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40
제140화
“같이 다니던 사람이 타살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범행의 정황이 충분해서 수사 착수할 수 있잖아요?”
“야, 지금 쫓고 있는 사건이 한두 개야?”
“예, 마침 그 사건들과 접점이 생겼습니다. 내사 이첩한다고 보고드리려고요.”
이진영은 스토커 사건과 김민지 사건 그리고 진소홍 실종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그러면 진소홍인지 뭔지도 죽었다고?”
“그건 아직 모르지만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민지 사건을 조사하면서 같이 조사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인데? 이거 따이완 경찰하고 공조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귀찮은데?”
진소홍의 부친, 진일수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진소홍의 실종에 관해서 외국인 그리고 굴다리라는 특성 때문에 그 어떤 경찰도 적극적으로 수사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외국인도 사람이죠. 이세화 선배 말마따나.”
형사부장은 더 이상 이진영을 막지 못했다.
이진영은 결제파일을 들고 중부경찰서 서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인체 스킨이 씌워진 휴머노이드 비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장님께서는 자리에 안 계십니다.”
“바쁘시긴 뭘. 아까 골프채 갖고 들어가는 거 다 봤는데.”
이진영은 로봇을 밀어붙이고 서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말로 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장니임. 설마 책상 밑으로 숨으신 건 아니겠지요?”
이진영은 결재서류를 들고 막무가내로 서장 책상으로 다가갔지만, 서장의 모습은 없었다.
– 서장님은 수사기관 관계회의 및 학회 출장을 가셨습니다.
“원래 오늘 일정에 있는 거였나?”
– 예, 그래서 어제 44팀에게 보고서를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서장은 형사학회에 논문을 여러 개 낸 학구파였다. 어제 김대현이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와 논문 초고가 책상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 이진영 팀장님, 서장실에서 더 이상 억지를 부리시면 저 역시 서장님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다아.”
이진영은 한숨을 쉬면서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고 그의 옆에는 목걸이 방울을 딸랑거리며 포메라니안이 쫓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계속 앞으로 쿵쿵 찢는 개를 들고 이진영은 잔소리를 했다.
“으으, 너 목욕 좀 해야겠다.”
이진영이 개를 데리고 내려왔을 때도 44팀 팀원들은 제각각 다른 수사나 지원으로 자리에 없었다. 이진영은 임은혜의 의자에 앉아서 매트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이브이, 다시 너랑 나뿐이다.”
– 후후, 설마 굴다리에 돌입하자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다들 바빠서 가용인력은 너뿐이라는 거야.”
– 다시 한량 경위가 되신 것 같습니다?
“어, 아니 한량 경위가 아니라 이러다가 까딱 잘못하면 한량으로 백수 신세, 아니 어쩌면 진짜로 이효진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지.”
내사 이첩을 하려고 해도 서장의 결재가 최종적인 결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수사 착수 권한은 경위 이상급 팀장에게 있지만 그걸 승인하는 건 해당 관서의 장, 즉 서장이었다.
김민지 사건에 진소홍 실종사건을 병합하는 내사 이첩의 경우도 서장의 결재가 필요했다.
“부장님 말씀으로 봐서는 행정 인공지능에 접수해도 반려될 가능성이 높고……. 이브이, 내사사건을 넘어 수사에 착수하게 하려면 뭐가 있지?”
– 강력부장님 말씀 대롭니다. 진소홍의 변사체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 외의 방법은?”
– 긴급체포 후 검사의 동의를 받는다면 서장의 결재 없이 가능합니다.
“결국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거군. 근데 이브이 넌 어떻게 생각해? 김민지를 죽인 범인이 진소홍 역시 죽였을까?”
–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로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망한 김민지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그것이 진소홍의 실종과는 무관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창티엔에서 그냥 밥만 먹고 그냥 헤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하긴 사망한 피해자와 같이 있었다고 다 죽는 건 아니기도 하고.”
김민지는 사체로 발견되었지만 진소홍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배를 띄워서 주변을 전부 검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티파니 쪽에서는 뭐래? 반지 사 간 사람?”
– 고객 정보를 알고 싶으면 영장을 가지고 오랍니다.
이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영장이 나오려면 적어도 수사에는 착수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입건도 안 된 범죄에 인공지능 단독판사가 영장을 내어줄 리 없다.
이진영은 반지를 꺼내서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EV-1에게 공유했다.
– 그럼 팀장님은 그 반지를 산 사람이 진소홍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어, 그 여자는 일식 요리사에게 큰돈을 뜯었다고 했어. 그런 사람이 이런 비싼 반지를 중학교 첫사랑 연애편지도 아니고 소중히 간직할 리 없잖아? 이건 뭔가를 위한 포석이었어.”
– 이상하군요. 여자 입장에서 반지를 준비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일 텐데요?
“매달려야 하는 입장이었던 거지. 다이아의 말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호구. 반대로 말하면 여자가 그 정도로 나오지 않으면 코웃음 치는 누군가야.”
–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요? 저는 인간의 미학은 잘 모르긴 합니다만. 진소홍은, 그녀의 남성 편력을 보면 단순히 윤락 업소의 고급접대부일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어장이지. 어장관리라고 그래. 같이 사귈 의도도 없으면서 돈이나 편의를 뜯어내는 거. 그래 네 말대로 진소홍은 굉장히 예쁘고 그녀 정도라면 그렇게 자존심을 스스로 깎아내리며 남자를 만날 이유가 없어. 아마 얼굴만 보고도 헤벌쭉하며 남자들이 줄을 설 테니까.”
