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49
제149화
그러고 보니 아까 이효진이 왔다 간 뒤로 1팀의 책상은 싹 비워져 있었다.
1팀은 강력전담부에서 최고의 엘리트들만 모인 팀이었고 그들이 서류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건 꽤나 의미심장했다.
“그 차 리스한 놈이 꽤나 끗발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진영아. 난 그냥 모르고 있는 게 신상에 좋은 걸까?”
형사부장은 뿔테안경을 치켜올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진영은 차마 형사부장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1팀은 서장의 직접 명령을 듣고 어딘가에 ‘피내사자’와 함께 숨은 상태였다.
서장은 람보르기니에 관한 모든 증거 역시 병합해서 1팀에게 넘겨줬고.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이진영은 고생해서 잡아 온 ‘대물’을 고스란히 놓칠 팔자였다.
“대물이라.”
이진영은 강력전담부 행어로 되돌아왔다. 증거조사에서 배제된 팀원들이 팀장을 보고 일어섰다.
“팀장님, 어떻게 된 거랍니까? 왜 1팀이 증거를 가져간 거예요?”
“아니, 이런 게 어딨어요? 제가 항만청에서 이브이랑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김대현은 어찌나 추웠는지 임은혜가 입던 인형 옷을 빼앗아 입었고 임은혜는 머리에 진돗개 인형탈을 반쯤 걸치고 있었다.
“니들 사귀니?”
“아뇨!”
“무쓴 소리예요!”
두 사람은 귀여운 꼴을 하고 동시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김상현도 고스톱 칠 때 쓰는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투덜거렸다.
“형님, 이거 완전 물 먹은 거 아닌가요? 옘병할 뭔 또 내사사건이래?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들이 팔 수 없잖아요?”
윤숙희도 맞장구를 쳤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레첸 강간 사건까지 증거를 다 넘기라고 1팀 전임 인공지능이 알려왔어요. 김민지 살해나 진소홍 사건이 저 람보르기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서장에 의한 수사방해.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수사배당을 해서 44팀을 괴롭히더니 이제는 아예 다른 팀에 배당을 넘겼다.
유인환이 말했다.
“그 자수했다는 놈이 누구지? 우리 회사 CCTV는 없나?”
– 유인환 경사님, 이미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뭐? 강력전담부 CCTV를 지워?”
– 정기점검 중 누락. 이렇게 되어 있군요.
“지금 정기점검하는 날이 아니잖아?”
유인환도 분통을 터뜨리며 서장실이 있는 위층을 노려봤다.
자수했다는 차량 리스자의 신원은 물론 증거일체는 새로 부여된 내사사건에 병합되어 수챗구멍으로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물이라.”
개를 쫓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이진영은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가랑이를 오므렸다.
“형님은 갑자기 뭔 대물 타령이에요?”
“아니, 밥이나 먹으러 갔다 올게.”
임은혜가 입술을 댓발 내밀고 항의했다.
“예? 또 혼자 빠져 가지고 술 먹으러 갔다 오는 거 아녜요?”
“아, 제군들의 팀장에 대한 믿음이 고거밖에 안 되는 거였나?”
다른 팀원들도 우우우우하는 소리를 냈다. 이진영은 팀원들을 둘러보다 EV-1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이브이,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야겠다.”
– 전화 연결할까요? 내사 11팀으로?
“아니다. 이런 제기랄. 개도 지 말하면 온다더니.”
흡연장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씹는 담배와 검은 침이 휴지통 뚜껑에 맞아 뚜껑이 팽그르르 돌았다.
“거 위생적으로 안 좋은데 차라리 그냥 연초를 피우시는 게 어때요?”
“건강에 안 좋아서. 잘 지냈나요? 이진영 경위? 신수가 훤해지셨네에?”
“아까 보셨으면서? 예, 덕분에 아주 자알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구, 참 잘했어요. 상 줘야겠네?”
“이왕 주시는 거 표창장이나 주시죠? 청렴결백한 경찰의 모범으로요.”
“표창 같은 소리하네? 저번에 무사히 넘어간 거나 다행으로 여기시지 그래?”
이효진은 이진영의 하얀 운동화 옆에 검은 침을 뱉었다.
“본론부터 말하지. 내놔.”
“아니 시발 뭔 밑도 끝도 없이 내놓으래요? 나한테 뭐 맡겨놨어요?”
“아니이이, 그거 쫓으려 중늙은이 보낸 걸 보면 댁도 알잖아? 그쪽이 혼자 먹었다간 탈 날걸?”
“이효진 팀장님, 한국어에는 목적어라는 아름다운 문장성분이 있습니다? 목적어를 말씀하셔야지요?”
이효진은 이진영에게 코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그를 똑바로 쏘아봤다. 이효진은 여자치곤 꽤 키가 큰 편이었고 힐을 신으면 이진영과 거의 눈높이가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 오시면 사내 성군기 위반으로 오해할걸요?”
“하라지? 난 댁이 아주 마음에 들거든?”
“아이고, 그러시면 정식으로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어떨까요?”
이효진은 씹는 담배를 다시 납작한 깡통에서 꺼내 짝짝 씹으며 이진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말장난은 그만하지. 개 넘겨. 너 진짜 배탈 난다?”
개.
이동우의 개를 노리고 이효진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진영은 문득 어제 만난 정보국 요원을 떠올렸다.
육공의 입김이 강한 내사 11팀과 정보국이 이진영이 맡은 사건에 밥숟가락을 올렸다. 이진영으로서는 정보가 절실했다.
“저, 그.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여성 요원들은 원래 대가 쎈 요원들을 뽑는 겁니까? 아니면 군대나 경찰의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그렇게 만드는 겁니까?”
