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39
제139화
이진영은 왔던 길로 다시 부천역으로 되돌아갔다. 부천역은 탄환라인이 지나가는 곳이었고 여기서 봉천동까지는 20분도 안 걸린다.
그는 다시 우주선처럼 새하얀 인테리어의 환승통로로 걸어가 튜브처럼 생긴 탄환라인 승강장에 다다랐다.
저녁이 되자 탄환라인과 1호선을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진영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진영은 잠시 의자에 앉아 수사수첩을 펼쳤다.
오늘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일이 있었던 바람에 천하의 이진영도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수첩에 적힌 7개의 사건을 노려봤다.
1. 진소홍 내사사건.
2. 송도 폭탄테러.
3. 서장님 개 수색.
4. 월미도 관광지 관광객 피살.
5. 그레첸 다이아 박현숙 강간사건.
6. 차량 수동운전 상해사건.
7. 해안 변사체-김민지 피살사건.
어제부터 44팀에 배당된 사건은 자그마치 7개였고, 23팀 팀장이 가져간 사건까지 합치면 9개, 보고서처리나 자질구레한 일까지 합치면 더 많았다.
이진영이 수첩을 빤히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이진영의 옆에 앉았다.
“우산 예쁘네요.”
이진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바라봤다.
여자는 흔히 볼 수 있는 회사원 차림에 별 특색이 없게 생긴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예쁘냐고 하면 예쁘지는 않지만 못 생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안경을 쓴 평범한 인상이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이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 예. 딸 우산이랑 바꿔서 가지고 나오는 바람에…….”
“하하, 아침에 정신없으면 그럴 수도 있죠. 밖에 비 많이 오나 봐요?”
이진영에게 젊은 여자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까 초밥집 사장도 그렇고 20대 젊은 여자들에게 중년 남자들은 거의 외계인이나 다를 바 없는 생명체였다.
“걱정 마요. 잡상인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그는 뚱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럼 왜 말을 거신 거죠?”
“까칠하시네요. 그냥 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려고요.”
이진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저 아세요?”
“예, 아주 잘 알고 있죠. 이진영 팀장님.”
이진영은 반사적으로 점퍼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에이, 누가 중부서 형사 아니랄까 봐 또 그러신다. 여기서 총을 쐈다간 경찰 24시에 나올걸요?”
“아이고, 경찰 24시 때문에 업무수행에 아주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사인해달라는 사람도 많아요.”
“저도 사인이나 받을까요?”
“뭐…… 얼마든지 해드리죠. 단.”
“단?”
“그쪽이 왜 왔는지만 알려주신다면.”
여자는 자세를 숙이며 씩 웃었다.
“역시 감이 좋으시네요.”
“감으로 살아왔죠. 한평생. 그쪽이죠? 전에 병원에서 내가 신희정 요원 개인 전화로 전화했을 때 대신 받은 분이요. 그때 뭐라더라? 차석님이 바쁘다고 하셨나?”
여자는 정말 놀란 듯 ‘아아’하고 입을 벌렸다.
“와, 그게 언젯적 일인데? 그리고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다니 놀라운 일이네요.”
“아뇨 기억 못 했어요. 댁이 지금 말하기 전까지.”
여자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여자는 한순간 이진영의 유도심문에 제대로 당했다.
“와 똑똑하시네. 차석님에게 들은 대로야. 어떻게 눈치챈 거죠? 넘겨짚으려면 심증은 있어야 할 텐데?”
“그야, 숱하게 들었거든요. 댁의 차석님한테. 정보국 필드 에이전트들은 한 번 보면 금방 잊어버리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대단하신데?”
여자는 양손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이진영은 바짝 긴장했다.
“아무튼 저 퇴근길이거든요? 그리고 오늘 비 오는데 구르고 난리라 빡세서 그런데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정보국이 절 왜 찾아온 거죠?”
“아아, 빡세시구나? 그죠? 그러니 애먼 곳 파고들 생각하지 마시라고 말해주려고요.”
“애먼 곳이라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야지? 내가 뭐 초능력잔가?”
“에이, 아시잖아요? 우리 회사 업무를 다 말씀드릴 수 없는 거.”
