 만나게 되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고 그러면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다 틀렸다. 그는 한승아를 입양한 후 늘 한승아 걱정뿐이었다.
“이브이, 다른 사람들은 어때?”
– 김상현 경사님은 이미 폭탄 출처를 조사하고 돌아오셨지만, 유인환, 전상영 경사님이 걱정입니다.
서울대 상황은 아주 안 좋았다. 경찰은 아직도 진입하지 못하고 대치 중이었고 학생회는 사람들을 줄줄이 잡아다가 무릎 꿇리고 심문 중이었다.
“저 상황에서 학생회장을 어떻게 잡아 와? 지가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 그리고 김대현은?”
– 예, 임은혜 순경과 함께 12팀 지원 중입니다.
“아주우 알뜰히 써먹으시는군. 완편도 아닌데.”
원래 대응팀의 T/O는 군대의 분대 편제라 총 12명이지만 경찰의 고질적인 인력난 때문에 편제를 다 채운 팀은 몇 없었다.
모자란 자리는 행정 로봇과 공격 로봇이 채워주긴 했지만 이렇게 사건이 마구잡이로 배당되면 일손이 부족했다.
“우리도 돌아가자. 일단 도은주 과장의 말을 들어봐야겠어.”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진영은 이제 짜증 내기도 힘든지 한숨을 푹 쉬며 전화를 받았다.
“예, 이진영입니다.”
– 왜 목소리가 그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이진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EV-1더러 잠깐 떨어져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EV-1과 이진영이 아무리 찰떡 파트너라고 하지만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이다.
“왜 또 전화야? 이미 다 들어갔잖아. 위자료 분할분이랑 양육비랑.”
– 아니, 그냥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그렇게 까칠하게 그러지 마.
“하유……. 미안. 오늘 휴일인데도 사건이 무지막지하게 터지네. 그래서 그랬어.”
– 넌 여전히 그렇구나.
“그래, 뭐 여전히 그렇지.”
이진영답지 않은 말투였다. 그는 상대를 조롱하거나 약 올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애는 잘 지내?”
– 어, 아빠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거 빼고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애가 신문을 봤나 봐. 왜 그 한승아인가 하는 애는 너랑 같이 사는데, 자기는 왜 아빠랑 살 수 없냐고 물었어.
이진영은 쓰읍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미안.”
–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건 아니지. 유진이가 많이 울었어.
“유진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 정말.”
– 그러게.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
이진영의 전처, 이보영도 딱히 이진영을 비난하는 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안 좋게 헤어지고 불과 몇 달 전까지 위자료 소송까지 걸고 난리가 났지만, 지금은 그냥 둘 다 덤덤했다.
“잘 말해줘. 다음에 보러 갈 때 선물 사 간다고.”
– 알았어. 넌 근데 밥은 잘 먹고 다니냐?
“그것도 뭐 그렇지.”
– 만날 술만 먹고 그러지 말고.
“딸린 식구가 생겨서 요샌 그러지도 못해.”
– 흐응, 나랑 살 때 그렇게 잘하든지. 나 참.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랑 살 때 잘했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건강하게 잘 지내라.”
– 너도 괜히 월미도 불구덩이 들어가지 말고. 건강하길 바랄게.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V-1은 분명 두 사람의 통화를 들었을 텐데도 멀찍이 떨어져서 이진영의 명령을 기다렸다.
“가자. 이브이.”
늘 하는 말이지만 유난히 더욱 힘 빠진 목소리였다.
* * *
이진영이 중부서로 되돌아왔을 때 각지에 수사나 지원을 나갔던 이진영의 팀원들이 되돌아와 있었다. 강력전담부 행어로 들어오자마자 김상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님 월척이에요!”
“뭐, 뭔 월척. 너 낚시 갔다 왔냐?”
“아, 이 양반 이럴 때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니까? 유인환이가 대물을 낚아왔어요!”
이진영은 유인환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전담부 사무실에서 44팀이라고 적힌 팻말을 바라봤다.
팻말 아래에는 팀원들의 책상이 놓여 있고 웬 육공 장교와 유인환이 입씨름 중이었다.
