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52
제152화
김상현은 줄줄이 늘어선 비상 축전기 중 엘리베이터의 전원을 내렸다. 각 호텔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우르르 펜트하우스로 몰려가고 있었다.
“히야…… 이거 근데 경위서로는 안 될 것 같은데? 하아 또 경찰보험 공제회 서류 내가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인환아, 그쪽은?”
– 예,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 근데 이 정도 폭약이면 호텔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전상영 선배의 솜씨를 믿는 수밖에는.”
김상현은 비상복도로 나왔고 반대편 비상 복도에는 유인환이 임은혜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지금이에요! 끊어요!
임은혜는 박물관에 들어가야 할 소위 삐삐선 전화기 TA-321로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전화는 떨렁 전선 두 가닥으로 연결되는 터라 정보폭탄의 영향을 받기는 커녕 해킹도 할 수 없었다.
쾅쾅!
또 다시 저속폭탄이 터지면서 비상계단이 무너져 내렸다. 급히 펜트하우스로 지원을 오려던 요원들은 무너진 잔해에 깔려 바닥에 어이쿠하며 나자빠졌다.
“테러다아아아!”
요원 중 한 명이 착각해서 그만 테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직까지 호텔 전체의 통제권은 임은혜가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돌돌이와 EV-1의 도움을 받아 호텔 전임 인공지능의 우회로로 호텔 건물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나 사설회사의 보안시스템도 만만치 않았고 임은혜는 필사적으로 즉석에서 코드를 짜내면서 보안시스템에 저항하고 있었다.
다른 외부비상구는 물론이고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모든 길에 비상등이 깜빡이고 호텔 안내 직원 복장을 한 여자 하나가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대, 대피하셔야 합니다. 부, 불이! 불이 붙었어요!”
그녀의 뒤에서 기다렸다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펜트하우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방금 전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그 진동이 펜트하우스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적은 초장부터 호텔 전체를 해킹하지 않나 저속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펠리셰이드 호텔이 고급 호텔이라고 하지만 여자 종업원을 고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객실 안내원은 그냥 피부 스킨이 씌워진 로봇을 선호하는 편이다.
조명이 꺼진 혼란 상황에서도 여자는 ‘패스파인더 비컨’을 슬쩍 장현권이 있는 쪽으로 던졌다.
이 신호기는 상공에서 강하하는 공수부대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특수제작된 신호기였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필터를 통해 보면 환하게 반짝인다.
지금 펜트하우스 안에 있는 인원들은 정보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해드 모듈을 벗고 육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컨이 반짝이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나 참. 팔자에도 없는 스파이 짓이라니?”
호텔 여직원 옷을 입은 윤숙희는 냉큼 자세를 낮추고 차폐연막탄을 집어던지고는 들어올 때 발로 그어놓은 형광 비표를 따라 자세를 낮추고 바깥으로 나왔다.
연막탄이 속속 터지면서 펜트하우스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잠깐! 이건 연기가 아니야! 차폐 연막이다! 이런 제기랄! 누군가 연막을 풀었어!”
가뜩이나 정보폭탄 때문에 육안으로 보고 싸워야 할 판에 차폐연막탄을 든 윤숙희를 ‘어서 옵쇼’하고 들여보낸 셈이었다.
헤드모듈을 쓰고 인공지능 분석을 켜면 오늘의 홈쇼핑 안내가 흘러나오며 스테이크 밀키트를 추천한다. 벗자니 차폐 연막 때문에 코도 시큰하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윤숙희는 펜트하우스를 한층 더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유인환이 기다리고 있는 계단으로 뛰어나왔다.
타다다다!
계단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밑에 있던 요원들은 위에 누군가 움직이는 걸 보고 마구잡이로 총알을 난사했다. 레일건과 화약식 총기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 아래 객실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호텔 밖으로 뛰어나왔다.
“유인환! 또 사고 친 거냐!”
“아오, 누님! 저라고 만날 사고 치는 줄 알아요!”
