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36
제136화
2시간 동안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불법 노점상 단속 건을 처리한 이진영은 녹초가 되어 44팀 의자에 뻗어버렸다.
“나아참. 그냥 인공지능 번역 쓰면 되지.”
“갬성이 없다잖아요. 뉘앙스도 약간씩 다르고. 발음도 달라서 알아먹기 힘들고.”
“뭐야 김대현이. 언제 왔냐?”
김대현도 오늘 보고서 쓰고 서장실을 비롯해 여기저기 불려가느라 녹초가 되었고 이진영의 옆 의자에 앉아 축 늘어졌다.
축 늘어질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했다.
경찰 캐릭터 인형을 입고 비에 흠뻑 젖어서 임은혜가 터덜터덜 강력전담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어이 은혜씨 어땠어?”
임은혜답지 않게 매섭게 말을 건 형사를 노려봤다.
“지옥이었어요. 그건 지옥이에요. 아이들이라는 이름의. 로봇도 방전되는 마당에 애들은 왜 지치지도 않냐고…… 무슨 무한동력이냐고…….”
그녀는 경찰 정모를 쓴 진돗개 인형 탈 머리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이진영의 옆에 앉았다.
이진영은 말없이 아직 안 마신 커피를 건넸다.
이진영, 김대현, 임은혜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팀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윤숙희는 강간 사건으로 시경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느라 노점상 처리를 피할 수 있었고 제각각의 사유로 녹초가 된 세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팀장님, 아무튼 소득은 있었어요. 스토커 등이 찍힌 사진이 나왔어요. 티셔츠 무늬를 통해 놈이 신흥동 일대에 산다는 건 알아냈어요. 시경 전임이 통보해 준다고 했습니다.”
“어, 수고했네. 자네도 커피나 한잔 들게. 매트 매트 홈매트으. 윤숙희 수사관에게 커피 한 잔 뽑아줘.”
윤숙희도 이 기묘한 커피 모임에 동참했다. 다들 어제오늘 사건도 많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였다.
이들이 커피 한 잔을 다 비워갈 때쯤 EV-1이 이진영에게 말했다.
– 감식 결과 나왔습니다.
이진영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섰고 김대현이 나른하게 물었다.
“팀장님, 뭔 감식이요?”
“김민지 사건. 그 집에서 개 목걸이를 발견했거든. 자세한 이야기는 전회차 줄거리를 참고하쎄요.”
김대현은 아직 김민지와 진소홍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몰랐고 윤숙희가 짧게 사정을 설명했다. 쿨쿨 잠이 들었던 임은혜도 윤숙희의 말을 듣고 번쩍 일어나서 이진영을 쳐다봤다.
“이브이, 뭐가 나왔어?”
– 예, 기묘하군요.
EV-1은 윤숙희 쪽을 바라봤다.
– 강간 사건 용의자의 모습이 죽은 개 목걸이 카메라 모듈에 찍혀 있었습니다.
윤숙희도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강간 피해자와 김민지는 같은 업소에 있었지? 그놈이 한 명만 스토킹한 게 아니었구나!”
–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개를 죽여서 트렁크에 넣은 범인도 이 용의자입니다.
EV-1은 개목걸이에 선명하게 찍인 남자의 얼굴을 모니터에 띄웠다.
“이브이, 이놈 신원은?”
– 경찰망과 대조해 주민등록증 사진을 검색해보고 있습니다. 신흥동 일대의 주민이라고 하셨으니 좀 더 범위를 좁히겠습니다.
그때 삐리리하고 이진영의 통신기로 영상전화가 걸렸다.
“예? 선배님? 거기 어디에요?”
– 어, 팀장. 나 신흥동. 개 봤다는 사람이 있어서.
“개요? 아 서장님 개?”
– 어, 한 명만 더 올래?
“아니, 나 참. 무슨 서장님 개를 잡는 데 지원까지 필요해요? 시 로봇이나 경찰 로봇더러 도와달라고 해요.”
– 팀장, 그 개가 사람 손만 탄대. 그래서 먹이를 주면 올지도 몰라.
