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44
제144화
– 경위님, 이곳에서는 미군의 방해전파 탓에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 이브이. 그리고 선배가 현장 경찰 격려한다는 핑계로 직접 가져올 정도야. 검색이 된다고 해도 아마 번호에 해당하는 내사기록이랑 증거는 없을걸?”
이세화는 차를 마시며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인천시경 아동범죄 전담팀으로 오기 전 경찰본청 정보경찰이었고, 아직도 본청 쪽에 이민호 국장이나 다른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세화 역시 정보과 등 여러 루트로 이 수수께끼 문서에 대해 알아봤을 테지만 허탕을 친 상황이라는 거였다. 이진영에게까지 가져온 걸 보면 뭔가 구리구리한 냄새가 진동했다.
“선배가 저에게 이걸 주셨다는 건, 이 서류가 중부서 거라는 건데요오? 제 입장이 굉장히 곤란하다는 거 아실 테고?”
“예, 알고 있죠.”
“지금도 가뜩이나 찍혀 있는 데다…….”
“그나저나. 그 개는 뭐예요?”
개는 전상영이 자리를 비우자 이진영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진영은 이세화에게 개를 들어 보였다. 개는 방울 목걸이를 걸고 헥헥대며 이세화에게 헤엄치듯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이세화는 ‘아이구우우’를 연발하면서 개 앞발을 만지작거렸다.
“설명하자면 깁니다. 제가 기르는 개는 아니고요.”
“아, 전 또 한승아인가 걔 선물인 줄 알았네요.”
“하하, 안 그래도 개를 기르고 싶은 눈치에요. 근데 집에서 개는 안 된다고 못 박아 놨어요.”
“좋은 아빠는 못 되겠군요. 후회하지 말아요.”
딸을 잃은 이세화의 한 마디는 굉장히 묵직했다. 이진영은 미소를 지우고 개를 바닥에 내려놨다.
“아무튼, 골때리네요. 딥쓰로트라니. 그리고 이걸 선배한테 줬다는 것도요.”
“의원이라고 말한 것도 이상하죠. 전 아직 예비후보에 불과한데요.”
딥쓰로트.
이 의문의 내사번호를 보낸 놈의 정체도 수상쩍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탄핵 직전까지 몰고 갔던 워터게이트 호텔의 밀고자 ‘딥쓰로트’.
원래는 포르노 영화용어였지만 지금은 밀고자 혹은 내부고발자를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선배에게 보냈다는 건 이 내사번호에 해당하는 사건이 안보문명당에게 유리한 뭔가라는 거군요. 그리고 지금 가장 떠들썩한 정치 현안은…….”
이 허브차 카페의 TV에서도 토론회가 한창이었다. 이미 민족민생당은 장동천을 후보로 뽑았지만 안보문명당은 아직도 후보 경선이 진행 중이었다.
이세화도 TV 토론회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모르죠. 역으로 함정일 수도 있고.”
“근데 이게 중부서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이세화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씩 미소를 지었다.
“알면 다쳐요.”
“와, 누가 보면 정보국 요원인 줄 알겠네?”
이진영은 어제 만난 정보국 요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가 이진영이 어떤 사건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 놓인 봉투가 어쩌면 그 의문으로 연결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 아무튼 이건 제가 알아보죠. 연락은? 개인 전화로 드리면 안 될 거 아니에요?”
“여기로 전화하세요. 저에게 연락해줄 겁니다.”
“여기로요?”
이세화는 꽂꽂이에 열중하고 있는 카페 주인을 힐끔 바라봤다.
“여기 주인분이랑은 사정이 좀 있거든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과 이세화의 관계까지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진영은 봉투를 반으로 접어서 스카잔 점퍼 안 주머니에 꽂아 넣었고 이세화는 선글라스를 다시 올리며 물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대요? 잘쌩긴 요원?”
선글라스 때문에 이세화의 표정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정치인 다 되셨구만요. 저도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저번에 한 번 만난 거 빼고는.”
