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34
제134화
– 야 말도 마라. 이건 뭐 시가전하는 것도 아니고.
수화기 너머에서 간간이 총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민호 국장이었고 그는 서울대 진압 현장에 나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전투경찰과 학생들은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최신예 자동소총은 물론이고 보병용 엑소슈트까지 장비하고 치열하게 경찰들을 막아섰다. 경찰들은 일단 여론 때문에라도 비살상무기로 학생들을 제압해야 해서 더더욱 학내로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거기에 경찰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비뢰포였다. 대학생들은 국공내전 시기에 홍군이 쓰던 비뢰포를 똑같이 개조해서 건물 위에서 사제폭탄들을 날렸다.
스크럼을 짜고 진압대형으로 다가오는 로봇들이 비뢰포에 우르르 쓰러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학교 안에는 화학약품들이 넘쳐났고 학생들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라 각종 시설들을 활용하여 무기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진영은 TV 화면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몸조심하세요. 괜히 나서지 마시고.”
– 이진영이 니가 할 소리냐? 아무튼 보고 받았는데 뭐 외교 문제가 될 뻔한 사건 오늘 또 해결했다고?
“예, 운이 좋았어요. 그냥 굴다리 들어가서 액션만 취하려고 했는데 용의자가 딱 나타나더라고요.”
이진영은 방금 전 굴다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짧게 이야기했다. 이민호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운도 좋다며 이진영을 칭찬했다.
– 너 임마. 본청으로 넘어오면 좋았잖냐?
“뭐, 아직은 이곳이 좋아서요. 아무튼 조만간 찾아뵙겠…… 아 마침 전화하셨으니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 뭔데? 말해.
“너구리 굴 맴버 중 그 사람 소식은 들으셨어요?”
이민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전화를 내사팀이나 육공이 도청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말을 고르는 것이리라.
– 자세히는 몰라 나도. 내사가 풀렸다는 소문도 있고 뭐라더라 혐의가 원래는 혐의가 아니라 블랙요원으로 바뀌는 과정이라는 소문도 있고.
이진영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신희정은 이진영의 소송 사실을 알려주며 정보국과 이어져 있다는 암시를 줬다.
정보국은 때론 이중 스파이를 만들기 위해 혐의를 씌우고 정보요원을 자유롭게 풀어주기도 한다. 신희정을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블랙요원으로 만들기 위해 혐의를 뒤집어씌웠다면 그것도 꽤나 설득력 있었다.
“예,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번 관광객 사건도 본청으로 이첩해 드릴게요.”
이진영은 감사 인사를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팀장님.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너구리 굴은 뭐예요?”
“아니, 고거슨 김대현 요원이 알아선 안 되는 것이네. 가자 이브이. 김민지 사건 조사하러 가야지?”
김대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진영은 강력전담부를 나가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다른 팀들을 눈여겨봤다.
어떤 곳은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회의하는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조용히 일일 업무를 처리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팀원들 전부가 미친 듯이 각각의 사건을 조사하러 뛰어다니는 44팀만큼 바쁘지는 않았다.
사실 어제오늘 배당된 사건들만 해도 만약 운 좋게 용의자를 잡지 않았다면 몇 달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을 사건들이었다.
이진영은 잠시 가만히 서서 뭔가를 생각한 후 밖으로 나왔다.
* * *
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김민지와 성폭행 피해자가 일했다는 업소는 서울에 있었다.
이진영은 업소에 가기 전 윤숙희와 중간에 만나서 성폭행 피해자를 먼저 만나러 왔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다면 이 사람에게 묻는 쪽이 나았다.
“에에, 멋지게 생긴 경찰 아즈씨네에?”
성폭행 피해자는 이진영을 보자마자 윙크를 날렸다. 여자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겉늙어 보였다. 화류계 생활을 하면 느껴지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여자에게는 넘쳐흘렀다.
이진영은 생각보다 정상적인 멘탈을 보여주는 여자를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화류계에 있는 여성이 아니라 일반적인 여성이라도 성폭행 후 겉보기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많았고 이진영 역시 강간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번 목격한 적 있었다.
“오빠, 혹시 TV에서…….”
여기도 경찰 24시 애청자가 있다.
“흠흠, 아,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아까 저 언니야한테 다 말했는데요?”
여자의 말투에 살짝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아니,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 사람 알죠?”
이진영은 공항 근처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김민지의 사진을 보여줬다.
“사파이어?”
“사파이어?”
“예, 우리끼리는 그렇게 불러요. 이 바닥에서 서로 이름 알아봤자 좋을 게 뭐 있다고? 예전에 아는 언니가 친하다고 아는 동생에게 이름 말해줬다가 결혼식 때 곤욕을 치렀대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화류계 생활을 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파이어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왜요? 걔 사고라도 쳤어요?”
“아, 요새 왜 이리 턴을 안 지키는 분들이 많지? 제 턴입니다. 먼저 말씀해 주셔야 제가 그다음에 말씀드리죠.”
“아아, 그르네. 사파이어랑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어요. 매장에서 만나면 그냥 밥 먹고 그러는 사이?”
“사파이어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죠?”
화류계 생활을 하다 보면 눈치와 짬빱이 생기게 마련이다.
“죽었군요. 고년 호구 하나 잡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니. 하이이, 개년이 저번에는 살살 여우짓 하면서 돈까지 빌려 가더라니. 꼴좋다.”
사이가 데면데면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여자는 김민지가 죽었다는 걸 알자마자 폭언을 쏟아냈다.
“호구요?”
“예에. 뭐 좋은 사람 만났다나?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하대요. 나한테까지 돈을 빌리려고 했다니까? 나를 속일라고 해? 기껏해야 호스트빠에서 홀랑 넘어간 걸 텐데.”
