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56
제156화
이진영은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놈을 쏘아봤다.
“좋아, 그럼 이건 그쪽 변호인도 인정하는 거죠?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수동으로 운전했고 마약에 취했는지 아니면 고의인지 브레이크를 안 밟았다는 거. 그 결과 바깥에 있던 진소홍이 타격을 받아 이렇게 피를 흘렸다는 거?”
늙은 변호사는 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면 고개를 끄덕거렸다. 증거가 나온 이상 이진영이 말한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 선배.”
이진영이 선배라고 말하자마자 장현권의 뒤에서 초췌한 차림의 전상영이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아아! 뭔 귀신인줄 알았네!”
장현권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던 변호사 양반도 움찔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전상영은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패러리걸 로봇조차도 취조실에 그가 들어 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저…….”
전상영의 이마에는 검댕이 묻어 있고 뺨은 발톱에 긁힌 자국이 길게 나 있다. 한쪽 손에는 압착붕대를 휘감았고 손가락에는 피 묻은 거즈가 붙어있다. 정상영의 꼴만 보면 무슨 지옥에서 괴물과 격투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죽을 뻔했어. 도사견이 그냥. 그 사육장의 개들이 아주 그냥 막 어그레시브하게 달려들어서.”
아니, 지옥에서 격투를 하고 온 게 맞았다.
44팀 팀원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자연 검사 등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선배, 찾은 거죠.”
빵끗.
전상영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음침한 얼굴에 과연 이런 표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막아아! 저거 빼앗아와! 이런 빌어먹을!”
서장실에서 역시나 코웃음을 치며 취조실 영상을 지켜보던 서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상영은 애완동물 이동케이지를 하나 들고 있었고, 우쭈쭈쭈 혀를 차며 케이지에서 개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개.
서장이 가장 먼저 찾으라고 한 개.
이동우 원장이 끔찍이도 아낀 개.
그리고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가진 운명의 개.
전상영이 꺼낸 개는 며칠 전 그가 잘못 데려온 개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딱 하나 차이점이 있었다. 먼저 온 개는 그냥 방울 목걸이가 달려있었지만. 이동우의 개는 ‘카메라 목걸이’가 달려있었다.
바로 스토커 연쇄 강간범 이명훈이 김민지의 애완견에 남겨진 영상으로 꼬리를 잡힌 것처럼 이동우의 개 역시 ‘어떤 영상’을 가지고 월미도 일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서장도 일이 이렇게 연결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웡꺼의 요리사가 온 걸 보고 급한 김에 이진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개를 찾아오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순차적으로 배당한 사건들이 공교롭게도 진소홍 실종, 김민지 살해 등으로 이어지면서 가장 처음에 내린 ‘개 수색 명령’이 결국 그의 목줄을 조르는 결정타가 되었다.
아마 이명훈 강간 사건이 없었다면 이진영도 개의 목줄을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동우의 자살 사건이 없었다면 그가 개를 기르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이 절묘하게 이어지며 이진영은 ‘개’에 뭔가 있다는 심증을 쥐게 되었다.
또한 전상영은 누가 뭐라건 오직 이진영의 명령대로 개만 줄기차게 찾았고 마침내 웡꺼의 개도살장에서 포메라니안 개를 찾아냈다.
사실 이진영도 호텔의 저속폭탄 설치에 관해 조언을 구할 때까지 전상영이 개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저 개를! 가져! 오라고!”
영문을 모르는 1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서장은 급기야 은색 리볼버에 총알을 장전하고 취조실로 뛰어 내려간다.
그러나 EV-1이 더 빨랐다. EV-1은 이동우의 개 목걸이에서 바로 영상을 하나 불러왔다.
영상은 이동우가 구급선 무궁화호에서 내리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눈이 억세게 내리는 날 무궁화호는 뻘밭에 정박하고 이동우는 응급구조사들과 함께 캐터필러가 달린 견인차를 몰고 사건 현장으로 다가간다.
그는 구조 현장에도 애견 ‘정식이’를 데리고 갔고 지금 모니터에 나오는 화면은 바로 정식이의 개 목걸이에 달린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었다.
정식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동우.
그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카메라에 잡힌다. 스포츠카의 운전석에서 비틀비틀 일어서는 장현권. 차량의 어둠에 가려져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 넌 왜 신고하고 지랄이야아아!
– 커윽, 오, 오빠 하지만 소, 소홍 언니.
– 너 시발 내가 사고 냈다는 게 알려지면! 왜 신고를 했냐고오오오오오오오! 이 창녀들이 미쳤나아!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 왜 신고했어!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
서장이 묻어버린 그 내용은 김민지가 중부서 상황실에 ‘교통사고가 났다. 진소홍이 많이 다쳤다’라는 신고 전화였다.
김민지가 멋대로 신고 전화를 했다는 것에 격분한 장현권은 마약에 취해 김민지의 목을 졸랐다. 이동우와 응급구조사가 급히 다가갔을 때는 김민지의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응급구조사와 의료 로봇들이 미친 듯이 김민지를 심폐 소생하려 했다.
그다음 장면은 이동우가 영상녹음모드에서 음성녹음모드로 바꿨고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빗속에서 틸트로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뻘밭을 처벅처벅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휭휭대는 바람 소리에 섞여 어렴풋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 그쪽…… 충분한 보상…….
– 하지만…… 죽었…….
– 우리가 알아서……. 우리 회사는…….
한 명은 이동우 원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호텔에서 작전을 지휘한 정보국 여자 요원이었다.