유인환은 능글능글 웃으면서 연막탄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밑에서 총을 쏘던 놈들은 차폐 연막이 터지면서 열화상이든 적외선이든 위에 있는 사람이 어딨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어! 밖이다! 낙하산으로 뛰어 내리고 있어!”
김상현은 임은혜를 데리고 바깥으로 뛰어내렸고, 유인환은 윤숙희와 함께 뛰어내렸다. 네 사람 중에 강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유인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낙하산에도 프로펠러가 달린 인공지능이 있었고, 그걸 세밀하게 조종하는 건 다름 아닌 EV-1이었다.
놈들은 호텔 유리창을 열고 뛰어내린 네 사람을 쏘려고 했지만, 고층 빌딩, 그것도 펜트하우스의 창문이 열릴 리 없었다.
언니야는 차폐 연막 속에서 기침을 쿨럭쿨럭하면서도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게 경찰의 실력이라고? 경찰 따위가?”
호텔을 장악하고 동시에 펜트하우스의 구조를 파악해서 무력화시키는 작전은 ‘정보국’에서도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어이없게도 정보국 요원은커녕 일선 경찰들인 44팀이 진짜 정보국 요원들을 그들의 방식으로 엿 먹이고 있었다.
언니야의 정체는 바로 이진영을 협박했던 그 정보국 여자였고, 그녀와 그녀의 부서는 모종의 이유로 장동천을 지지하고 있었다.
정보국 내부에서도 파워게임은 존재했고 정권이 교체되느냐 아니냐로 부서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했다. 언니야의 부서는 장동천에 올인했고 중부서 서장과 결탁하여 장현권 스캔들을 묻으려고 노력했다.
“어이! 짭새애애! VIP는!”
“어! 아직 확보하고 있다!”
1팀 팀장은 정전이 되자마자 장현권과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1팀 팀원들은 바짝 긴장하며 장현권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 암살 아니야? 나, 나 죽이러 오는 거 아니냐고!”
“병신아, 누가 너를 암살해!”
“아, 아니! 웡꺼의 요리사의 딸이라메!”
1팀 팀장은 벌벌떠는 장현권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웡꺼의 요리사의 딸은 뭐야?”
“뭐, 뭐긴 뭐야. 그, 그때 내가…….”
1팀 형사들과 장현권은 저도 모르게 아직 불빛이 비치는 창가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이런 병신같은 짭새들! 창가로 가지 마! 저격 모르냐!”
그러나 지금 걱정할 것은 저격이 아니다. 유리창이 소리 없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고압의 워터레이저가 유리창을 동강 내면서 바람이 순식간에 휘이이잉하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검은 유령처럼 옥상 위에서 EV-1과 이진영이 떨어졌다. EV-1은 광학위장을 해제하고 사뿐하게 펜트하우스에 발을 디뎠다.
차폐 연막 때문에 꽤나 위험한 착지였지만 EV-1은 윤숙희가 던진 패스파인더 비컨을 통해 호텔 내부구조를 스캐닝했다.
뒤로 물러서는 1팀 형사들 앞에 귀신 로봇이 나타났다.
– 제압하겠습니다.
EV-1은 고무탄으로 퍽퍽퍽 1팀 형사들을 쓰러뜨리고 장현권을 오른팔로 잡았다. 그리고 롤러대시를 가동하여 뒤로 물러나자마자 앗하는 순간에 EV-1은 다시 허공에 떴다.
“으, 으아아아아!”
1팀 팀장과 장현권은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둘 다 팔이 수갑에 눌리면서 고통에 겨워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은 장현권 쪽이 더 심했다. 1팀 팀장이 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장현권의 손목뼈가 부러지고 EV-1은 허공으로 떨어지기 직전 유압 커터로 수갑 쇠사슬을 깔끔하게 끊어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장현권은 수갑이 끊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비명을 내질렀다.
