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41
제141화
이진영이 고려 이머전시의 항적을 손으로 짚은 건 바로 그 속도 때문이었다.
“이브이, 출발해서 여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속도잖아? 이건 뭔 상황일까?”
– 응급 신고를 받은 거군요.
“그래, 어딘가에 응급환자가 있다고 신고를 받은 거야. 그래서 구축함이고 뭐고 들이받을 기세로 나왔지. 근데 여긴 어때? 이건 일반적인 사설 구급선의 움직임이 아니야.”
– 아, 그렇군요. 환자를 실었다면 항구를 통해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겠지요.
“그렇지. 환자가 탔다면 왔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항구로 되돌아갔을 거야. 근데 이 배는 어때?”
항적은 갈피를 못 잡는 난파선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늦장을 부렸다. 안에 환자가 타 있다면 급행료는커녕 내려달라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설 구급선이 아니라 그냥 고깃배나 어선이었다면 이진영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V-1은 고려 이머전시의 기록을 훑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 이상하군요. 고려 이머전시는 1월 15일에 폐업한 걸로 나옵니다.
“한층 더 수상쩍군. 폐업 이유는 뭐래?”
– 불법무기소지입니다.
이진영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
“월미도 사설 구급이 불법무기를 가지고 댕기는 걸 누가 모를까? 사장은?”
– 부도를 낸 후 잠적 중이라고 합니다. 채권자 일부가 사기죄로 사장을 고소하려고 했지만 사건접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11팀에 배당된 살해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고려 이머전시의 응급구조사입니다.
이진영은 비어있는 11대응팀 자리를 바라봤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데?”
– 피해자의 사망시각은 1월 16일 17시 51분, 아직은 수사 중이지만 예리한 칼날에 베였다는 것 같습니다. 흉기의 길이는 최소 20센티미터 이상.
“큰 칼이라면 웡꺼 놈들이 쓰는 항일대도일 수도 있겠군. 근데 이브이, 이상하지 않아? 1월 11일에서 불과 4일만인 1월 15일에 폐업. 그리고 그다음 날인 1월 16일에 응급구조사가 죽었다?”
이진영은 스카잔 점퍼를 꿰어 입었다.
–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까마귀 사정은 까치가 잘 아는 법이지. 저번에 너랑 내 목숨을 구해준 감사 인사도 할 겸 잠시 봄나들이나 갔다 오자.”
EV-1은 이진영의 알쏭달쏭한 말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 * *
주안역도 3달 만에 와보는 곳이었다. 단지 눈이 녹고 봄바람이 살랑거릴 뿐 여전히 주안역 근처의 모습은 후줄근했고 오히려 더 정겨운 기분도 들었다.
이진영과 EV-1은 상가건물 2층 삼화 구급으로 올라갔다.
“취직?”
“아니이, 하이고야 만날 같은 질문이네. 뭐 좀 물어볼라고.”
“그 로봇은?”
“파트너.”
“멋진데?”
전에 이야기할 때보다 약간 대화가 길어졌다. 하지만 우주용 헤드모듈을 쓴 응급구조사는 대화가 끝나자 심드렁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며 호스에 담배 파이프를 연결하여 담배 연기를 뿜뿜 피워댔다.
이진영은 여전히 철공소 공장 같은 복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비사는 로봇과 엑소슈트를 수리하고 있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진영은 네 번째 같은 대답을 하고 나서야 원장 박영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빠라바라바아암~~”
이진영을 알아보고 들어오자마자 김간이 빵빠레를 울리며 경례를 붙였다. 이진영도 씩 웃으며 경례를 붙이며 응급구조사랑 악수했다.
지난 겨울 폐선 격전에서 김간이 랜서를 몰고 와주지 않았다면 EV-1도 이진영도 쎄잉꺼 패거리에게 잡혔을 것이다.
“오, 이게 누군가? 그 용감한 짭새로군.”