“혹시 신희정 요원 때문입니까? 그거라면 저는 그 사람을 본 지 오래됐는데요.”
“에이, 또 그짓말 하신다. 보셨잖아요? 몇 달 전에, 그…… 의료보험 사건 후에 말이죠.”
신희정 때문은 아니다.
이진영은 더더욱 눈을 가늘게 뜨고 평범하게 생긴 여자를 쳐다봤다. 어쩌면 이 여자는 20대가 아닐 수도 있고 심지어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
“저는 그저 업무에 충실하시라고 말씀드리러 온 것뿐이에요.”
“아니 뭐, 피차 나라 녹을 먹는 사람들끼리 업무에 충실해야지요? 안 그래요? 근데 셜록 홈즈 보셨어요?”
여자는 그가 뜬금없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이야기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노우드의 건축업자라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천하의 명탐정 셜록 홈즈도 이 사건을 해결하느라 골치가 아팠죠. 근데 뜻밖에도 범인은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후후 그게 뭐죠?”
“어제까지만 해도 벽에 없었던 피 묻은 지문이 나타난 거예요. 셜록 홈즈가 샅샅이 집을 뒤졌을 때도 없었던 지문이.”
점점 여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의 셜록 홈즈는 그게 범인이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함정이라는 걸 깨닫고 범인을 밝혀내죠. 짝짝짝.”
이진영은 입으로 박수 소리를 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속담으로 뭘까요? 그래요 긁어 부스럼이에요. 지금 여기서 절 협박한 거 자체가 피 묻은 지문이라는 거 몰라요?”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못 알아들으시네.”
“차석님한테 이런 놈이라는 건 못 들으셨나 보네? 뭔지나 압시다. 내가 파고 있는 사건이. 정확히 어떤 거죠? 어떤 사건이길래 정보국에서까지 이렇게 행차하신 겁니까? 김민지? 박현숙 강간사건은 아닐 테고. 수동운전으로 깔아뭉갠 사건?”
이진영은 부천역이라 적힌 탄환라인 간판을 노려봤다. 여자는 부천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보국 여자는 이진영에게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지금까지의 웃음과 달리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당신 그러다 죽어.”
“죽을 때 죽더라도 궁금한 건 영 못 참는 성격이라.”
“후후후, 미국 속담에 고양이는 호기심 때문에 뒈진다고 그랬지.”
“충고 캄샤합니다. 책상 위에 붙여놓고 늘 주의하죠.”
여자는 다시 생글생글 미소를 띠고 막 들어오는 탄환라인 열차를 가리켰다.
“자, 어서 퇴근하시죠. 한승아 양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 아, 이유진 양이었나요?”
그 순간, 능글능글하던 이진영의 기세가 칼처럼 변했다.
“애들을 건드리면 니들도 죽는다.”
“랜드쉽을 터뜨린 양반이 하는 말이라 그냥 농담처럼 들리진 않네요. 아무튼 전 분명 전달했습니다.”
이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탄환라인 열차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여자의 신경을 긁어놓으려고 했지만, 여자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신희정도 그렇고 지들이 닌자야 뭐야.”
* * *
다음날도 격무의 연속이었다. 44팀 팀원들 책상에는 종이컵이 켜켜이 쌓여있고 책상 옆에는 배달시켜 먹은 그릇과 치킨 박스가 놓여 있었다.
“김대현! 영종대교에서 자살 시도다! 네가 가서 협상해! 임은혜! 시경 마스코트 업무 요청이다! 김상현, 영장 받아오고! 이거 스토커 그 이명훈이 영장! 아니, 그리고 전상영 선배 이 양반은 어디 갔어?”
“개요! 개 찾으러 가신댔어요!”
임은혜가 꾸역꾸역 진돗개 마스코트 인형을 입으면서 앙칼지게 말했다.
“아니, 뭔 개야! 개 같은……. 하, 얘 이거 진짜 어쩌냐?”
벌써 3일 차 중부서의 신세를 지고 있는 포메라니안은 이진영이 소리를 지르는 것에 맞춰 앙앙 귀엽게 짖었다. 이진영은 장난감 인형을 휙 집어 던지고 수사원들을 배치했다.