EV-1은 자유낙하하면서 위쪽으로 개틀링식 레일건을 마구 난사했다. 언니야의 정보국 요원들과 1팀 경찰들이 위에서 ‘장현권’을 쏴 죽이려다가 EV-1의 위협 사격에 놀라며 호텔 안쪽으로 피신했다.
“레드 아리마! 시발 맞은편 호텔의 저격수들은 뭐 하는 거야!”
레드 아리마는 호텔 맞은편의 다른 호텔 건물과 상가건물에도 저격수를 배치해두었지만, EV-1이 창가로 접근하는 걸 막지 못했다.
EV-1이 역저격으로 저격수들을 전부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쫓아! 아직 VIP가 경찰에 넘어가지 않았다!”
언니야의 양옆으로 랜서 두 대가 롤러대시로 쌩하고 달려 나간다. 언니야의 양복 정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과 동시에 두 대의 랜서가 호텔 유리창을 깨부수고 자유 낙하했다.
EV-1과 이진영은 장현권을 손에 쥐고 저 아래로 낙하하고 있었다.
랜서는 이제 장현권이고 뭐고 묻어버릴 심산으로 식스팩 대전차로켓을 발사했다. 열두 발의 대전차 미사일이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손님들은 창밖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와인을 마시던 사람도, 한창 연인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사람도, 엑소슈트 두 대와 검은 프레임의 로봇이 미사일을 주고받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월미돈가?”
적어도 큰돈 들여 5성급 호텔에 관광 온 보람은 있었다. EV-1과 랜서 두 대는 55층 호텔에서 수직 낙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브이! 절대로 호텔에 미사일이 박히면 안 돼!”
– 물론입니다. 임은혜 순경님이 돕고 있습니다.
임은혜는 낙하산에서 내려 김대현이 준비한 밴 위에 타면서도 노트북으로 코드를 짜고 있었다. EV-1과 임은혜의 연계플레이는 완벽했다.
EV-1은 열두 발의 미사일을 모두 해킹해서 월미도 상공으로 날려버렸다.
펑펑펑펑!
자폭 기능이 작동하면서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렌지빛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팰리세이드 호텔의 투숙객 중 몇 명은 저 화려한 불꽃에 소원을 빌기도 했다.
타다다다다!
미사일 공격이 실패하자 랜서는 바로 중형 레일건으로 EV-1을 공격했다.
‘저 자식들! 장현권까지 입막음하려 하는군!’
이진영은 정보국 일부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람보르기니를 찾았을 때 김상현, 김대현을 습격한 놈들도 정보국과 레드 아리마였고 이진영을 회유하려고 한 여자도 정보국이었다.
만약 여기서 장현권이 죽는다면 정보국에서는 경찰의 집안싸움으로 프레임을 전환하고 경찰의 애물단지 이진영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대통령이 된 장동천을 정보국과 경찰 가담자들이 쥐고 흔들려면 장현권이 살아있어야 하지만, 완전히 파토가 난 지금은 장현권이 죽어야 다들 안전하다.
“이브이! 나보다 장현권을!”
– 아뇨, 제게 제1순위는 이진영 팀장님입니다.
EV-1은 아예 장현권을 대놓고 쏘라는 듯이 위로 쳐들고는 라미네이트 폼을 분사했다. 충격흡수용 젤은 처음에는 비누 거품처럼 분사되다 나중에는 딱딱하게 굳으며 충격을 흡수한다.
그러나 지금 EV-1은 위에 있는 랜서의 시각센서를 노리고 라미네이트 폼을 분출했다. EV-1을 따라 강하하는 랜서 놈들의 시각센서에 갑자기 라미네이트 폼이 덮어버렸다.
이 랜서들은 한승우의 놀라운 기동을 보고 인공지능 보조가 붙은 신형기였다.
그러나 정보폭탄과 차폐 연막 등으로 인공지능 보조를 끈 상태였고 라미네이트 폼이 시각센서를 덮자 놈들은 당황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놈들은 급기야 상부해치를 열고 EV-1의 위치를 찾았다.
“어디!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