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53
제153화
퍼륵.
EV-1은 라미네이트 폼을 분사하는 것과 동시에 낙하산 모듈을 작동시켰다. 낙하산이 펼쳐지면서 EV-1은 랜서의 위에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퍽!
상부해치를 열고 상황을 파악하려던 중장기병이 어깨에 총을 맞고 비틀거렸다. 놈들도 수동으로 낙하산 모듈을 펼쳤다.
“이 새끼가아아!”
놈들은 EV-1을 레일건으로 겨눴지만 EV-1의 모습은 이미 낙하산 밑에 없었다. EV-1은 낙하산을 분리하고 비상용 낙하산을 하나 더 펼치며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았다.
공수부대들이 땅에 닿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낙하산을 펼치는 저속침투 묘기였다. EV-1은 바로 비상용 낙하산을 끊어버리고 김대현과 팀원들이 타고 있는 밴으로 내달렸다.
쇠를 갈아내는 것처럼 캐터필러에서 파라락 오렌지빛 불꽃이 튀고 EV-1과 밴이 외곽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 멍청이들! 틸트로터로 쫓아가겠다! 놈들을 쫓아!
언니야가 멍청하게 코앞에서 EV-1을 놓친 랜서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상공을 선회하던 정보국의 틸트로터가 서서히 호텔로 다가오더니 펜트하우스 앞에서 강하램프를 열었다.
언니야는 사뿐하게 호텔방에서 강하램프 위로 발을 올렸고 레드아리마 병사들도 호텔에서 앞다퉈서 철수했다.
쐐애애애액!
이 근처에서 고속기의 찢어질듯한 제트엔진 소리가 들리는 건 언니야 패거리들에게는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해군기다.”
마침 신 인천항에는 충무공 이순신 항공모함이 정박하고 있었고 거기서 날아온 해군기가 틸트로터 위 상공에서 멋지게 선회했다.
“해군! 빌어먹을 신희정.”
여자는 신희정 욕을 하면서 기장에게 빨리 이동하라는 시늉을 했다.
이진영의 44팀은 23팀과 본청 내사 11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자력으로 용의자 장현권을 체포했다.
“이브이! 체포 시각 알려줘! 23팀장님한테 구속영장 치라고 말씀드리고!”
– 예, 현시간부로 장현권, 장현권. 김민지 살해사건 용의자 확보로 인한 수사 개시합니다. 검사의 승인 역시 받았습니다.
경찰서장이 그렇게도 막고 싶어 했던 장현권이라는 이름이 수사기록에 올랐다.
내사까지는 경찰서 내부에서 막을 수 있지만, 입건이 되고 검찰에서 ‘인지’한 지금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경찰이 수사권 전부를 가져가긴 했지만, 검찰에게 자체 수사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경찰 내사 처리규칙의 예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었다.
EV-1의 뒤를 맹렬한 속도로 랜서 두 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먼저 밴에 탄 임은혜가 밴의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EV-1 의 등 뒤에 있는 이진영에게 팔을 뻗었다.
“팀장님! 용의자 넘기세요!”
EV-1과 밴은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EV-1이 장현권을 밴에 던지기 직전이었다. EV-1은 갑자기 팔을 움츠리고 그 자리에서 턴픽을 아스팔트에 꽂아 넣으며 180도로 회전했다.
타다다다다!
레일건이 장현권의 아슬아슬하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피가 퍽하고 튀었다.
장현권은 빌딩에서 떨어졌을 때 이미 기절해서 축 늘어졌고 EV-1이 회전하자 축 늘어진 놈의 몸이 천으로 만든 인형처럼 팔랑거렸다.
“대현아! 먼저 가!”
“하지만 용의자는요!”
“여기 있다간 너희들도!”
팡!
랜서 한 대는 밴의 옆구리를 노리고 레일건을 쐈다. 아슬아슬하게 슬라이딩 도어에 맞았고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검은 아스팔트에 문짝이 파가가각 갈리며 불꽃이 튀기고 깜짝 놀란 임은혜가 입만 뻐끔거렸다.
그 사이 EV-1은 휙하고 장현권을 밴으로 집어 던졌다. 유인환이 아니었다면 장현권은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가 갈렸을지도 모른다.
유인환은 밴 밖으로 몸을 기울여서 한 손으로 장현권을 받아냈다.
