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35
제135화
“오케이, 수고했네. 윤 수사관. 댁은 일단 서로 돌아가셔서 피해자 조서 처리하시고. 그 스토커인가 하는 놈 잡아내고.”
“팀장님은 뭐 하시게요?”
“김민지, 그 아수라장에 가봐야지. 내가 검시한 사건이기도 하고.”
윤숙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빙긋 웃었다. 깔끔한 그녀로서는 내심 김민지의 방에 다시 들어가는 게 고역이었다.
윤숙희가 순찰차를 타고 서로 돌아가고 이진영과 EV-1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진영이 그녀를 먼저 돌려보낸 건 김민지의 방보다도 담배가 피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브이, 어떻게 생각해?”
– 후후 팀장님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상하잖아? 웡꺼의 요리사의 딸이, 공항에서 발견된 변사체……. 아오, 시발 진짜 김수한무가 되겠네.”
– 피해자 김민지의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기록에는 진소홍과 접점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저도 그 여자에게 정보를 듣고서야 검색해봤습니다.
김민지와 진소홍의 공통점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 음식사진만을 남겼다는 점이다. EV-1은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음식사진들에서 각각 찍은 각도가 다른 궁보기정 요리 사진 두 장을 찾아냈다.
“이건…….”
– 사진의 메타정보로 보면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EV-1은 삼각측량으로 김민지와 진소홍이 같은 시간 맞은편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추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EV-1은 바깥의 풍경 사진 일부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사진을 얼핏 보면 전혀 달라 보였지만 EV-1이 한 쌍으로 정리해 낸 사진들은 총 23장이었고 사진들의 날짜 간격은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꽤 조밀했다.
“그 여자의 말이 맞았군. 적어도 진소홍과 김민지는 자주 만났어.”
– 예,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진의 메타정보로 확인했을 때 마지막 사진이 3개월 전입니다.
이진영은 잽싸게 수사수첩을 펴고 모나미 볼펜으로 한 곳을 짚었다.
3개월 전.
“잠깐 이브이, 김민지의 사망추정시각이 어떻게 되었더라?”
– 3개월 전입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EV-1은 고급 레스토랑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진영도 대충 설렁설렁 보면서 넘겼던 사진이었다.
– 그림자와 사진으로 추정해보니, 최소 두 사람이 더 배석하고 있습니다.
EV-1은 이진영의 핸드폰 디스플레이에 3차원으로 구현된 테이블을 보여줬다.
“이게 아까 그 여자가 말한 호구일지도 몰라. 어쩌면 김민지 살해를 이놈들이 했을지도 모르고. 여기 위치가 어디야?”
– 링로드의 각도로 추정해봤을 때 굴다리 근처의 ‘창티엔’이라는 곳입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입니다.
이진영은 창티엔의 위치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창티엔은 웡꺼의 영역 안에 있었고 이곳도 중화대루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까 푸만추 수염을 생포한 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였고, 지금 그가 웡꺼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창티엔에 가서 ‘3개월 전에 이 여자들을 봤느냐?’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기랄, 일단 김민지 방에 가보자.”
김민지의 집은 신흥동에 있었다. 신흥동은 송도처럼 완전히 슬럼화되진 않았고, 또 월세가 저렴해서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편이었다.
탄환 라인 덕에 3, 40분이면 서울권 어디든지 접근 가능한 터라 집세에 쫓겨서 밀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김민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 * *
이진영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쓰레기장 그 자체였던 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시의 청소 로봇들은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일일이 돌돌이의 감식을 받느라 청소가 더뎠다.
옆집 주민이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와 벌컥 화를 냈다.
“아, 뭐야! 냄새. 로봇 빨리 좀 치워 머리 아파 뒈지겠네!”
– 죄송합니다. 경찰과 협조 중이라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남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로봇을 발로 뻥 걷어찼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남자는 이진영을 쏘아보곤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진영도 차마 남자의 행동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온갖 음식물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에서 나는 썩은 내가 뒤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발 밀폐형 헤드모듈이라도 가져올걸.”
