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4
제14화
도은주는 자세한 사건 경과가 담긴 동영상과 개요를 훑어봤다.
“맙소사.”
“결과에 따라 두 회사 중 하나는 경찰 납품이 끊길지도 모릅니다.”
여유만만했던 도은주의 예쁜 눈썹이 구겨졌다.
“이 인공지능은 저희 팀에서 다루던 거예요.
“그럼 잘 아시겠군요. 문제가 있었나요?”
“아뇨. 기본 목적에 충실했고 분명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뒀는데…….”
도은주는 이마를 감싸 쥐고 화를 삭였다.
“이건 하드웨어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정비가 제대로 안 되었다면 전투 중에 고장 나서 허리가 팔이 아닌 목을 휘감을 수도 있죠.”
그녀는 직접 포박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연했다. 포박기는 Y자형으로 된 집게였고 피의자의 손발을 집게가 누르면 집게 안쪽에서 피육하고 포박줄이 튀어나와 피의자를 포박한다.
“그건 나도 잘 알아요. 현장에 있으니까.”
“그러면 경위님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여기 보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로켓까지 쐈네요. 고장이 났을 수도 있어요.”
“묘한 데서 배려를 하시는군요.”
EV-1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도은주는 뜨악한 표정으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경찰 정비과 탓은 아니라는 거니까.”
“흐음……. 뭐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 경우는 현장에서 당했을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뭐 정비팀 쪽의 보고서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말이죠.”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수첩을 덮었다.
“형사물 클리셰대로라면 이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다는 대목이겠군요?”
“예, 형사물 클리셰대로라면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도은주는 그 말에 활짝 웃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진영은 악수를 거부했다.
“아, 악수는 제 손이 성치 못해서 이해해 주시길. 부분 의수라 가끔 고장 나거든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 미안해요.”
이진영은 악수 대신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EV-1과 함께 접견실을 나가려고 했다.
도은주는 이진영의 용무늬 잠바를 보면서 씩 웃으며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가 다시 등을 돌리는 걸 바라봤다.
이진영은 처음 건방진 인상과 달리 정중하게 인사하고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건들거리며 나가는 이진영을 보며 도은주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흐음, 클리셰라면 ‘지금 마침 시간이 점심이니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이야기하시죠?’라는 말이 나올 타이밍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경위님, 식사 신청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
– 도은주 주임말입니다. 지금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이진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다가 EV-1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깡통, 너 무슨 중매 기능 그런 것도 있냐? 내 참 별소리를 다 듣는군. 아무튼 어떻게 생각해?”
– 뭘 말입니까? 전 여자를 평가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누가 그딴 거 평가하래? 오늘 낮, 진압 로봇 이야기 말이야.”
– 그건 도은주 주임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전투 중에 일어난 기계 고장일 수도 있고 우연이 겹쳤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범위와 비슷하다라. 네 인식범위는 어느 정도지? 군의 ECM재머 장비를 뚫고 도청한 건 봤고…….”
– 시각센서는 보조모듈의 도움을 받을 경우 무제한입니다.;
“무제한이라고? 아, 넌 군용이었지. 군용 정보시스템에 연결되면 소대나 대대 인공지능과 소통해야 하니까…….”
– 하지만 시각을 포함한 지각센서도 도은주 주임의 말대로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연산능력이나 양자두뇌의 스펙에 영향을 받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로봇도 엄밀히 따지면 컴퓨터였다. 컴퓨터가 아무리 당대에 가장 좋은 부품을 꽂아 넣는다고 해도 무한한 연산 능력을 가지지 않듯, 양자두뇌도 결국은 하드웨어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호리코시, 태성……. 왜 이 두 회사의 협업품만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
– 관련 기사나 정보를 검색했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습니다.
“깡통아. 두 회사 공통적인 사례 말고 따로따로 각 회사의 오류사례만 검색해봐.”
EV-1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 총 172건입니다. 그중 군경 기밀자료도 있습니다.
“좀 많군. 알았어, 좀 있다 인쇄 부탁해.”
이진영은 엘리베이터를 나와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EV-1을 불러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사건화되지 않았지만 한 건 더 있었군.”
– 사건화되지 않았다니요?
“한 주 전 유명구 사건. 깡통아. 광역 특경 버전 진압로봇의 스펙을 검색해봐. 내 추측이 맞다면…….
– 호리코시, 태성이군요.
EV-1은 이진영처럼 고개를 갸웃햇다.
– 경위님 이상하군요.
“그래, 호리코시, 태성. 우리가 개입한 사건만 로봇 살인사건이 되지 않았어. 이건 명백히 우연이 아니야.”
– 경위님 말씀은 누가 의도했다는 겁니까?
“누군가가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는데 의도적으로 로봇 살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몰라.”
– 의도적으로요?
“백헌강은 분명 뒷배가 있다고 그랬잖아. G&C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면 엄청난 거물일 테고. 난 그냥 놈이 빽이 있다고 뻐긴 건 줄 알았는데 만약 이 로봇 살인들이 신흥동 사건까지 연관이 있다면?”
EV-1은 잠시 딴 곳을 쳐다보다 대답했다.
– 그건 너무 비약적입니다.
“하지만 의심해 볼 여지는 있지. 하고 많은 로봇들 중 하필 호리코시랑 태성 제품들만 문제를 일으키다니 말이야.”
EV-1은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주변에도 로봇들이 많았지만 로봇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딥러닝 회사와 프레임이 같은 로봇만이, 그것도 각각 다른 용도와 알고리즘을 가진 로봇이 살인사건을 일으켰다? 이건 굉장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이진영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태성 AI 로비에서 스쳐 지나가는 로봇들을 바라봤다. 로봇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잘 생겼고 마치 영화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감정이라……. 깡통아 영화배우 로봇들은 감정을 아는 걸까?”