“저건 또 왜 저래?”
“그 공과대 학생회장. 유인환 선배가 잡아 온 거예요. 육군은…….”
“육공이겠지. 보아하니 학생회장의 신병을 넘기라고 난리인 거고.”
이진영은 바로 실랑이를 하는 육공 장교에게 다가갔다.
“아이고오,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제가 44팀 팀장 이진영입니다.”
육공 놈들은 이진영에게 여러 번 물을 먹고 호된 꼴을 당했고 당연히 이진영의 얼굴을 알고 있다.
“이진영 팀장, 신병 넘기시죠. 이거 공안 사건입니다.”
“아니이,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검거한 건 우리 앤데 왜 그쪽에서 신병을 가져가려고 합니까? 본청 공안이 와서 가져간다고 해도 고까울 판에?”
“아니, 이미 육군에서 먼저 수배가 되었다니까요?”
“아이 나 참. 음식에 침 바르고 찜하는 것도 아니고 먼저 수배가 된 거하고 신병을 넘기는 거하고 뭔 상관인데요?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우리 애 죽을 뻔한 거 안 보여요?”
유인환은 아까 송도에서 헤어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흙도 묻고 이마에는 피도 흘리고 있었다. 반면 같이 있던 전상영은 전혀 옷도 더러워지지 않고 다친 데도 없었다.
이진영이 전상영을 쳐다보자 그는 음침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하긴 워낙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니. 아무튼, 육공 선생님들 고생해서 잡았으니 첫 번째 턴은 우리, 두 번째 턴에 곱게 보내드리리다.”
“이봐요. 이 팀장. 우리 육공이에요.”
육군 공안부의 전매특허 멘트였다.
“아니 뭐 육공이면 어쩌라고요? 뭐 암행어사 출두야 하는 것처럼 바싹 엎드릴깝쇼?”
“좋은 말로 할 때…….”
“시발, 송도 폭파사고는 코빼기도 안 비쳤으면서? 이민호 국장님 통해 항의하는 수가 있습니다?”
육공 장교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송도에서는 폭탄 테러라면 내꺼, 내꺼를 연발하는 육공 놈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서울대 학생회 출범식 첩보를 듣고 그쪽에 모든 자산을 집중하느라 수사원 파견을 못 한 것이다.
정대령 사건 이후 육공도 예전 육공이 아니었다. 벌써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이 은근슬쩍 나돌았다.
“후회할 겁니다.”
“정 대령도 그 말 했었나? 기억이 안 나네.”
육공 장교는 정 대령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주먹을 꽉 쥐고 이진영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정대령은 육공의 치부였고 안 그래도 TV 정당토론회에서는 육공을 폐지하니 마니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육공 장교들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강력전담부를 나갔다. 지나가는 형사가 장교들 뒤에서 ‘대령중령소령은~~’을 부르면서 육공 장교들을 놀렸다.
이진영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유인환에게 꿀밤을 먹였다.
“내 명령 두 번 다시 어기지 말 것. 너 진짜 죽을 뻔했어.”
그때 마침 옆을 지나가던 23팀 팀장이 콧방귀를 흥하고 꼈다.
“아이고오, 44팀장니임. 우리 위대하신 이진영이께서 그렇게 상관의 명령을 잘 들으셨쎄요?”
딴 사람은 몰라도 이진영은 23팀장한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괜히 이마를 긁적이고 말했다.
“아, 아무튼. 유인환 어떻게 잡아 온 거냐?”
“초크 슬립 걸고 들고 뛰었죠.”
“뭐? 들고 뛰어?”
“공과대 깃발 아래 이놈이 딱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기절시키고 어깨에 들쳐메고 냅다 뛰었죠.”
“바리케이드는? 학생 애들이 바리케이드 쌓았잖아?”
“넘었죠?”
“쟤를 들쳐 업고?”
“예. 약간 좀 무겁긴 했는데, 운동 삼아 달렸습니다.”
공과대 학생회장은 약간 뚱뚱한 체형이었고 성인 남자를 들쳐메고 위태위태한 바리케이드를 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학생회장을 들쳐메고 수많은 학생들에게 쫓기는 유인환을 상상했다.
