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일단 관광객 피살사건의 용의자 ‘푸만추’를 체포한 걸로 미대사관에서 감사장이랑 자연육 한우 선물 세트는 왔었다.
그게 다였다.
44팀이 해결한 모든 사건들은 장현권 사건에 묻혀 흐지부지되었다.
특히 유인환은 연이은 범인 체포로 승진이 마땅했지만, 승진은커녕 아직도 육공에 불려 다녔다. 아직도 육공은 경찰대 출신인 유인환이 혹시나 러다이트계와 짠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저놈의 학내 점거는 언제나 끝날지.”
장현권 스캔들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서울대는 과격 러다이트계 학생회에 점거되어 있었다. 오히려 장현권 사건 때문에 각 공안 3사의 역량이 분산되면서 학내 진입은 아직도 요원해 보였다.
김상현은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문서를 정리했다.
“어이 매트, 이거 11팀 사건 아니냐?”
– 아, 고려 이머전시 응급구조사 살해사건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쪽으로 병합되면서 서류가 넘어왔습니다.
“하이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일하기 싫어가지고 잔꾀만 많다니까?”
원래 고려 이머전시의 한 응급구조사 살해사건은 11팀 것이었지만, 11팀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44팀에 냉큼 그 사건을 떠넘겼다.
어차피 고려 이머전시 원장 이동우의 자살 강요와 직원들의 잇따른 죽음은 정보국에 의해 모두 이첩처리 되었다. 정보국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사건 기록 대부분을 멋대로 가져갔고 김상현은 뼈대만 남은 문서들을 그냥 종결처리 하고 있었다.
김상현은 심심풀이 삼아 11팀에서 넘긴 초동수사나 각종 기록들을 훑어봤다.
“뭐야 이건? 칼날에 베였다고?”
그는 야식을 으적거리며 종이 서류를 넘기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야를 비롯한 정보국 요원들은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고려 이머전시 응급구조사들을 죽였다.
“매트, 이거 고려 구급 다른 사건 파일 볼 수 있을까? 다른 구조사가 죽은 거 말이야?”
– 11팀의 초동수사 서류 외에 다른 서류들은 전부 정보국에서 회수했고 봉인했습니다.
“국가 안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시발, 장현권 같은 놈의 범죄가 무슨 놈의 국가 안보야? 그냥 부모 잘 만난 패륜아 놈이지.”
‘잘 죽었다.’
김상현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는 그런 여론이 많았다.
그는 다시 초동수사 보고서를 읽었다.
“목의 자상은 단순히 칼날에 베인 것이 아니 특수한 형태의 블레이드로 추정된다. 살이 고주파에 뭉개져 있고 그로인한 마찰 화상흔적까지 있다고? 이런 종류의 칼날이 있었나?”
– 검색해 볼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그냥 나도 심심해서 읽은 것뿐이야. 아무튼 매트 이것도 종결처리하고 정보국에 넘겨줘.”
김상현은 종이 파일을 매트에게 넘겼다.
김상현도, 이진영이나 EV-1도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11팀의 초동 수사보고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정보국에 넘겼다.
응급구조사 한 명의 목에 남겨진 칼날의 상흔. 그것은 바로.
일곱 명의 특별병과번호 중 한 명이 남긴 흔적이었다.
x에필로그2 제리 고 라운드
공 모양(球形)의 철창 구조물. 그 안에서는 로봇 두 대가 치열하게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롤러대시가 공 모양의 철창을 박차고 이동하면서 오렌지색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철창 구조물에 불꽃이 튀는 걸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제각각 로봇의 이름이 쓰여진 배당권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 모양의 철창은 이 시대의 콜로세움이었고 그 안에 있는 두 대의 로봇은 검투사였다.
로봇들은 미사일이나 총 같은 투사병기가 아니라 오직 파일벙커나 히트 블레이드같은 근접병기를 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공 모양의 콜로세움 안에는 상하좌우가 없었고 상대가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예측 불가능했다.
롤러대시로 철창 벽을 타고 달리면 원심력에 의해 공 모양 안쪽에 거꾸로 붙어서 질주할 수도 있고 그걸 피하기 위해 수평으로 뱅글뱅글 돌 수도 있다.
수직으로 올라갔던 로봇이 공 안쪽 천장에서 발을 구르자 아래로 내리꽂힌다. 순간 어마어마한 온도로 가열된 히트 블레이드가 아래에 있던 로봇의 팔을 단숨에 잘라 버렸다.
두께만 50센티미터가 넘어가는 팔이 히트 블레이드에 잘리고 단면에 불이 붙어 횃불을 집어던지는 것처럼 날아다닌다.
팔이 잘리고 관객들의 함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침 잘린 팔에는 유일한 무기인 파일벙커가 달려있었고 로봇은 ‘쥐새끼’처럼 그저 히트 블레이드를 장비한 로봇을 피해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팔을 잃은 로봇은 히트 블레이드를 장비한 로봇보다 체급이 작았다.
히트 블레이드는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 배터리를 지탱하기 위해 체급도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팔을 잃은 로봇은 민첩하긴 했지만, 공 모양의 링 안에는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로봇 한 대가 궁지에 몰리는 걸 보고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또다시 히트 블레이드가 붉게 달아오르고 중형(中刑) 로봇은 소형 로봇의 허리를 가를 기세로 달려들었다.
