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55
제155화
임은혜는 화를 꾹 참고 서류를 늙은 변호사에게 건네줬다.
“고려 이머전시 원장 이동우는 람보르기니의 인공지능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 이의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어선 선창에 방치된 차량입니다. 판사님이 과연…….
패러리걸 로봇이 맥을 끊자 임은혜는 탕하고 책상을 두드렸다.
옆에 있던 김대현은 물론이고 바깥에서 이걸 지켜보던 중부서 형사들은 ‘워얼’하는 소리를 냈다. 얼굴이 귀여워서 그렇지 임은혜도 벌써 형사가 다 됐다.
“시끄럽게 하지 마. 다 말해 줄 테니까. 메인 인공지능 모듈은 누군가에 의해 분리되었지만 각 바퀴의 제어 인공지능까지 분리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임은혜는 도은주의 도움을 받아 람보르기니의 각 부 제어기능의 인공지능을 감식했다. 이 최고급 차량에는 조향이면 조향, 제동이면 제동 모든 계열에 각 전임 인공지능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현권은 물론이고 이동우는 제동 인공지능까지 제거할 시간이 없었고, 람보르기니를 받은 선장은 사건이 조용해지면 이걸 타고 다닐 생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이건 람보르기니에서 확인한 인증서입니다. 각 인공지능은 오염되지 않았다. 하여, 인공지능의 시뮬레이션은 신빙성이 있다.”
김상현은 언제 뽑아왔는지 람보르기니 측의 회신을 척하고 올려놓았다.
서장에 의해 스포츠카의 증거수집이 배제되기 한참 전 EV-1은 이미 각 제어 인공지능에 대한 감식을 마치고 바로 도은주 과장에게 분석을 맡겼다.
“어쩌나? 람보르기니와 우리가 신나게 싸우는 걸 지켜보려고 했을 텐데?”
이진영은 분석서를 인간 변호사 앞으로 내밀었다. 늙은 변호사는 지팡이에 턱을 올리고 문서를 보다가 패러리걸 로봇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영은 문서를 되돌려 받고 말했다.
“이 검증기록에 따르면 장현권, 너 수동운전 했드라?”
“그, 그건…….”
패러리걸 로봇이 잽싸게 장현권을 말렸다.
“일단은 과속으로 범칙금부터 납부하셔야지? 시속 3백 킬로미터로 외곽도로를 밟으셨다 이거야. 그리고 그때 눈이 존나게 오는 날이었지? 차가 뭔가에 미끄러지면서 거의 70미터를 밀렸어. 뭐 거기까지도 그렇다 쳐. 근데 이 제동기록에 따르면 뭔가에 타격하기 직전 넌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어.”
– 그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기록을 보라구.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좋아, 이브이. 이게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속도일까?”
– 아닙니다. 통상 인간의 브레이크 반응시간은 0.7초에서 늦어도 2.0초. 하지만 수동운전을 한 람보르기니는 3.07초 후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이진영은 손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시늉을 하며 일어섰다.
“하나, 둘, 셋. 끼이이이이이이익.”
이진영이 화이트보드 지우개를 장현권 앞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자 패러리걸 로봇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이진영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 둘, 셋. 끼이익. 변호사님? 이미 이거 방어 전술 짜고 오신 거 아닌가요? 빨리 퇴근하시려면 이거 장단 좀 맞춰 주세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늙은 변호사는 또 다른 패러리걸 로봇에게 눈짓했다.
– 지금 의뢰인이 음주운전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음주운전이면 다행이게? 김상현.”
바톤을 이어받은 김상현이 연설문을 낭독할 때처럼 흠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람보르기니에서 신종마약 에이펙스X가 검출되었습니다. 본청 마약단속국의 감식결과서 회신입니다. 어이, 장현권이 그래서 김민지와 함께 굴다리로 들어간 거지? 그건 웡꺼의 영역에서밖에 안 파는 물건이니까.”
– 억측입니다. 아직 신체 수색영장은 안 나왔고 의뢰인의 체내에서 마약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마약 성분도 다 사라졌을 테니 이제 와서 신체 수색영장을 신청해봐야 소용없었다. 그리고 음주운전이라고 해도 역시 장현권에게는 이미 방어논리가 있었다.
“기, 김민지가 운전했어. 걔, 걔가 이런 차 수동으로 몰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랬거든. 그래! 걔가 운전한 거야. 난 말야 그냥 조수석에서 걔 허벅지나 만지고 있었지.”
장현권은 이미 1팀과 함께 연습한 멘트를 읊어댔다. 처음에는 더듬거렸지만, 나중에는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턱까지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 들으셨죠? 김민지가 운전했다고 합니다.
“웃기시네, 김민지는 운전면허도 없어! 그 여자가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차를 운전했다고?”
참다못한 김대현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패러리걸 로봇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걸 확인할 의무는 형사님에게 있습니다. ‘불확실할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설마 현대 형법의 대원칙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김민지가 운전했다는 증거를 먼저 찾아오시고 입증부터 하시죠?
람보르기니의 드라이빙 카메라나 메인 인공지능 모듈은 분해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놈들은 장현권이 운전자라는 걸 경찰이 입증 못 할 거라 확신했다.
– 자 쟁점을 정리해 볼까요? 저희 의뢰인은 해당 차량의 책임자로서 동승자에 대한 구호의무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불행한’ 차량사고에 책임이 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따라서 의뢰인과 저희 G&C는 피고인을 즉시 체포상태에서 해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경위를 밝힐 것은 경찰 측에 강력히 요청하며 불법적인 체포로 인한 신체 손상 및 정신적 위자료를 청구할 것임을 밝힙니다.