“윤숙희, 뭐야 윤숙희 어디 갔어?”
“강간사건 피해자 조사요! 어제 그레첸 전수조사했을 때 세 명이 더 나왔어요! 이건 그 영장신청서고요! 법원 갔다 올게요!”
김상현은 영장신청서 여러 장을 흔들면서 말했다. 가는 김에 다른 팀의 영장까지 발부받느라 김상현은 오늘도 이래저래 바빴다.
“유인환, 너는 어디 가니?”
“예, 이민호 국장님이 불렀습니다. 서울대 바리케이드 넘은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돌입 경로 짠다고 오랬어요!”
“아니, 그 양반은 바빠 죽겠는데! 가능한 한 빨리 와. 관광객 피살 건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
“예! 다녀올게요!”
가뜩이나 시장통 같은 강력전담부 사무실이 더더욱 시끄러웠다. 수사 배분이 끝난 뒤 44팀 간판 아래 남겨진 건 이진영뿐이었다. 이진영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팀원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그나마 이진영은 어제 퇴근해서 집에서 눈이나 붙였지, 다른 팀원들은 여기서 밤을 새운 사람도 많았다.
그레첸의 종업원 전수조사를 하자 이명훈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는 앙심을 품고 윤락녀 여럿의 집으로 쫓아가 강간했다.
어제 전상영이 업어치기 한 판으로 잡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놈을 그냥 내버려 뒀다면 연쇄살인 등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아침 TV 프로그램에서는 이명훈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윤락녀를 노린 파렴치한 범죄행각은 충분히 뉴스에서 좋아하는 주제였다.
그 뒤는 정치권 소식이었다. 여전히 민족민생당과 안보문명당은 난민 문제로 설전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이세화였다.
“워어어! 이세화다!”
“완전 이쁘시다아아!”
중부서 형사들은 동료 경관이었던 이세화를 아낌없이 응원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부서 경찰관들의 정치 성향은 백이면 백 민족민생당이었다.
아무리 로봇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난민들과 민원문제로 부딪치고 나면 속 시원한 소리를 하는 민민당 장동천과 일당들을 응원하게 된다.
이진영은 한동안 TV 토론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각 뿔테안경에 넙데데하게 생긴 형사부장이 이진영의 앞에 서 있었다.
“어, 부장님.”
“어, 이진영이 수고한다. 서장님 개는 어떻게 됐냐?”
이진영은 말없이 전상영의 빈자리를 쳐다봤다.
“열심히 수색은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가지고는 안 돼애. 서장님 손자가 개가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래.”
“아니, 저야말로 울고불고 난리 피우고 싶은데요? 어제부터 배당된 사건이 몇 개에요?”
“야, 그건 나도 미안하다. 근데 나도 죽갔어. 뭐 이리 사건이 생기냐 글쎄에?”
이진영은 너구리처럼 의뭉을 떠는 형사부장을 보며 더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더 이상 사건 떠넘기지 마세요. 아니면 타 팀에서 지원 명령을 내주시던가? 이게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랍니까?”
“어쭈, 이진영이 하극상이야? 그리고 사람이 처리할 수 없으면 로봇이랑 같이하면 되지? 그래서 비싼 행정 로봇 리스해서 쓰는 거 아니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진영은 어제 만난 정보국 요원의 협박을 떠올리며 형사부장을 빤히 쳐다봤다.
“서장님께 직보고하겠습니다.”
이진영은 미리 인쇄한 파일을 들어 보였고 직보고라는 말에 형사부장은 눈썹을 마구 꿈틀거렸다.
“그게 뭔데?”
“웡꺼의 요리사의 딸의 아이씨, 진짜 김수한무가 되었네. 진소홍씨 실종사건 정식으로 수사 착수하겠습니다.”
형사부장은 진소홍이나 웡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웡꺼의 요리사의…… 뭐?”
“하이고. 아무튼 여자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시체 나온 거야?”
“아뇨, 그냥 현 단계에서는 실종입니다.”
“야, 그럼 그건 수사 우선순위가 아니잖아? 어디서 시체가 나왔다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