이진영은 두 개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이브이, 이건 내 감이지만 진소홍 사건이야말로 가장 큰 건이야. 여기에 수사 인력이든 시간이든 집중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태클을 거는군.”
정보국 요원은 하필이면 진소홍과 연관된 식당 근처에서 이진영을 협박했다.
이진영의 말대로, 어제 정보국 측의 협박은 오히려 진소홍 사건에 뭔가 구린 것이 있다는 그의 심증을 더 굳게 만들었다.
EV-1은 조용히 이진영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 만능 로봇은 명령만 떨어지면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단서를 얻어낼 것이다.
이진영은 조용히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종이컵의 산 위에 올려놓았다. 일요일부터 온갖 자질구레한 격무에 시달리는 44팀 팀원들은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단 수사에 착수한 김민지 사건부터 조사해보는 게 낫겠군. 아, 맞다. 그 사진 정확히 몇 월 며칠이었지?”
– 1월 11일입니다.
이진영은 난관에 부딪히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1월 11일. 이브이, 그때 항만청의 인천항 기록을 분석할 수 있을까?”
– 항만청이요? 왜 갑자기 항만청 기록을 열람하시려는 겁니까?
이진영은 일어서서 설명했다.
“잘 생각해봐. 넌 이럴 때는 눈치가 둔하다니까? 김민지의 시신은 다리에 시멘트 가방을 하고 있었지.”
– 아, 바닷속에 시체를 유기하려면 배 위에서 던지는 수밖에 없군요.
“그래, 뭘 이용하든 해안에서 시체를 던지게 되면?”
– 해군 초계정이나 해안도로 감시 인공지능에 들키겠지요. 해군의 소나모듈은 굉장히 정교하니까요. 그리고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사진의 마지막 기록인 1월 11일 오후부터 사망추정시각까지는 간조 시기입니다.
“그래 썰물 때면 뻘밭이 있기 때문에 배 없이 먼 바다에 나가서 시체를 유기하는 건 불가능해.”
– 하지만 불법 어선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어마어마할 겁니다.
“흐흐, 마침 너랑 나는 할 게 없잖냐? 퍼즐 풀 듯 풀어보자고.”
EV-1은 그 즉시 수많은 1월 11일 그날의 수많은 배의 항적들을 기록했다.
상선, 어선, 여객선 수많은 종류의 배들이 인천 앞바다를 오가고 있었고 배들의 항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진영이 두 잔째의 커피를 가져왔을 때도, EV-1은 44팀의 행정처리를 도우면서 항만청의 기록과 해류로 시체를 투척했을 법한 지점 근처를 샅샅이 훑었다.
바닷속에 뭔가를 집어 던졌을 때, 그 물건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저지형은 복잡하고 심층해류의 장난으로 시체가 정확히 어디서 던져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EV-1은 인천의 대학 연구선까지 연결해서 해류의 흐름을 읽고 시체가 투척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점을 좁혀나갔다.
투척 지점이 좁혀지자 배들 역시 더 추려낼 수 있었다. 1월 11일은 마침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라 배들이 많이 오가지 않았고 어선들도 일찍 조업을 마치고 항구로 되돌아왔다.
이진영은 해당 해역을 지나는 항적들, 그중 하나를 눈으로 좇았다.
그 항적은 옛 인천 여객 터미널에서 시작되어 다시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 항적의 움직임은 굉장히 이상했다. 인천항을 빠져나올 때는 쏜살같이 빠져나왔다가 항구로 돌아올 때는 고깃배처럼 느릿느릿하게 돌아왔다.
그 항적은 EV-1이 꼽은 사체 예상 투하지점 5킬로미터 반경을 지나고 있었다.
“이거다.”
– 사설 구급선이군요? 고려 이머전시?
“그래, 나머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상선이나 중동 쪽의 유조선이야. 소형이고 부두가 없는 배에도 배를 댈만한 배는 이것밖에 없어. 이 배가 시체를 유기한 거였어.”
이진영은 사설 구급선의 1월 11일의 항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 예? 하지만 제가 범인이라면 웡꺼의 밀수선이나 불법 어선을 통해 시체를 유기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 방법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를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 피해자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난민지구 아닙니까?
“웡꺼의 반잠수정이나 밀수선은 결코 해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인천 해안가는 해군과 각종 인공지능 때문에 처리하기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웡꺼라면 뭐하러 바다에 버리겠어? 피해자의 장기는 멀쩡했어.”
웡꺼의 사업 중에 하나는 장기매매였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이식기술이 발달해서 이제는 로봇 인큐베이터로 각 장기를 보관하고 있다가 슈퍼마켓의 고기처럼 파는 것도 가능했다.
만약 피해자 김민지가 웡꺼의 영역에서 당했다면 시체를 바다에 버리긴커녕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당했을 것이다.
“여기 이거 봐봐. 낮부터 해군의 초계정이 이곳을 여러 번 지나갔어. 불법 어선들은 단속을 피해 진작에 다 도망갔거든? 거기에 그날은 비 오는 날이라 시정도 별로 좋지 못했잖아? 웡꺼의 배나 불법어선들이 아니야. 그리고 고깃배가 축 늘어진 시체를 버리는 걸 해안 감시 인공지능이 그냥 지켜보고 있을까?”
– 아, 그렇군요. 사설 구급선이라면…….
“시체 같은 걸 실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냥 응급환자가 타나보다 하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 이걸 처음 팠어야 해. 어떻게 시체를 바다에 버렸을까?”
감시체계가 없었던 옛날에야 바다에 시체를 유기하는 건 간편한 처리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에도 눈이 많은 관계로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군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사설 구급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