이진영의 발치에서 마침 개가 헥헥 대며 인형을 물어왔다. 이진영은 다시 인형을 던지고 전상영에게 푸념을 하려고 했다.
그때.
– 전상영 경사님. 경사님 뒤에 있습니다.
– 이브이? 뭐가?
– 뒤에 있습니다. 잡으세요.
전상영은 개가 나타난 줄 알고 뒤를 돌아봤지만, 뒤에는 왠 남자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서에 있는 44팀 식구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쳤다.
“선배님! 뒤에요! 뒤에!”
“뒤에 강간 사건 스토커가 있어요!”
“그놈 잡아요오오오!”
마치 스포츠 중계를 보듯 임은혜, 윤숙희, 김대현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어이없게도 지금 EV-1이 쫓고 있던 강간 사건 스토커이자 김민지의 개를 죽인 놈이 전상영의 뒤에 있었다.
전상영은 영문도 모르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뚱뚱한 남자를 덮쳤다.
– 뭐, 뭐야! 당신 뭔데!
– 형사.
전상영은 좀 음침하고 마르게 생겼고 남자는 덩치가 꽤 있었다. 딱 봐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남자는 마침 들고 있던 우산으로 전상영을 찌르려고 했다.
전상영은 우산에 찍히기 일보 직전이었고 44팀 동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랄! 경찰 로봇을 보내!”
“스와트를 보내야지요! 저놈 저거 위험해요!”
그러나 다음 장면은 뚱뚱한 남자가 전상영에게 업어치기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전상영은 우산을 옆으로 툭 가볍게 비껴내고 남자의 멱살을 잡아 시원하게 바닥에 패대기쳤다.
남자는 첨벙하고 물웅덩이에 나뒹굴고 전상영은 기절한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꺾어 수갑을 채웠다.
–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스읍. 팀장, 그다음이 뭐였지?
이진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억세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날이었다.
* * *
전상영은 파트너 EOD 로봇 RR-04, 알알이의 도움을 받아 강간 사건의 피의자를 중부서로 끌고 왔다.
44팀 팀원들 중 제일 비리비리하게 보였던 전상영이 업어치기 한 판으로 피의자를 체포한 건 여러모로 화젯거리였다.
“어이구, 44팀 어제부터 뭔 날이야? 뭔 범인을 고구마 캐내듯 줄줄이 잡아 내내?”
“아니, 전상영 선배. 난 폭탄 전문인 줄 알았는데 아주 무도 경찰이었네?”
온갖 야유와 환호성 속에서 전상영은 스토커 범인을 44팀 책상으로 끌고 왔다. 전상영은 용의자를 의자에 앉히고 잠시 생각에 빠진 이진영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저 팀장.”
“아 깜짝이야. 선배, 질리지도 않으세요?”
“개는 어떡하지?”
이진영은 잠시 고민했다.
“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선배님은 저 녀석 체포경위서랑 윤숙희 조서 작성 도와주세요.”
전상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진영에게 말했다.
“저 팀장. 술은. 어제 니들끼리 마셨지?”
“아.”
어제 유인환이 학생회장을 체포하면서 왁자지껄하느라 전상영을 챙기는 걸 까먹었다. 전상영은 밤늦게까지 서장의 개를 찾아 헤맸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좋은 술을 대접해 드리지요. 용의자도 멋지게 체포하셨고.”
이진영은 김상현의 서랍에 쟁여둔 오래된 죽엽청주 한 병을 들어 보였다. 정상영은 음침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빵끗 웃었다.
전상영은 술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유도실력도 그렇고 도무지 정체가 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스토커 놈이 한순간에 잡히면서 또다시 진소홍 실종 및 김민지 살해에 대한 실마리가 생겼다.
이진영은 직접 취조실에 자료를 가지고 들어왔다. 굳이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데도 44팀 팀원들은 그를 따라 취조실에 들어왔다.
“벼, 변호사부터 불러줘요. 나, 난 내 변호사 없이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시든지.”
이진영은 취조실의 전화기를 끌어당겨 놈 앞에 갖다 놨다.