이진영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흐흐 웃었고 유인환은 좋다고 씩 웃었다.
“좋댄다. 이 유인원 같은 녀석.”
“아 그 별명은 부르지 마십쇼. 학교 다닐 때 만날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어요.”
유인원은 로마 병사처럼 근육질인 유인환에게 꽤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이진영은 유인환에게 대충 사과하고 의자에 앉아있는 공과대 학생회장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구,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셨구만.”
“짭새 새끼. 더러운 기계의 앞잡이!”
“누가 보면 독립투산 줄 알겠네. 아무튼 당신하고 할 이야기가 쪼금 많아. 우리 진득하게 사귀어 봅시다. 어이 기동보병, 이왕 총알 배송해준 김에 취조실까지 갖다 놔줘.”
유인환은 스타쉽 트루퍼스 드립을 아는 건지 씩 웃으면서 다시 공과대 학생회장을 어깨에 들쳐멨다. 학생회장도 작은 체구는 아니었지만, 거구인 유인환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송도 폭탄테러 사건은 의외로 술술 풀렸다.
김상현과 이진영이 번갈아 가며 폭탄의 종류와 설치 방법, 그리고 피해자 가족사진 등을 나열하자 학생회장은 울음을 터뜨리며 범행을 인정했다.
김상현은 웡꺼에게서 흘러나온 폭탄 사진을 보여줬고 윤숙희는 도은주가 증언한 조작 부분을 제시했다.
학생회장은 로봇 3원칙을 우회하기 위해 시각센서의 소프트웨어를 조작했다. 인간으로 치면 폭탄이 케이크로 보이게 딥러닝 시키고, 테러리스트들을 주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로봇은 공원 한가운데서 자폭하면서 인명피해를 냈다.
“인간해방전선에서 지원을 받은 거라고?”
“예, 조작기술도 거기서 소스를 받았어요.”
“음……. 하긴 아무리 네가 인공지능 셜계과라도 아직 학부생이니까.”
“그, 그럼. 저,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뭐 어떻게 되긴? 빵에 가서 형님들한테 마사지 좀 받겠지.”
장래가 촉망받던 청년이 테러리스트의 꼬임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람이 죽었으니 최소 10년 형, 재수 없으면 사형까지 받을 수도 있다.
이 학생회장이 더 운이 나쁜 것은 인천 중부지검의 형사 1부 부장이 야망에 불타는 구자연 검사라는 것이다.
“아무튼 폭탄 테러는 그렇고. 뭐 좀 물어볼게?”
“아, 아무리 그래도 도, 동료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먼저 딴 놈이 불었다고 소용없습니다. 그거 위법수사잖아요?”
“오우, 죄수의 딜레마에 통달하셨군. 아니, 내가 물어보려는 건 그게 아니야. 진소홍 알지?”
“아아, 그 어장관리녀요? 흥 그 짱개년 내가 꼬실라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아요? 데이트는 신나게 했는데 한 번도 먹어보지도 못하고. 다른 놈에게는 다리를 잘도 벌…….”
학생회장의 뒤통수를 윤숙희가 빡하고 때렸다.
“야, 여기 경찰서다? 말 이쁘게 해라?”
“아 왜 때려요? 이거 위법수사 아니에요?”
“시끄럽고 웡꺼의 요리사의 딸에 대해 이야기해봐.”
“워, 웡꺼의 뭐요? 워, 웡꺼의 딸?”
학생회장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진소홍은 자신의 학과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웡꺼와 관련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사람 아버지가 웡꺼의 요리사야.”
학생회장의 얼굴에서 대번에 핏기가 사라졌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뉴스에서 롱꺼와 웡꺼의 이름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다.
이진영은 수첩을 펼치고 말했다.
“너 진소홍이랑 만난 거 아니었냐? 과 후배가 남자친구라고 그러던데?”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작년에는 단둘이 데이트도 하고 막 그랬으니까. 근데 걔 어장이에요. 비싼 데만 가서 다 먹고 비싼 옷만 뜯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