– 글쎄요. 그들은 알고리즘대로 움직일 뿐 감정은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이제 어지간한 영화에 나오는 건 다 인공지능 배우들이었다. 액션, 멜로 할 것 없이 연기에 특화된 인공지능은 스크립트를 쓴 인공지능의 의도에 맞춰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한다.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긴데다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액션이나 정사 장면까지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 배우들이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네 말대로 아직 비약적인 논리이긴 하다만 로봇이 사고를 쳐서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을까?”
EV-1이 곧바로 검색을 하고 말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종이 신문을 보여주며 끼어들었다.
“많지요. 일단 우리 야당 국회의원님들께서는 호리코시에서 로비 받은 여당 아저씨들을 맹공격하고 계시네요. 반면 제1야당은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에 호의적이라 지지율이 급강하하고 있습니다. 또 반면 반기계주의자 당인 인간중심당 의원 나으리들은 인공지능 정책을 백지화하자고 난리굿을 피우고 있고요.”
신희정. NIA 요원이 오늘 오후 자 종이신문을 들고 서 있었다.
“점심 아직이죠? 같이 식사나 하시죠. 경위님도 저랑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 것 같은데요?”
이진영은 신희정의 선글라스에 비친 태성 AI의 로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일련의 로봇 살인이 의도된 것이다?
이 정보부 요원은 그 사실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깡통아, 차라리 미인이랑 먹을 걸 그랬나”
“예? 미인이라니요?”
이진영은 EV-1에게 살짝 윙크를 하고는 먼저 빌딩을 나가려고 했다.
“경위님, 밑으로 내려가시죠.”
“밑으로?”
“바닥강남 안 가보셨죠?”
신희정은 손가락으로 발밑을 가리켰다.
태성 AI는 선릉역 근처에 있었다. 명색이 전 세계 딥러닝 시장의 5분 1을 점유하는 회사기도 하고 근처에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관련된 회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하얀 빌딩의 숲.
21세기 즈음에도 강남은 고층빌딩이 많았지만 지금 강남은 그 자체가 거대한 공중도시였다.
과거에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롯데 타워가 이제는 강남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었고 그보다 높은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강남을 멀리서 보면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은색의 벽처럼 보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강남의 1층은 빌딩의 높이 때문에 거의 볕이 들지 않았고 월미도의 굴다리처럼 24시간 밤이 계속된다. 서울 모노레일도 빌딩숲의 중간에 역을 만들었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강남의 지면으로는 안 내려온다.
영원한 밤이 계속되는 곳, 이곳이 바로 소위 바닥강남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깜빡거리고 푸른 방수포로 덮은 포장마차도 한창 영업 중이었다. 분명 낮인데도 바닥강남에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로봇 콜걸을 사고 수상쩍은 물건을 거래한다.
웩웩 토하는 여자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이진영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 먹자고 여기까지 내려와야 하는 거요?”
“이곳에 죽여주게 잘하는 집이 있거든요. 만두도 로봇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빚어요.”
신희정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씩 웃었다.
“그것보다 아까 그 이야기나 계속합시다. 그쪽 회사도 일련의 로봇 살인이 연관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아직은 저랑 몇 명만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요. 태성 호리코시만 문제가 터지는 데 이상하잖아요?”
신희정은 동의를 구하는 듯 이진영을 쳐다봤지만 그는 뚱한 표정만 지었다.
“아무튼 정치계고 경제계고 난리가 났습니다. 주식 떨어진 거 보셨나요?”
“주식은 안 해서.”
“의외군요. 형사들은 경마랑 주식 둘 중 하나는 꼭 한다고 들었는데?”
“이상한 형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요?”
신희정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고 씩 웃었다.
“아무튼 주식이 개판이 났어요. 태성, 호리코시의 찌라시가 돌고 주식 투자한 개미들은 한강 가고 뭐 그런 거죠.”
예정된 수순이었다. 청소로봇이 아이를 쳤을 때 한 번 출렁거렸고, ‘결함’을 인정하는 듯한 판결이 나왔으니 인공지능, 로봇 관련주가 큰 타격을 받는 게 당연했다.
“신희정 요원, 설마 주식 관련 작전 세력입니까?”
“요원이라니까 좀 그렇네. 에이전트 신은 멋있는데. 나이도 동갑인데 그냥 친구 먹죠?”
“신희정 요원, 그쪽 회사는 주식 뒷배경을 조사한 거 아니요?”
“거 딱딱하시구만.”
신희정은 잘생긴 얼굴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주식 쪽은 깨끗해요. 금감원 전임 애들이랑 돈 흐름 쫓아봤는데 딱히 노린 흔적은 없어요. 아, 여기예요.”
신희정은 바닥강남에서도 으슥한 곳의 포장마차집을 가리켰다. ‘파주집’이라는 퍼런 네온사인과 주황색 방수포를 덮은 포장마차는 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사실 월미도의 무허가 가게들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이진영은 포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술에 뻗은 취객 한 명과 통통 파를 써는 할머니가 한 명 있을 뿐이다.
할머니는 EV-1을 보고 곤란한 듯 수화로 말했다. 이진영은 수화를 모르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깡통 넌 밖에 서 있어.”
이진영은 옛날 냄새가 가득한 포장마차 간이의자에 앉았다. 의자도 각목으로 만들어 허름했고 매대도 리어카를 개조한 것이었다.
“바닥강남은 전파가 지랄 맞게 안 터져서 도청되기도 힘들고 미행이 있으면 딱 티가 나고, 뭐 그래서 애용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