– 저는 코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자랑이다.”
이진영은 쓰레기들 사이로 난 길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시의 청소 로봇들은 이진영을 알아보고 조용히 길을 비켰다. 방 안의 상황은 사진으로 볼 때보다 더 심각했다.
따뜻한 봄이 되면서 온갖 쓰레기들이 부패하기 시작했고 벽지에 곰팡이가 슬면서 한쪽 벽면이 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이진영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열차 강도처럼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피해자의 유류품을 살폈다.
– 증거가 될만하거나 가격이 있는 것들은 거기 놓아두었습니다.
“어이 로봇. 돈이 되겠냐? 이런 게? 다 썩었구만.”
그나마 쓰레기가 빠진 벽면에 피해자의 옷가지나 여행용 트렁크 혹은 잡동사니가 놓여 있었다. 이진영은 제일 먼저 여행용 트렁크에 손을 올렸다.
– 팀장님, 제가 대신할까요?
“폭탄이 있을까 봐?”
여행용 트렁크 안에는 폭탄보다 더한 게 있었다.
지퍼를 열자마자 바퀴벌레와 온갖 벌레들이 밖으로 튀어 나오면서 이진영의 점퍼 안으로 기어들었다.
그는 기겁하면서 몸을 퍼드덕거렸다.
“아 이 미친년! 진짜 미친년이네! 트렁크 안에 뭘 넣어놓은 거야!”
– 개의 사체로 보입니다.
“개? 또 뭔 개?”
– 이겁니다. 피해자가 기르던 개.
EV-1은 김민지의 페이스북에서 강아지 사진을 보여줬다.
“아, 진짜 고인한테 이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뭔 시발……. 야 돌돌아. 넌 이거 알았던 거 아니냐? 혹시 나 엿 먹일라고 그런 거니?”
서에 있는 감식 로봇 돌돌이는 자기도 몰랐다며 삐삐하고 항변하는 소리를 냈다.
이진영이 돌돌이에게 화를 내는 사이 EV-1은 새카맣게 변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개의 사체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개 목걸이도 부패가 진행되면서 검게 변해 있었다.
– 팀장님, 이걸 감식해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요?
“개 목걸이? 흠… 하긴 요새 개들은 GPS 달린 목걸이가 필수니까.”
– 카메라도 달려 있습니다. 부식이 심해 제 센서로는 감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봉투에 넣고 서로 가져가자.”
이진영은 다른 피해자의 유류품을 확인하려다 EV-1에게 물었다.
“이브이, 나 떨고 있냐?”
– 예.
이진영은 헛구역질하며 피해자의 가방, 유류품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김민지는 대학을 중퇴하고 화류계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으면서 돈을 펑펑 쓴 것으로 보였다.
옷이나 화장품은 백화점에서만 파는 브랜드가 많았고 여러모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흔적들을 제외하면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다.
“월세가 밀리지 않은 게 신기하군.”
– 부모님이 월세를 보내주셨다는군요.
“아, 그래서 3개월 동안 쓰레기장이 된 채로 방치된 건가.”
김민지의 행적 역시 변사체로 발견된 걸 제외하면 이렇다 할 만한 특이점은 없었다.
“창티엔의 사진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을 알아내야 해.”
– 예, 진소홍 실종의 실마리도 거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김민지가 살해되었다면.
“그래, 진소홍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그때 이진영은 불현듯 뭔가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잠깐, 김민지와 진소홍은 월미도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어. 근데 좀 이상한걸?”
– 그렇군요. 웡꺼의 요리사라면 벌써 창티엔을 다 조사했을 텐데요?
“그래 진일수인가 하는 사람은 웡꺼 조직원들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사람일 테니까.”
