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59
제159화
남색 치마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미인.
특히나 수수하게 화장했을 때와 달리 요새는 방송용 화장을 하면서 더더욱 꽃이 핀 것처럼 화사해 보였다.
“이세화 선배? 웬일이에요?”
“아, 선거운동 겸. 하객. 중부서 서장님과는 인연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 엥? 국장님은 또 왜?”
이민호 국장은 인형탈을 쓴 이진영을 보자마자 인상을 팍 구겼다.
“넌 임마 취임식인데 복장이 그게 뭐냐? 정복은 아니라도 좀 갖춰 입든가.”
“뭐 어때서요? 경찰의 자랑스러운 마스코트 아닙니까? 설마 국장님 경찰 마스코트가 부끄러우신 겁니까?”
이민호는 못 당해내겠다는 듯 담배를 든 채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바람에 담뱃불이 인형옷에 튀어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진영은 인형옷의 짧은 팔다리를 퍼덕이며 불을 끄느라 애를 먹었다.
“하하하, 여전하시네. 작년 생각나네요.”
이세화는 오랜만에 상쾌하게 깔깔 웃었다. 이진영은 진돗개 눈 밑에 검게 구멍이 뚫린 탈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너구리 굴 모임 회원이 세 명이나 모였네요?”
이민호는 그 말을 듣고 감회가 새로웠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기관을 초월한 협력으로 천도영 사건을 멋지게 해결해냈다.
이세화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두 대째를 피웠고 이진영도 뒤늦게 담뱃불을 붙였다.
“그…… 혹시 소식 들은 거 없냐?”
이민호는 주변 눈치를 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이세화도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이진영을 빤히 쳐다봤다.
“뭔 소식이요?”
“아, 거, 알면서.”
“에이, 국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내가 뭐 정보국에 끈이 있나 뭐가 있나?”
이세화는 실망한 표정으로 괜히 담뱃재를 톡톡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민호는 이진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소곤거렸다.
“야, 내가 모를 줄 알고? 연락했다메?”
“문자 한 통이 다였어요. 뭔 괴도 미남자라나?”
이세화는 뜻밖의 일격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괴도 미남자?
이 뻔뻔한 닉네임은 신희정이 말했다니 마냥 농담 같지는 않았다. 이진영은 짧게 정보폭탄으로 펜트하우스를 무력화시킨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마치, 따악 보고 있다는 듯이 제가 필요할 때쯤 연락하더라고요.”
“보고 있었다는 거네?”
“예, 국장님이 전에 말한 블랙 요원, 그 가설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침 세 명의 옆으로 누군가 지나갔고 이진영은 말을 줄였다. 하지만 이세화나 이민호나 신희정이 그냥 대책 없이 정보국에서 떨려난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신희정의 정보국 복직은 초읽기 단계였다.
취임식은 오늘 중부서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언니야’를 비롯해 장동천에 배팅했던 정보국 세력은 철퇴를 맞았고 현재 정보국 자체 내사 중이었다.
하지만 전에 이효진이 말한 대로 정보국은 절대로 자신들의 요원들을 사법기관에 맡기지 않고 내사에서 시작해서 내사로 끝난다.
내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장동천의 호위 임무를 맡았던 팀 전부가 물갈이되었고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에 관계된 모든 요원이 ‘숙청’되었다는 소문은 있었다.
인천 중부서의 묘한 사내 정치 마냥, 정보국의 권력다툼은 상상을 초월했다.
너구리 굴 멤버들은 제각각 신희정과 정보국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제 선거는 우째 된대요?”
침묵을 깬 건 이진영이었다. 뜻밖의 질문에 이세화는 잠시 머뭇거렸다.
현재 장동천이 진일수에게 피습을 당하면서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다. 장동천의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긴 했지만 죽은 장현권의 파렴치한 행각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때마다 장동천의 지지율은 출렁였다.
장현권은 대학교 1학년이었지만 엄연히 미성년자였고 놈의 페이스북이 털리면서 화려한 여자관계나 리스 회사를 통한 자동차 물갈이 등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요리사, 가수, 기본소득자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손을 댔고 그중에는 강간 혐의도 더러 있었다.
민족민생당에서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에게 무슨 험한 소리냐!’라는 컨셉 하나만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지금 이진영의 눈앞에 있는 이세화는 바로 그런 혼탁한 선거 상황의 다크호스였다. 장동천이 아들의 추잡한 추문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반면, 이세화의 과거가 대중들에게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었다.
딸을 납치사건으로 잃고 아동범죄 전담팀에 투신한 경력이나 담백한 그녀의 삶이 장동천, 장현권의 삶과 강렬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치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어린지라 아직 본격적인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보이고 있진 않았다.
“이진영 팀장님. 그 서류, 누가 보낸 걸까요?”
이진영도 EV-1과 함께 줄곧 알아보고 있던 문제였다. 내사번호 인천중부 057399라는 문서 수발신 목록을 보낸 사람은 분명 장현권 사건을 알고 있었고 그걸 두 명에게 보냈다.
한 명은 이효진. 다른 한 명은 이세화.
이효진에게 보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내사과의 사냥개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이동우의 개를 쫓았고 서장과 장동천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세화였다. 이 사건에서 가장 이득이 본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바로 대선 후보로까지 손꼽히게 된 이세화였다.
장동천은 아들의 스캔들로 몰락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에 대비되어 이세화의 주가가 올랐다.
문서를 보낸 놈이 그걸 의도했다면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은 없었다.
놈의 세력은?