“아이고 원장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수염이 부숭부숭한 박영수 원장은 여전히 호탕했다. 수염도 그렇고 키도 짤딸막한 것이 박영수는 어딘지 판타지 소설의 드워프를 연상케 했다.
“덕분에 성업 중이지. 오, 오늘은 귀신 로봇까지 함께 해주셨구만? 이거 이거, 김간 어서 커피 한 자안.”
이진영은 김간에게 커피를 받아들고 뜨악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봤다.
벽면에는 물건을 키핑한 바처럼 경찰 24시의 사진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일전에 병문안을 온 박영수가 뜬금없이 부탁해서 해준 그의 사인 역시 전시되어 있었다.
“덕분에 사설 구급하면, 삼화 구급. 삼화 구급하면 최고의 의료서비스. 장사 잘된다니까? 앰뷸런스도 하나 더 샀어. 아, 혹시 취직할 거면 말만 해.”
“예에, 장사가 성업 중이라니 다행입니다, 그려.”
사실 삼화 구급은 불법 군용 엑소슈트 운용만으로 허가 취소돼도 할 말 없었다.
그러나 이민호의 입김도 있었고, 경찰 24시에서 워낙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탓에 경찰이나 행정부에서도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예, 삼화 구급입니다. 믿으니까, 걱정마쎄이요우. 아, 어디시라고요? 아, 예. 금방 갈 겁니다.”
이진영이 쇼파에 앉는 사이에도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왔다. TV에 방영된 맛집이란 늘 이런 법이었다.
“아무튼, 원장님. 좀 몇 가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뭔데?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사설 구급끼리는 렉카차들처럼 네트워크망이 있지 않습니까? 사장님들끼리 다들 친하기도 친하고요.”
박영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이 업계는…….”
“폐쇄적이죠. 워낙 구리구리한 일도 손에 대고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김간은 어느새 오브레즈 피스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친절해 보이는 응급구조사였지만 그는 박영수의 명령이 떨어지면 경찰이고 뭐고 이진영을 쏠 기세였다.
“저도 아는데, 제가 좀 곤란해서 그래요. 고려 이머전시. 아시죠?”
박영수는 고민하다가 벽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진영 덕택에 장사가 잘되고 있는 마당에 대놓고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고려 이머전시. 폐업했잖아?”
“예, 혹시 그 사장 어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제야 박영수 원장은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자네, 요새 현상금 사냥꾼 하는 건가?”
“현상금 사냥꾼이요?”
“형사들이 부업으로 채권자 대신 돈 받아 주고 그러잖아? 사을짝 협박도 하고.”
사을짝이라는 대목에 김간이 검지와 엄지로 ‘약간’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진영은 이 오싹하고 익살맞은 응급구조사의 반응에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녜요. 그냥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그분의 행방을 아십니까? 같은 회사 응급구조사가 죽었다고 합니다.”
박영수는 그제야 ‘아아아’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건으로 온 거였구먼?”
“예, 뭐. 그런 거죠.”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진영은 굳이 오해를 풀지는 않았다.
“스읍. 그 고려 이머전시 상황이 좀 안 좋았어.”
“안 좋다니요?”
“알잖아? 이 업계도 워낙 레드오션이라, 개나 소나 다 뛰어들어서 업계 표준 요금표도 안 지킨다고. 아니 싸게 주면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거야?”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서야 벽에 ‘사설 구급 표준 요금표’가 붙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심지어, 불법 업체도 있다고. 응급구조 자격도 없는 놈들이 의료법 위반으로 의료 로봇을 싣고 막 영업한단 말이지? 아, 자네 그거 단속할 생각 없나?”
의료 로봇을 해킹해서 처치만 할 수 있다면 어차피 치료하는 건 의료 로봇이라 별문제 없이 사설 구급 노릇을 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다아 정식 구조사 자격을 갖춘…….”