이진영은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호스트바라고 적어넣었다.
“그 밖에는 사파이어에 관해 아는 거 없을까요?”
“몰라요, 다른 언니야들은 걔랑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 몇 명 있긴 해요.”
여자는 오팔이니 루비니 하는 보석 이름 몇 개를 알려줬다. 가게 안에서는 자기들끼리도 보석 이름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오케이, 협조 감사합니다.”
“사파이어 근데 어떻게 죽었대요? 굴다리에서 죽은 거 아니에요? 진짜 막장은 형사님도 알죠? 굴다리 정육점. 거기서 죽은 거 아니에요?”
굴다리 정육점은 롱꺼의 영역에 있는 세계 최대의 집창촌을 뜻한다. 불법 매춘으로 기본소득도 끊어지고 나이가 든 매춘부들은 젊을 때처럼 돈을 펑펑 쓰다가 거기로 팔려 간다.
“아…… 뭐 자세한 건 아직 수사 중이라.”
여자는 뭔가 지갑에서 딱 1만 8천 원을 꺼내서 이진영에게 내밀었다.
“부조금이에요. 그년 장례식 하면 갖다주세요.”
“아, 예, 뭐.”
이진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1만 8천 원을 받았다. 여자는 죽은 김민지를 한껏 조롱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수사수첩 뒷장에 돈을 끼워 넣었다.
“아저씨가 그냥 국밥 사 먹어도 돼요.”
“장례식장에 전달하도록 하죠.”
“아, 잠깐. 아저씨, 그 사진 뭐예요?”
이진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수사수첩에 끼워져 있던 진소홍의 사진을 낚아챘다.
“어어? 제이드?”
“제이드?”
“얘 제이드예요. 우리 가게에서 몇 번 본 적 있어요.”
이진영과 윤숙희는 서로를 쳐다봤다.
뜻밖에도 강간 사건이 공항 해변 변사체 사건으로 이어지고, 또 진소홍 실종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윤숙희가 먼저 물었다.
“이 사람이 확실해요? 제이드?”
“워낙 중국 미녀처럼 생겨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잖아요? 거기다 자기가 제이드라니. 흥 짱개답다 싶어서 기억하고 있었지요.”
제이드(Jade)-녹옥(綠玉).
중국인들이 예명으로 많이 쓰는 이름이었다.
“아, 사파이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뭐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제이드. 사파이어랑 같이 있는 걸 몇 번 본 적 있어요.”
“그럼 예명으로 부르는 걸 보니, 이 사진 속의 여자도 업소…….”
“잘은 모르겠어요. 언니야도 알잖아요? 이 업계도 인턴제도나 견학이 있어서 그냥 왔다 갔다 했을 수도 있어요.”
작정하고 매춘을 시작하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견학 시스템은 예전에 룸싸롱 같은 데서 많이 쓰던 방법으로,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화류계에 적응시키고 끝내는 몸까지 팔게 만드는 교묘한 시스템이었다.
친한 친구와 룸에 놀러 오라고 한 뒤 크게 술을 사고 그렇게 마담과 신뢰를 쌓다가 아가씨가 안 나왔다며 룸에 들여보낸다. 당연히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매춘까지 심리적 저항선을 계속 무너뜨리며 여자를 술과 돈, 화려한 화류계의 분위기에 취하게 만든다.
이 방법은 명문대 여자를 매춘부로 전락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이었고 진소홍이 걸려들 법했다.
“혹시 걔도 죽은 건가요?”
“아니, 그건 아직 몰라요.”
“오오, 뭔가 문제가 터지긴 한 거네요. 흐흐흐,”
여자는 잔인하게 웃었다.
이진영은 협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윤숙희와 함께 여자의 집에서 나왔다.
“팀장님.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김민지의 연고는…….”
“제가 자택에 갔다 오고 시골에 있는 부모와 연락해봤습니다. 딸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윤숙희는 여기로 오는 김에 기초조사를 다 해놨다. 이진영은 윤숙희의 메모를 수첩에 옮겨적었다.
“멀쩡한 아가씨가 왜 이쪽에 빠진 걸까? 얼굴도 예쁜데…….”
“예, 부모 말로는 남자친구가 나쁜 놈이라고 하더군요. 그놈이 범인일 거라고. 많이 우셨어요.”
“남자친구 사진이나 기록은?”
“피해자 부모님도 남친의 이름은 모르셨고 피해자의 집에는 전혀 단서가 없었어요. 아니 단서가 너무 많다고 해야 하나?”
윤숙희는 쓰레기장이나 다를 바 없는 원룸 사진을 보여줬다.
변사체로 발견된 김민지는 전형적인 화류계 여성이었다. 방안에는 온갖 쓰레기가 쌓여있었고 침대조차도 라면이나 과자봉지에 뒤덮여있었다.
화장실의 모습은 더 끔찍했는데 피운 담배를 마구 버려서 담배와 생리대가 탑처럼 쌓여있었다.
“시발……. 가사로봇이 없었나?”
“있는데도 일부러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아요.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하더군요. 의사나 요리사처럼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도 쓰레기 탑을 만들고 산다더군요.”
“아무튼,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감식 로봇은?”
“시 청소 차량과 돌돌이가 링크되어 감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현장에 가서 감독할까요?”
“아니, 그냥 댁은 저 여자 강간 사건이나 수사하면 돼. 아, 근데 가해자는 누구야?”
“원룸에 침입한 스토커였대요. 저항해 봤지만 전기충격기에 당하며 꽤 끔찍한 꼴을 당했다나 봐요.”
“스토커라. 그놈은?”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봉식이가 본청 전임과 연결되어 DNA, 동선 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