놈은 신흥동 거주 주민이었고 소위 말하는 라종인생에 기본소득자였다. 패러리걸 로봇을 끌고 다니며 비싼 돈이 드는 개인 변호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이브이, 어디 국선변호인이라도 알아봐 줄래?”
– 법이 개정되면서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 청구 전, 국선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필요적 변호사건이 아닙니다.
“아이고 어쩌나? 지금은 그냥 체포영장만 친 상탠데?”
이진영은 마침 법원에 있는 김상훈이 받은 영장으로 피의자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 말은 국선변호인이 있어도 되고오 없어도 되고오 그런 거야. 자 이명훈씨? 아이고 또 우리 종친회네. 우리나에 이씨가 많기는 존나게 많은 모양이야. 아무튼 당신은 지금 살인 용의자라는 것부터 알려주지.”
이명훈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김대현과 윤숙희가 놈의 어깨를 누르며 자리에 앉혔다.
“사, 살인이라니요? 저, 저는 사람은 죽이지 않았어요!”
“사람은? 너 그거 아냐? 연쇄살인마들은 말이야?”
– 개나 고양이를 죽이면서 살인 연습을 하고 그다음에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명훈 피의자는 김민지의 강아지를 해쳤습니다. 그리고 업소 그레첸의 고용 종업원들을 적어도 2인 이상 스토킹한 흔적이 있습니다. 연쇄살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래, 개나 고양이에서 시작된 살해 행각이 발전해서 김민지도 죽였다아? 어때?”
이명훈은 깜짝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 민지가 죽었어요?”
“어.”
이진영은 일부러 부패한 김민지의 사진을 이명훈에게 보여줬다.
3달 동안 물에 팅팅 불어 끔찍하게 변한 김민지의 사진을 보고 이명훈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윤숙희는 이명훈의 머리카락을 쥐고 거의 책상에 머리를 닿을 정도로 머리를 짓눌렀다.
그녀는 머리를 숙인 이명훈의 귀에 속삭였다.
“똑바로 봐. 네가 스토킹한 여자가 죽었어.”
“나, 나는 몰라요. 그, 그냥 그 방에 드나들긴 했는데 하, 한 번도 손을 대진 않았어요.”
“웃기시네. 넌 다이아몬드를 어제 강간했잖아?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어. 그것만으로도 강간상해, 아니지 강간살해 미수로 집어넣을 수 있어.”
윤숙희는 서울시경 성범죄 대책반 출신이고 파렴치한 강간범들을 여러 번 상대했었다.
“이미 네 DNA와 다이아몬드의 몸에 남겨진 유류흔적을 대조했다. 바른대로 말해.”
이명훈은 김민지의 사진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이 년들이 얼마나 나쁜 년들인데요? 내가 이 년들에게 돈을 얼마나 썼는데? 대출까지 받아 가면서 쪼들렸는데 돈 없어서 그냥 한 번 대달라고 하니까…….”
쾅!
윤숙희는 이명훈의 머리를 책상에 박아 버렸다.
“말조심해. 여기 경찰서다.”
윤숙희는 성범죄자에게는 정말 가차 없었다.
“김민지를 어떻게 했어? 네 뜻대로 안 되니까 목 졸라 죽이고 인천 앞바다에 버린 거 아니야? 지금 네 차량 기록도 검색하고 있다. 여기서 거짓말하면 인간 판사가 널 좋게 보지는 않을걸? 네 사건은 합의부 사건이니까.”
특별 단독 사건 이후, 당분간 형사사건에서 인공지능이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합의부의 재판장은 인간이었고 아무리 법관이 중립적이라고 해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강간범에게는 감정적으로 불리했다.
“저, 전 정말 몰라요. 다이아를 따먹은 건 사실인데 기, 김민지는 아직 손도 안 댔어요.”
“김민지는? 아직?”
이진영은 이명훈의 말투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너 다이아만 강간한 게 아니구나?”
“…….”
윤숙희가 놈의 얼굴을 들자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현아, 임은혜, 업소 그레첸 전수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먼저 업소로 출발해. 명단 안 주면 종업원 스토킹한 놈이 있고 그중 한 명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말해. 그럼 줄 거야.”
그러나 두 사람은 밍기적대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