“아, 예, 나중에 한 번 들쑤셔 볼게요. 아무튼 고려 이머전시는 문틈에 손이 낑긴 것처럼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겠네요? 그러면은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댔겠군요.”
박영수는 괜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이진영에게 몸을 기울였고 김간 역시 귀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몸을 기울였다.
“그치이, 다들 상황이 그래. 우리도 약간씩은 불법을 저지르니까.”
“예, 뭐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 삼화 구급은 언제나 합법적인 일만 한다구.”
김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쌍따봉을 날렸고 이진영은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사장 이거 소재 파악 안 될까요?”
“글쎄, 그 친구 찾긴 쉽지 않을걸? 나한테도 돈 해먹은 게 있어서. 아 맞다 혹시나 찾게 되면 박영수한테 돈 주라고 전해주겠나? 대신 그 친구가 갈만한 곳은 알려줌세.”
박영수는 메모지에 허름한 여관이나 몇 가지 가게 같은 걸 휘갈겨 써주고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은 박영수와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들이 술잔이나 삼겹살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뒤에 걸려있는 ‘사설 구급 친목회’라는 플래카드를 보면 어떤 모임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업계 모임 때 사진이고. 여기 이 호리호리한 중 같은 녀석이 고려 이머전시 사장, 이두영이야.”
“하이고 또 이씨네. 진짜 이씨 종친회를 해도 되겄어. 이 사진 가져도 될까요?”
박영수는 손을 내저으며 가져가라는 시늉을 했다. 이진영은 이두영의 사진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 양반, 우리 쪽에 똥 튀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비밀 엄수는 그쪽 업계만의 불문율은 아니니까. 빈볼 처맞기 싫으면 불문율을 지켜야죠. 아무튼 원장님, 전 오늘 여기 온 적 없는 겁니다. 그리고 고려 이머전시 사장 소재지랑 사진은 제가 어쩌다가 우우우연히 알아낸 거고요.”
이진영은 ‘우우우연히’를 말할 때 유치원생처럼 두 팔로 하늘에 원을 그렸다. 옆에 있는 김간이 괜히 이진영의 행동을 따라 했고 박영수 원장은 씩 웃었다.
“아 여기 커피 끝내준다니까요. 또 커피 마시러 올게요.”
김간은 문을 열고 나가는 이진영에게 엄지손가락 두 개를 치켜세우며 쌍따봉을 날렸다.
* * *
삼화 구급에서 나온 이진영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브이, 고려 이머전시 주소는?”
–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방벽 밖 인천 여객터미널 근처입니다. 택시가 더 빠를 겁니다.
“바로 가자.”
이진영은 삼화 구급이 있는 상가에서 큰길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면서 이진영은 전화를 받으며 택시에 탔다.
– 팀장님 어디 계세요?
“어, 김대현 대원, 이브이랑 나들이.”
– 저 이제 사건 끝나고 되돌아갑니다.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했으면 해서요.
“뭔 사건이었지? 미안 내가 요새 너무 사건이 많아서 뭔 사건인지 알 수 있어야지?”
김대현은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쉬었다.
– 신영종대교 자살자 설득이요.
“아, 그랬지. 어땠어?”
– 실패했습니다. 제기랄, 그 덕분에 시경에서 절 문책한다고 난리에요. 아니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다리에서 뛰어들다 대가리부터 철판에 다이빙한 게 왜 제 책임이냔 말이죠.
김대현은 이세화의 커리어를 따라 협상가 자격증을 땄고 종종 인질극이나 자살자 설득에 투입된다.
“김대현, 뭐 먹고 싶은데?”
– 예, 뭐 지금 입맛이 없어서. 술 한잔하고 싶은데요?
“하여튼 우리 팀 사람들은 뭐만 했다 하면 술이야. 알았으. 근데 자살자 신원 넘겨줄래? 나도 왠지 보고서 써야 할 것 같으니.”
– 예, 자살자 신원은…… 어 고려 이머전시 사장, 아 금년 1월 15일 폐업했네요?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