이세화는 그 말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표정은 티가 안 나지만 행동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또 복직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더군요.”
거짓말이다.
신희정은 그때 정 대령이 웡꺼와 손을 잡고 최강의 병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해줬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정치에 몸담은 이세화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정보였다.
“복직이요?”
“예, 그쪽 회사는 워낙 사내 정치가 복잡하잖아요? 또 회사 안에서 뭐가 터지는지도 모르고.”
“아아.”
이세화는 다시 등받이에 의자를 기대고 허브차를 마저 마셨다.
“그럼 선배,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동안 바쁘셨을 텐데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기시길.”
이세화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진영은 가슴의 서류를 괜히 툭툭치고는 허브차 카페를 나왔다.
“이브이, 경찰망에 접속해. 딴 것도 아니고 이세화 선배가 부탁한 거니.”
– 벌써 접속했습니다.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 존재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바로 앞번호 인천중부 057398은. 내용하고 내사접수 시간은?”
– 경찰 내사 처리 규칙상 진정 내사입니다. 음주 수동운전 민원 접수. 시간은 20XX년 1월 11일 오후 10시 31분. 구월동 사거리. 현장 파견된 경찰에 의해 무혐의로 결론 났습니다.
“그다음 번호는?”
–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400. 20XX년 1월 11일 시간 오후 10시 35분. 중부서 민원전화로 걸려온 마약 거래 첩보 내사입니다. 현재 서울시경 마약단속부로 이첩. 내사종결 입건, 수사 중입니다.
“잠깐, 그 번호만 없다고? 이게 말이 돼? 경찰 행정처리 규칙을 뒤져봐? 내사사건의 번호 자체의 내용을 폐기할 수 있는 경우는 몇 없을 거야.”
– 예,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당 사건이 소년법 보호 사건일 때, 그리고 내란, 외환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 소년법 사건일 경우 내사 기록은 가정법원으로 이첩되고 번호는 폐기합니다. 그리고 내란, 외환의 죄일 경우 번호 등재를 남기지 아니하고 비밀 처리로 해당 사건은 본청 공안, 정보국, 육공에 이첩되게 되어있습니다.
이진영은 바로 눈을 빛냈다. 그는 그냥 이세화의 부탁이기도 하고 그냥 알아보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내사번호 057399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이브이, 사건 시간이…….”
EV-1은 이진영이 무슨 말을 할지 또 무엇을 보여달라고 할지 알고 있었다.
무궁화호로 추정되는 사설 구급선의 항적.
EV-1은 바로 그 수상쩍은 구급선의 움직임을 띄워주었다.
– 시간은 세 달 전이고 일시와 시각 또한 비슷합니다.
“그래, 내사번호도 접수순으로 배당되는 거라.”
–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는 1월 11일 오후 10시 30분에서 10시 35분 사이에 배당되었겠고요. 이 구급선의 항적은 10시 35분 전후에서 약 10시 50분까지 해안도로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이진영은 김민지의 사체 투척 과정을 캐다가 의문의 항적을 발견했고 이세화는 익명의 투서로 그 시각과 비슷한 시간대의 내사접수기록을 가지고 왔다.
“이브이, 어떻게 생각해?”
– 글쎄요.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딥쓰로트라는 말이 걸리는군요. 이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에도 밀고자가 ‘정치적’으로 폭로를 할 때 익명으로 종종 쓰이지 않았습니까?
이 내사번호의 투서를 받은 사람은 정치인 이세화였다.
“그 누군가는 이세화 선배가 나 혹은 중부서 사람들에게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 팀장님이나 김대현 경사라고 봐야겠지요. 이세화님의 연고는 두 분뿐이니까요.
이진영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키워드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진소홍, 김민지, 커플링, 고려 이머전시.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뚜렷하게 이 사라진 내사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키워드는 없었다.
“이거 골치 아픈 걸 손에 넣었어.”
– 예.
EV-1은 섣부르게 추측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이 내사사건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봉인되었다고 봐야 했다.