“저 유인원 같은 놈.”
“아,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말라니까요오오오!”
차가 멀어지면서 도플러 효과 때문에 유인환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EV-1과 이진영은 용의자를 밴으로 넘기자마자 그 자리에 다시 한 번 턴픽을 박아넣으며 멈춰 섰다.
심야라 그런지 외곽고속도로는 차가 다니지 않았고 저 앞으로 밴이 거침 없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랜서 두 대는 EV-1 앞 약 10미터 지점에서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랜서의 흉부장갑 위에 지긋지긋한 레드 아리마의 문장이 붙어있다. 놈들은 EV-1과 이진영을 넘어서지 못하면 장현권을 죽이거나 탈환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진영은 럭키 스트라이크를 꺼내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바닷바람에 섞여 사라지고 랜서 안에 있던 중장기병 두 명도 상부해치를 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헤드모듈을 들어 올리고 담배를 피웠다.
바닷바람이 휭하고 불어 오면서 전단지 몇 장이 바람에 흩날린다. 이진영과 두 명의 중장기병은 담뱃불을 고가도로에 튕겼다.
세 개의 담배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EV-1과 랜서 두 대가 격돌했다.
레드 아리마로 채용될 정도라면 이들의 솜씨는 한승우 못지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들이 타고 있는 랜서는 한승우의 데이터로 개량된 랜서 A2였다.
이제 정보폭탄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니 놈들은 각각 보조 인공지능을 작동시켰고 단숨에 EV-1을 압도했다.
파바바바!
중형 레일건이 EV-1의 롤러대시를 노리고 날아오더니 아스팔트에 구멍이 뚫렸다.
EV-1이 한 바퀴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을 때 랜서 한 대가 EV-1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EV-1은 파일벙커를 바로 뻗어서 랜서의 옆을 찍어버렸다.
랜서는 급히 옆으로 몸을 꺾었다. 방금 움직임은 인간의 반사신경으로는 불가능한 기동이었다.
“인공지능 보조를 받고 있군!”
랜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바로 무릎으로 이진영을 찍으려고 했다. EV-1은 왼손의 진압방패로 랜서의 무릎을 막아냈다.
카아앙!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EV-1의 프레임이 흔들렸다. 하마터면 이진영은 EV-1의 등에서 튕겨서 아스팔트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다.
엑소슈트에 탑승한 중장기병에 비해 기계보병들은 굉장히 불리했다. 하지만 이진영과 만식이는 이런 열세에서도 수많은 중장기병들을 잡고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만식이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었지만, 하물며 EV-1은 만식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이었다. 이진영은 EV-1의 안전케이블을 풀고 바닥에 한 바퀴 구르면서 레일건을 겨눴다.
세 사람이 격투전을 시작하는 사이 벌써 밴은 고가도로 아래를 내달리고 있었고 랜서는 그쪽을 향해 XDR-01 저격 모듈을 겨눴다. 이진영은 XDR-01 저격모듈 쪽으로 총을 쏴버렸다.
오버히트를 하면서 레일건의 방열판에서 치이익하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무리하게 출력을 올린 레일건 탄자가 XDR-01의 앞부분을 때리면서 폭발이 터졌다.
XDR-01의 탄자가 저격모듈 자체를 때리면서 퍼런 전류를 뿜어내며 폭발했고 그 충격에 랜서의 프레임이 휘청거렸다. EV-1은 휘청거리는 랜서 프레임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랜서는 우주기동형이 아니었기에 슬라스터 모듈이나 애프터 버너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런!”
강하용 낙하산은 아까 호텔에서 떨어지며 사용했고 랜서는 아무 안전장치 없이 고가도로에서 맥없이 밀려 떨어졌다.
퍽, 엑소슈트의 유일한 약점은 ‘통조림’이었다. 통조림을 마구 흔들면 안에 든 토마토가 찌그러지듯 엑소슈트가 충격을 받으면 안에 있는 파일럿도 충격을 받는다.
그걸 대비하기 위한 엑체 젤이 들어있는 내충격 슈트를 입었다고 해도 이 정도 높이라면 소용없었다.
랜서는 마지막 발악으로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뭐라도 잡아보려고 했지만, 고가도로 기둥만 그르륵 갈릴 뿐 속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랜서 한 대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파일럿은 엑소슈트 밖으로 간신히 비집고 나왔지만 헤드모듈 아래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대로 엎어졌다.