– 예, 기록을 살펴보니 진일수가 오고 나서야 올드차이나가 미슐랭 스타를 땄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진일수는 웡꺼 조직 내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일 테고, 웡꺼 조직망을 통해 딸이 실종되기 직전 누군가와 만났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 팀장님, 이거 또 이용당하는 건 아닐지요? 전에 천도영 실종사건에서 웡꺼가 팀장님을 순순히 들여보낸 것처럼 말이죠.
이진영은 강직해 보이는 노인 진일수를 떠올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랬지. 웡꺼는 희망빌라를 폭파시킨 놈을 찾기 위해 나를 중화대루에 들여보냈어. 마찬가지로 진일수는 그놈들을 찾기 위해 나에게 온 거야. 웡꺼의 조직망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놈들이라……. 대체 누구지?”
이진영은 EV-1가 3차원으로 재구성한 창티엔의 테이블 맞은편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두 명.
이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적어도 진일수가 이진영에게 올 때까지 3달 동안이나 웡꺼 패거리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두 명…….”
아무리 EV-1이 뛰어난 로봇이지만 ‘형사의 감’ 부분에서는 이진영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로봇은 언제나처럼 이진영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지금까지 나온 정보들을 조용히 정리했다.
“이브이, 일단 서로 돌아가자. 그 개 목걸이도 뒤져봐야 할 것 같고.”
이진영과 EV-1은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택시를 잡고 중부서로 되돌아갔다.
* * *
이진영은 강력전담부 행어로 들어오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각양각색의 상인들이 북경어, 광동어, 영어, 한국어 제각각 다른 언어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진영은 김상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불법 노점상 일제 단속이라고 합니다.”
“비 오는 날에? 원래 비 오는 날은 안 하잖아?”
“아 나도 몰라요. 상부에서 테러 위험 어쩌고 하면서 노점상을 단속하래요.”
“본청?”
“예, 까라면 까야죠. 뭐.”
“근데 왜 우리 강력부에 갖다 놓은 거야?”
“제일 넓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도 업무를 도우래요. 하아, 우리도 바빠 돌아가시겄는데.”
김상현은 차량 상해사고의 조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조서를 읽고 다시 돌려줬다.
“차로 들이받았다고? 불법 운전 상해죄라니 인생 조졌구먼. 요새 수동운전 상해 판결이 쎄던데.”
“예에, 한순간에 화를 조절 못 해서 조진 거죠.”
“어? 구치소에 넣어놨으니 그래도 그건 피의자는 잡혔으니 다행이네.”
“누가 아니래요? 근데 윤숙희 말 들어보니까, 공항 변사체랑 웡꺼의 요리사의 딸이랑 연관이 있다면서요?”
주변에 있던 44팀 형사들이 웡꺼라는 말만 듣고 강아지처럼 이진영을 쳐다봤다.
“조사 중. 그리고 이 개 어쩔 거라냐? 얜 또 왜 이렇게 젖었어?”
포메라니안이 비에 쫄딱 젖어 털걸레처럼 변했지만 좋다고 이진영에게 헥헥대고 있었다.
“아오, 진짜 개판이다. 개판. 뭐 하나 풀리면 또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아, 맞다. 형님. 광동어 능력자가 형님밖에 없어서 통역 좀 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아까부터 저 난리에요.”
의외로 난민지구에서 비 오는 날은 대목이었다. 특히 월미도역은 최첨단 기술과 너저분한 난민문화가 교차하는 곳이라 장사가 잘됐다.
이진영을 비롯한 술꾼들은 푸른 방수포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도 안주 없이 술을 마실 정도였다.
“매트한테 시켜. 나도 바빠.”
하지만 잡혀 온 상인들 중 몇 명이 이진영을 알아보고 그에게 하소연을 하는 통에 사무실에서 마냥 농땡이를 피울 수도 없었다.
그는 절도, 소매치기 등을 담당하는 경범죄부를 도와 조서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