한국에는 미국처럼 시크릿서비스 기관, 대선후보까지 함께 경호하는 기관은 없었고 정보국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즉 언니야는 장동천의 신변을 보호하는 정보국 요원이었고 장동천의 사주를 받고 장현권 리스크를 어둠에 묻었다.
그 뒤는 개 목걸이를 끌러서 이동우가 직접 찍은 영상이었다. 목 졸라 죽은 김민지의 시체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그다음은 진소홍이었다.
– 원장님, 아직 살아있어요.
진소홍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의료 로봇의 처치로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이동우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살려달라며 북경어로 말했다.
찌우밍아. 찌우밍아. 차량과 타격하며 갈비뼈가 폐를 찔렀다.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찌우밍아라는 소리에 섞여 귀신의 원혼가처럼 들렸다. 카메라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이동우도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어, 어쩔 수 없어. 우, 우리가 살려면 버려야 해.
– 동영상은 왜 찍으시는 건가요?
– 혹시 또 모르니까. 정보국이라잖아? 보험 정도는 들어놔야지.
응급구조사, 살해되어 11팀에 배당된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우와 응급구조사는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진소홍의 발목에 스카프를 묶고 바닷속에 집어 던졌다.
첨벙.
인천 앞바다는 고요해지고 저 멀리 뱃고동 소리만 부우우웅 울린다.
이진영은 이를 악물고 카메라 전원이 꺼지는 걸 노려봤다. 그다음 영상은 개가 돌아다니는 영상이었다. 이동우 원장의 자택이었던 신흥동의 주택가를 나와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 난민 개장수에게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온다.
개는 3일 동안 오만 사람을 다 만나고 다녔고 심지어 개를 찾는 이효진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이진영은 파란만장한 개의 모험담을 거기서 끊었다.
“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캉.
늙은 변호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지팡이로 바닥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러리걸 로봇들은 일제히 변호사를 따라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랐다.
“두 번째군.”
변호사는 나가기 전 이진영과 44팀을 노려봤다.
“예, 매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쿠폰이라도 끊어드리겠습니다. 10번 방문하시면 한 번 져 드릴까요?”
변호사는 다시 한번 지팡이로 캉하고 바닥을 두드리고 바닥을 나섰다. 명색이 G&C의 변호사가 현장 경찰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다. 지긋지긋한 패러리걸 로봇들을 물리치고도 44팀은 아무도 환호성을 지르거나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씁쓸한 영상이었다. 장현권은 약에 취해 김민지를 죽였고, 이동우는 정보국의 압력을 받아 아직 살아있는 진소홍을 바다에 집어 던졌다.
“나, 나는 죽이지 않았어! 그, 그래 심신미약! 마약에 취해서 난 죽였는지도 몰랐다니까!”
– 원인에서 자유로운 행위 법리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새로 개정된 형법 조항으로 중범죄에 있어서 마약, 주취 등은 심신미약으로 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목을 조르는 장면이 증거로 나왔으니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우, 웃기지 마! 로봇! 난 죽이지 않았어. 않았다고오오오오오!”
이진영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유인환더러 치우라는 시늉을 했다.
“들은 건 다 들었고 저 새끼 시끄러우니 좀 재워라.”
“자 레드썬. 당신은 잠이 옵니다. 솔솔솔.”
뚱뚱한 학생회장도, 웡꺼의 조직원도 한 방에 잠재웠던 유인환의 특효 수면제 초크슬립이었다. 장현권은 팔을 허우적대다가 책상 앞에 털푸덕 엎드렸다.
이진영은 전상영에게 담배를 물려주고 천장을 쳐다봤다.
“자, 좋은 구경들 하셨으니, 일들 하셔야죠? 구자연 검사님? 그리고 이효진 팀장님?”
구자연은 동영상이 재생되었을 때부터 벌써 방 밖으로 나갔고 이효진은 어이없다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새끼나 저 팀이나 하나같이 도깨비 같은 새끼들만 몰려있군.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44팀이 멋지게 자력으로 장현권을 체포한 것도 그렇고 전상영이 끝내 개를 찾아내서 장현권의 범죄를 입증한 것도 그랬다.
이효진은 씹는 담배를 입 안에 넣고 물티슈로 검지손가락을 닦았다. 내사팀은 이효진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쟤 말대로 일들 해야지?”
“예, 팀장님!”
본청 내사 11팀 수사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제일 먼저 잡힌 건 서장이었다. 서장은 계단에서 리볼버를 쏘며 저항했지만, 경찰대를 졸업하고 수직 승진한 책상물림 출신이라 총알이 한 발도 맞지 않았다.
내사팀은 서장을 체포하고 이 일에 가담한 1팀, 그리고 신고를 받는 상황실장까지 전부 구속시켰다.
“니들 후회하게 될 거다! VIP가 바뀌면! 난 사면될 거라고오오!”
서장은 포승줄에 묶여 본청으로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제 서장과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의 운명은 뻔했다.
아직 토끼를 잡지도 못한 사냥개를 과연 누가 그냥 내버려 둘까?
이진영은 중부서 흡연장에서 서장과 1팀이 줄줄이 틸트로터에 실려 끌려가는 걸 노려봤다. 그 광경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EV-1이 이진영에게 말했다.
– 저 팀장님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봐.”
– 전상영 경사님이 그 개를 찾지 못했으면 어쩌시려고 했습니까? 경사님이 개를 찾았다고 말한 건 용의자를 확보한 직후였습니다.
“전상영 선배가 찾아낼 줄 알았어. 난 팀원을 믿으니까.”
EV-1은 전혀 미동도 없이 이진영을 바라봤다.
“라는 건 뻥이고. 그 개 목걸이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나도 까보기 전까지는 몰랐어. 플랜 B 정도는 있었지만.”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