그리고 놈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건 도대체 뭘까?
“이세화 선배, 호텔에는 레드 아리마가 있었어요. 장동천은 페어차일드가 좋아하는 후보라는 거죠.”
“그렇다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게 대통령 선거를 뒤흔들 목적이라는 건 알겠어요.”
이세화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내사번호 057399 사건은 민족민생당과 안보문명당의 운명을 뒤바꾼 번호가 되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의문의 문서를 보낸 사람이 누굴지 생각해봤지만 끝내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쾌활하게 말했다.
“아무튼, 이세화 선배 다음에는 최소한 국회에서 보게 되겠군요.”
“하하, 과찬의 말씀. 선거는 언제나 고개를 먼저 드는 놈이 지는 거죠.”
이진영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중부서 경찰관으로서 앞이 험난한 건 여전했지만 적어도 이 두 사람 앞에서는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자아, 그럼 저는 다시 마스코트 노릇이나 하러 가겠슴다.”
이진영이 진돗개 머리 부분을 뒤집어썼을 때였다. 이민호가 그의 팔을 붙잡고 그에게 속삭였다.
“너희 팀한테 맡기고 싶은 게 있어.”
이세화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손바닥을 펼쳐 두 분이서 말하라는 시늉을 했다.
“또 뭔 일인데 그래요?”
“송도 폭탄테러 있잖아? 그걸 파 봐.”
송도 폭탄테러?
하도 많은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이진영도 수첩을 보고 나서야 무슨 사건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왜요?”
“본청에서 너희 44팀에게 직접 사건 배당이 갈 거야. 러다이트 새끼들이 대규모로 테러를 기획하는 데 이게 한 축이 될 것 같아.”
이진영은 송도 폭탄테러 사건의 기록을 보며 그때 기억을 곱씹었다. 공과대 학생회장 이명훈은 민수용 로봇을 딥러닝해서 폭탄 운반자로 써먹었다.
처음에 이진영은 이명훈이 딥러닝에 관계했을 거라 예상했지만, 사실 소스 코드 제공자는 이명훈이 아니었다.
“도은주 과장한테 그 소스가 마이크로웍스 본사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그래 그거야.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마이크로웍스 물건들 위주로 말썽이 많이 터지고 있어.”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희정과 한 이야기는 아직 비밀이었고 특히나 이제 정치계로 떠난 이세화에게 ‘천수관음’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도은주 과장이 마이크로웍스 테러랑 관련이 있지 않겠냐고 말하긴 했습니다.”
“그래 내 말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아. 그래서 청장님을 비롯해서…….”
“로봇 테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거군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첩에 붉은 인덱스를 붙였다.
“정식 수사 지시는 취임식 직후에 떨어지겠군요.”
이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위에 뻗대거나 더 이상 사고는 치지 말고. 내가 카바 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임마.”
이진영은 씩 웃었다.
“아, 팰리셰이드 호텔 건은 어떻게 됐대요?”
이민호는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색이 5성 호텔 펜트하우스가 유리창도 박살 나고 계단이 걸레짝이 되었으니 경찰에 이만저만 항의를 한 게 아니었다.
호텔 차원에서 들어놓은 보험과 경찰보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경찰청은 없는 살림에 큰돈을 물어내야 했을 것이다.
“모쪼록 사고는 소소하게 치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세화 선배님에게 제가 계속해서 누를 끼치기도 했고.”
“하하, 난 괜찮아요. 당에서는 지랄이지만. 아무튼 팀장님 파이팅.”
이세화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우, 역시 미인이 응원하면 힘이 샘솟는다니까?”
이진영은 너스레를 떨며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자 과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까나?”
이진영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또다시 되지도 않는 팬터마임 흉내를 내며 익살맞게 재롱을 부렸다.
x에필로그1 블레이드
야간 당직을 서는 김상현은 증거번호를 매기고 사건을 종결처리하고 있었다.
피고인 장현권의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으니 수사 주체인 중부서 44팀에서도 종결처리하고 자료실 아카이브로 각종 자료를 넘겨야 했다.
이 자료들은 얼마간의 보존기한이 지나면 그마저도 디지털 감식자료를 남기고 폐기한다.
“패트, 이제 다 끝난 거 아닌가?”
– 예, 나머지 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김상현 경사님은 그것만 마무리하시고 퇴근하시면 됩니다.
경사. 김상현은 확인자 란에 쓴 경사라는 자신의 계급을 보고 씁쓸하게 말했다.
“아, 빌어먹을 서장만 보내지 않았어도 나도 이번에는 경위 되는 건데 말이야.”
장현권이 진일수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44팀 전원은 1계급 특진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사사건으로 덮으려 한 서장의 추한 행보를 밝혀낸 건 분명 공이긴 했지만, 경찰청 입장에서는 어째 썩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거기의 피고인까지 사망하면서 44팀 팀원들의 포상은 붕 뜬 채 그냥 흐지부지되어버렸다. 거기에 다른 팀들이나 경찰 내부의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
특히나 내사 11팀, 개코 스트리퍼와 손을 잡은 건 여러모로 뒷말이 많았다.
동료 형사들조차 44팀이 이효진과 손을 잡고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걱정해서 함부로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이 빌어먹을 업무량이나 줄어들었으면 좋겠네. 패트, 전학생 읎대냐?”
– 행정망으로는 별다른 인사발령은 없습니다.
김상현은 44팀이 일주일 동안 해결한 사건 목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쳤지. 이렇게 죽여주게 해결했는데도 하다못해 금일봉도 안 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