패러리걸 로봇은 미리 준비한 문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 또한, 피의자로 전환된 장현권 의뢰인의 신상정보 및 경찰 측의 혐의사실이 언론에 공포되었을 경우에는 피의사실 공포죄로 고발은 물론, 징벌적 민사책임을 물을 것을 확언드립니다.
서장이 말한 대로 장현권은 김민지 살해를 비롯해 모든 혐의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장현권은 승리를 예감했는지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있지도 않은 수갑을 풀라는 시늉을 했다.
늙은 변호사가 지팡이로 쿵하고 바닥을 한 번 두드리자 오싹하게도 20여 대의 패러리걸 로봇이 일제히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러리걸 로봇의 방어논리를 짠 것은 바로 저 능구렁이 같은 늙은 변호사였다.
기본소득의 시대에 늙은 변호사가 끈질기게 살아남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패러리걸 로봇들은 순간적으로 판례검색이나 리걸마인드로 사건을 분석할 줄 알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정직’하다.
로봇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로봇의 거짓말로 인해 인간이 위험에 빠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로봇 3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오염되지 않은 모든 로봇은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책 없는 정직함은 경찰이나 검찰 로봇이라면 바람직한 거지만 의뢰인의 이득을 위해 때때로 사실을 숨기기도 해야 하는 변호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경찰 행정 로봇 패트나 매트였다면 교묘하게 운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는커녕 스스로 납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 자, 이제. 쟁점에 관한 의뢰인의 입장도 충분히 소명되었으니…….
“어이 깡통 아직 끝나지 않았어.”
– 뭐가 더 남았습니까? 지금 형사님들은 고려 이머전시의 혐의를 파악하고 김민지 살해의 진범인이 누군지 알아내셔야 하지 않습니까?
“진소홍.”
이진영은 진소홍이 남긴 반지를 턱하고 꺼냈다.
– 진소홍이 누구죠?
“실종된 웡꺼의 요리사의 딸.”
순간적으로 패러리걸 로봇은 이진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웡꺼의?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장현권 알지?”
이진영은 진소홍의 사진을 턱하고 책상에 놨다.
“김민지랑 창티엔에서 오후 4시까지 같이 있었다. 그리고 너랑 같이 마약에 취해 차에 탔잖아? 이 여자 어떻게 된 거지?”
– 추측성 유도심문입니다.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줄곧 미스테리였다고? 진소홍은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이 반지. 너한테 매달리려고 진소홍이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이었는지도 모르지. 그 대가로 공과대 학생회장이나 일식 요리사 아저씨는 눈탱이를 맞았지만 말이야.”
장현권은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차량 급정거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람보르기니가 급정거하면서 가드레일 근처에서 누군가를 들이받아. 그 사람은 누구지? 왜 거기 있었을까? 우리는 왜 누가 거기 있었는지 궁금했어. 너도 잘 알다시피 밤의 해안도로에 행인이 지나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가 있다면 차량의 동승자뿐이니까.”
–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돌돌이랑 우리의 최상훈 경감님께서 직접, 하루종일 무궁화호가 접안한 근처 해안도로를 샅샅이 뒤졌지. 그리고 이걸 발견했어.”
이진영은 람보르기니의 전조등 조각을 꺼냈다. 은색 전조등에는 피가 튄 자국이 남아있었다.
“세상에는 인과응보라는 게 있나 봐? 하필이면 이 조각이 튀어서 가드레일 지지봉 틈으로 쏙하고 들어가다니? 완벽하게 DNA가 보존된 핏자국이다. 이게 누구 피일 것 같아?”
아까 최상훈이 보낸 사진이었다. 이진영은 바로 이 전조등 조각과 감식 결과를 보고 장현권이 그날 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챘다.
장현권의 표정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난 아까 감식 결과를 듣고 이해를 할 수 없었어. 감쪽같이 사라진 진소홍의 혈흔이 왜 람보르기니 전조등에 찍혀 있을까? 도대체 1월 11일 오후 10시 30분에서 35분 사이에 해안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패러리걸 로봇 두 대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이진영의 앞을 막아섰다.
“진소홍은 그레첸의 고급 콜걸이었어. 알고 있었냐?”
“…….”
“나중에 들켰겠지. 어쩌면 1월 11일 그날이었는지 몰라. 김민지가 마약에 취해 나불댔든, 아니면 진소홍이 말했든. 어느 쪽이든 너는 격분했겠지. 나도 놀랐어. 서울대에 장래가 촉망받는 인공지능 설계학과의 학생이 콜걸이었다니?”
장현권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래서 벌칙으로 치킨 게임을 시킨 거야. 해안도로 한 쪽에 세워놓고 수동운전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치킨게임. 저쪽에서 람보르기니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진소홍은 눈 내리는 도로에 겁을 먹고 서 있었겠지. 하나, 둘, 셋.”
이진영은 3초의 시간을 세며 세 걸음을 걸었다.
“처음부터 브레이크 밟을 생각 없었던 거 아니야? 이해해 얼굴도 예쁘고 서울대생인 여자가 알고 보니 콜걸이라…… 배신감이 엄청났겠지. 결혼까지 생각했나? 그래서 죽인 거잖아? 김민지도 같이 죽이고.”
장현권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갑자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형사님 3류 영화 많이 보셨네. 그렇게 저를 긁으면 제가 알아서 ‘아이고 내가 그랬어! 내가아아!’라면서 막 있지도 않은 사실을 화가 나서 떠벌릴 것 같아요? 이거 왜 이래? 증거 없잖아? 내가 운전했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김민지가 냅다 밟아서 지 친구를 죽였는지, 아니면 진소홍이 왜 밖에 있었는지 내가 알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