이효진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씩 썩은 미소를 짓고는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 뒤로 물러섰다.
“같이 식사 하시죠.”
“뭐?”
“그쪽이 날 아주 좋아한다니. 이번만 특별히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단.”
이진영은 말없이 그녀 주변에 있는 수사관들을 쳐다봤다. 이효진도 이진영의 시선에 따라가다가 부하들더러 따라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은 EV-1만을 대동하고 월미도역 쪽으로 걸었다.
“첫 데이트에 여자를 이런 곳으로 데려오다니 매너 한 번 엉망진창이군.”
이효진은 월미도역 앞의 예의 국숫집 안으로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노인은 하얀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찜기에서 작은 새우만두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놨다.
이진영은 만두를 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둘 다 바쁘니까 본론부터 이야기할까요? 지금 서장이 44팀 사건을 뺏어갔어요. 내사사건으로 그냥 케이스 종결시키려고 합니다.”
“케이스 종결?”
“예, 뭐 내사팀 팀장이시니 저보다 법률은 더 잘 아시겠죠.”
이효진도 새우만두를 질겅질겅 씹고 주인장이 내놓는 독한 소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
만두를 잡으려는 이진영의 손이 멈췄다.
“설마 그쪽도 딥쓰로트?”
이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화에게 의문의 투서를 보낸 사람은 이효진에게도 같은 문서를 보냈다.
이효진은 다른 경로로 이 사건을 쫓아온 것이다.
“우린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다른 경로로 이두영에게 접촉했지. 이두영은 오늘 아침. 피유우우우.”
이효진은 새우만두를 간장에 찍으며 신랄하게 이두영의 자살을 비꼬았다.
“내사과랑 접촉해서 이두영이 자살한 건가요?”
“이진영 경위. 당신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어?”
이효진은 사냥개답게 날카로운 표정으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제가 팀장님을 얼마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저번엔 저를 정 대령이랑 엮어서 죽이려고 했잖아요?”
이효진은 씩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갑자기 코트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당신이 이동우의 배에서 람보르기니를 찾았다는 정보를 받고 우리도 본청 교통국을 이 잡듯이 뒤졌어. 이건 리스 받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이게 누구죠?”
람보르기니는 썬팅을 짙게 해놔서 안에 누가 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
“그럼 왜 이 사진을…….”
“하지만 이 집 집주인이 누군지는 알지.”
“도대체 그게 누군데 천하의 이효진 팀장이 뜸을 들이실까?”
노점 TV에는 대선 관련 토론회 장면이 방영 중이었다.
방송사에서는 대놓고 장동천과 이세화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 안보문명당의 후보가 결정되지 않은 걸 감안하면 정말 이례적이었다.
장동천은 강력한 난민대응 정책과 롱꺼의 진압, 그리고 전임 인공지능의 후퇴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 자신의 공약을 열정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이세화는 아무래도 수세였지만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며 장동천의 공격을 뿌리쳤다.
“딥쓰로트.”
의문의 제보자는 모종의 이유로 묻힌 내사번호를 발굴해서 ‘정치인 이세화’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딥쓰로트가 내사번호를 까발려서 노릴 수 있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이는 뭘까?
이효진은 잠복수사를 해서 얻어낸 사진 몇 장을 테이블 밑으로 이진영에게 건넸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명품으로 몸을 도배한 청년 하나가 또 다른 슈퍼카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건.”
이진영은 벼락 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여 새우만두를 접시에 떨어뜨렸다. 이효진은 떨어뜨린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쏙 집어넣고 질겅질겅 소리 나게 씹었다.
진소홍이 반지까지 준비해서 작업하려던 ‘거물’.
이진영은 퍼뜩 진소홍의 유류품인 반지를 꺼냈다.
“그건 어디서 난 거지?”
“실종자, 진소홍의 물건이에요. 웡꺼의 요리사의 딸.”
웡꺼라는 말이 나오자 국수를 삶던 노인이 움찔했다.
반지의 주인은 뜻밖에도 민족민생당 대선후보의 아들이었다.
“그, 그래서 서장이.”
“그래, 나도 두서없이 쫓아다니다가 람보르기니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나서야 알았어. 내사번호 057399는 바로 람보르기니가 누군가를 친 뺑소니 사건이야. 당신네 서장이 직접 나서서 그 사건을 내사사건이라 묻어버렸고.”
이효진은 람보르기니를 보지도 않고 단언했다. 이진영은 감식 로봇 탕후루가 1차 감식한 결과를 알고 있었다. 차량은 외부에 있는 누군가를 타격하고 멈춰 섰다.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땐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좀 이상했다.
“이브이 람보르기니는 다중 제동장치가 걸려 있지 않나?”
– 예, 그 차량 전임 인공지능이 운전했다면 사고율은 0%에 가깝습니다.
“만약, 그 차량을 인간이 운전했다면? 그리고 그 증거가 차량에 남아있다면?”
마침 어제 44팀에 배당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수동운전 문제였다.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한 사람이 차량을 수동운전으로 조정해서 사람 하나를 깔아뭉갰다. 그 사람은 살인혐의로 송검되었다.
이진영이야 경찰 신분으로 수동운전을 할 수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수동운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불법이었다.
이효진은 교활한 사냥개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나도 대충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겠어. 그 사진 속의 새끼가 수동운전 하다 사고를 친 거군. 만약 그게 밝혀지면 정치권은 어떻게 될까?”
– 현재 민족민생당은 각 분야의 인공지능 적용 확대에 제동을 거는 게 주요 정책입니다. 또한 장동천의 주요 공약 중 하나가 인공지능을 철폐하고 지금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