“이브이, 어떻게 생각해? 우연일까? 이게 중부서의 내사사건이었다면 최종결정권자는 서장이야.”
EV-1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 우연이 겹치는군요. 김민지 살해, 진소홍 실종. 내사번호 057399의 접수추정시간은 전부 세 달 전이었고 김민지의 사체 투척시간은 내사접수 시간과 비슷합니다.
“이브이, 내사사건의 최종결정권자는.”
– 해당부서의 장입니다.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어이, 이브이. 이건 그냥 아무 증거 없는 가정인데 말이야. 만약 이 내사사건이 진소홍 사건과 연결된 거고 서장이 이게 드러나는 걸 막고 싶어 했다면 어떨까?”
딥쓰로트, 내사번호를 보낸 사람은 요새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인 이세화에게 서류를 보냈다. 그 말인즉, 분명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파란을 일으킬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묻혀진 내사사건은 바로 인천 중부서의 관할이었다.
– 가정이라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어떻게든 이진영 팀장님을 사건에서 눈을 돌려야 했겠군요.
3일 동안 이진영과 44팀원들을 녹초로 만든 무리한 사건 배당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서장은 뭔가를 알고 있었고 이진영이 그 비밀에 다가가는 걸 막으려 했다.
– 서장님이 내사번호 057399를 직접 처리하신 거라면 이게 진짜 내사사건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그냥 뭔가를 비밀로 묻어두려고 한 거야. 김민지 사체 투척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1월 11일 10시 31분부터, 10시 35분 사이에 중부서 관내에서 뭔가가 있었어.”
– 겨우 5, 6분의 시간이라도 관련 사건을 전부 다 알아보기엔 너무나 방대합니다.
“그래, 그렇지. 난민지구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크니까. 온갖 사건이 다 접수될 테니 말이야.”
– 경찰 신고전화부터 확인할까요?
“아니, 서장이 손을 썼다면 거기부터 조작했을 거야. 지금은 배를 찾는 게 최우선일 것 같다. 일단 서로 되돌아가자.”
강력전담부 행어는 오후에도 시간에도 바쁘게 돌아갔다. 마약을 팔다 잡혀 온 난민이 조사를 받고, 민원인들이 옷을 벗으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이진영은 이 아수라장을 스쳐 지나가며 44팀 자리에 앉았다. 거의 영혼이 빠진 것 같은 임은혜가 자기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애들 손때가 묻은 인형탈이 버려져 있었다.
“어, 음 수고했다.”
“수고요? 팀장님 점심부터 어디 가신 거예요? 제가 대신해서 경찰상조회 정산까지 한 거 아세요?”
임은혜는 이진영을 째릿 노려보고는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이진영은 그녀의 옆에 앉아 매트가 가져다준 커피를 들고 바라봤다.
늦은 오후쯤 되자 속속 44팀 인원들이 돌아왔다.
유인환은 본청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부터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이진영의 옆 땅바닥에 그냥 털푸덕 주저앉았다.
“팀장님, 본청 사람들은 늘 그런답니까? 와 내가 진짜 공안사범이 된 거 같네. 게다가 육공 새끼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나 육공이야!’, 육공이고 오공이고 사람 말을 들어 처먹으라고 쪼옴…….”
아직도 서울대에 경찰과 육군은 진입하지 못했고 공안 3사는 바리케이드를 넘어온 유인환을 달달달 볶았다. ‘인간의 피지컬로 어떻게 가능하냐!’, ‘너 러다이트의 스파이 아니야!’하고 육공에서는 유인환을 몰아세웠다. 사실상 피의자나 서울대의 내통자 취급이었다.
이진영은 말없이 자기 커피를 유인환에게 내밀었다. 유인환이 커피를 받기도 전 윤숙희가 커피를 냉큼 낚아채며 이진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으으으으으. 팀장님 저 이러다 죽겠어요. 아니 조서를 몇 개나 써야 하는 건데? 이명훈 사건, 상부에서는 지원 안 해준대요? 하다하다 경찰 24시 인터뷰까지 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