“잘도 보리스를! 이 자식이이이!”
동료가 당하는 걸 보고 다른 중장기병은 눈이 아주 돌아버렸다.
놈은 이진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레일건을 이진영 쪽으로 긁어버렸다.
바바바바바!
가드레일에 구멍이 뽕뽕 뚫리고 이진영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이진영과 EV-1의 호흡은 찰떡같았다.
텅텅텅텅!
이진영이 덤블링하는 쪽으로 진압방패가 날아오면서 레일건 탄자가 맞고 직사각형의 방패가 트럼프 카드 트릭처럼 한쪽 모서리만 땅에 닿아 마름모꼴로 빙글빙글 돌았다.
랜서는 파일벙커 모듈을 뽑아서 방패와 함께 이진영을 뚫어버렸다. 그러나 이진영은 방패 뒤에 없었다.
“이 쥐새끼같은!”
“아, 그말 참 많이 들었었지!”
이진영은 가드레일 밑으로 기어 들어가 또다시 최대출력으로 랜서의 발목 부분을 노렸다.
랜서의 발목은 마치 인라인 스케이트 같은 롤러대시 모듈로 연결되어 있었고 관절부는 초합금 철갑으로 둘러싸인 미래 기사의 몇 안 되는 약점이었다.
퍽!
전에 천수관음이 당했던 것처럼 랜서 역시 발목관절을 당했다. 이진영이 레일건은 오버히트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그는 냅다 총을 버리고 다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랜서의 파일럿은 고통 속에서도 이진영을 향해 레일건을 겨눴다.
“트리거 모듈이라고?”
EV-1은 등 뒤의 트리거 모듈을 이진영 쪽으로 슬라스터 노즐의 기압을 이용해 튕겨 보냈다. 이진영은 플라이볼을 받는 외야수처럼 멋지게 슬라이딩하면서 트리거 모듈을 손에 쥐었다.
“그까짓 게 뭐…….”
어쨌다고?
랜서의 파일럿은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사실 EV-1은 전에 폐선지구에 돌입할 때와 달리 현재는 엑소슈트에 유효한 타격을 줄 만한 무기가 없었다.
서장이 치사하게 EV-1의 무장 전부를 봉인시켰기 때문이다.
엑소슈트 프레임과 인공지능 OS는 마이크로웍스의 자산이었지만 EV-1의 무기는 어디까지나 경찰장비였다. 서장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EV-1은 단 한 발도 무기를 발사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의 EV-1은 파일벙커도 장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EV-1의 강점은 프레임에 장비하는 무기만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랜서와 EV-1 바로 위를 해군 고속전투기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장갑 폭탄을 투하했다. EV-1의 유도를 받은 장갑폭탄이 랜서의 레드 아리마 문장에 적중했다.
순식간에 랜서의 흉부장갑이 폭발에 터지고 뒤이어 탠덤 탄두가 엑소슈트 안쪽으로 불길을 뿜어냈다.
고열에 엑소슈트의 장갑 사이사이가 밝게 오렌지빛으로 불타오르고 안에 있는 파일럿은 산채로 불에 타죽었다.
유도 폭격을 한 해군 전투기 RK-51이 저공비행을 하며 주날개를 흔들고 다시 늠름하게 상공으로 사라졌다.
랜서가 앞으로 쿵하고 쓰러지고 이진영은 EV-1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아이고야. 슬라이딩 캐치 연습 좀 하는 건데……. 팔꿈치 다 까졌다야.”
– 후후 코리안 시리즈라고 생각하고 받으셨어야지요.
“야, 너까지 놀리냐?”
해군기가 온 이상 레드 아리마도 어쩔 수 없었다. 정보국의 틸트로터는 추가 병력 투입을 포기하고 인천 앞바다에서 선회해서 서울 쪽으로 향했다.
한편 고가도로에서는 해군 공격헬기가 밴을 호위하며 멈춰섰고 이진영과 EV-1은 또 거지꼴로 팀원들과 합류했다.
문짝이 뜯겨져 나간 밴 위에 이진영은 털썩 주저 앉았다.
“또 경찰보험 상조회에서 지랄할 거 같지 않냐?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보험 상조비 많이 든다고 난리였거든?”
그 말을 들은 팀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진영은 진지하게 보험료가 또 오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