땅땅땅.
그러나 아쉽게도 공이 울리면서 라운드가 끝났다. 위기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소형 로봇은 롤러대시로 공 모양 콜로세움의 양옆에 있는 코너로 되돌아갔다.
로봇이 코너로 되돌아오자마자 정비 로봇이 잘린 팔의 어깨 부분에 드라이버를 꽂아 넣고 드르륵 너트를 분리했다. 아직도 불이 붙은 잘린 팔이 퉁하고 떨어져나오고 그곳에 새로운 팔을 붙였다.
“아직 20초! 액츄에이터 조절은 됐어! 파워로더 조절하고 도어노커의 잔탄을 채워 넣어!”
로봇이 정비를 받는 모습은 옛날 F-1 머신의 타이어를 갈고 긴급정비하는 장면하고 비슷했다.
로봇은 버기카처럼 범퍼프레임이 달린 오픈프레임이었고 게임의 재미를 위해 모든 부위를 장갑으로 감쌀 수 없었다.
또한 링 안으로 들어오는 로봇들은 각 체급에 따라 일정한 무게 이상의 장비를 장착할 수 없었다.
만약 체급이 5백킬로그램 급이라면 그 한도 내에서 롤러대시에서 공격무기까지 전부 다 착용해야 했다. 심지어 어떤 기형적인 로봇은 두 바퀴에 파일벙커 그리고 화염방사기를 단 채 출전하기도 했다.
무게만 지키면 OK.
이것이 지하 로봇 격투장의 유일한 룰이었다.
그러나 그 룰은 오늘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이 경기는 각 로봇 격투의 체급을 상관하지 않고 맞붙는 핸디캡 매치였다.
격투 로봇도 프레임 적재 한계가 있다. 아무리 체급을 늘려 상대편과 무장 상황을 맞추려고 해도 구동부나 배터리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때문에 팔이 잘렸던 소형 로봇은 도어노커 잔탄을 열 발밖에 못 실었다.
아니, 로봇의 주인은 이 로봇의 강점이 뭔지 잘 알고 있었고, 원래 무게에 비해 더 많은 무장이나 장갑판을 장비하지 않았다.
이 로봇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스피드형 로봇이었다.
“제리! 내 말 잘 들어! 이건 핸디캡 매치야! 어차피 네가 죽지만 않으면 우리는 돈을 번다고!”
제리, 오래된 만화의 쥐 캐릭터. 안 그래도 로봇이 어깨에는 만화 제리의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리, 넌 제리야! 잽싸게 빠지고 도망치다가 한 방 먹이면서 저 병신같은 톰을 압도해야지! 잊지 마라, 제리!”
– 예, 주인님. 빠지고 도망치다가 한 방.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불리했다. 제리의 주인은 체급 차가 나는 핸디캡 매치를 받아들였다.
상대편 로봇 ‘무사시보(武蔵坊)’는 제리보다 5백 킬로그램이나 더 나가는 미들급 로봇이었다. 제리는 아무리 잘 쳐줘야 밴텀급이었고, 이 5백 킬로그램의 숫자는 단순히 무게가 무겁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무사시보의 히트 블레이드는 배터리 소모가 많긴 했지만 제리가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단 한 방에 제리의 몸을 두동강 낼 것이다.
무사시보의 세컨드는 건너편 코너의 제리를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무사시보도 과열된 배터리를 다시 새 걸로 교체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구동계나 동력부에 큰 문제는 없었다.
반면 제리는 무사시보의 공격을 피해 다니느라 로봇이 근육이랄 수 있는 액츄에이터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약 30초간의 시간으로는 과열된 유동액들을 교체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무사시보에게 따라잡혀서 청룡도 모양의 히트 블레이드에 양자두뇌까지 두 동강 날지 몰랐다.
만약 이것이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정식 프로게임이었다면 로봇을 완전 파괴하는 건 금지였다. 하지만 지금 제리가 뛰고 있는 R-3 리그는 쎄잉꺼가 후원하는 지하도박장 격투였다.
정비를 다 마치자 제리의 세컨드 김용기는 제리의 카메라 헤드를 수건으로 닦았다.
제리는 소형급이지만 인간보다 1.5배는 컸다. 카메라 헤드만 해도 거의 무슨 소대가리만큼이나 컸다.
“제리, 난 널 믿는다.”
– …….
제리는 찰칵찰칵 카메라 헤드의 조리개를 작동시키며 주인의 표정을 읽었다. 주인의 포켓 주머니에는 제리의 이름이 박힌 도박 복표가 가득 꽂혀 있었다.
흥행사는 김용기와 제리가 저체급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핸디캡 매치를 제안했고 빚에 쪼들리고 있는 김용기는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리, 넌 내 아들이다. 내 모든 걸 가르쳐줬어. 그러니 넌 지지 않아. 저 개자식을 이길 거다.”
– …….
제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 로봇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김용기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땡땡땡!
다시 한번 공이 울리고 제리와 무사시보는 쏜살같이 공 모양의 콜로세움으로 뛰어나왔다.
– 아, 무사시보! 이제 그냥 경기를 끝내려나 봅니다! 칼을 길게 잡았어요!
무사시보는 수평으로 방향을 꺾으면서 히트 블레이드의 자루를 길게 잡고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공 모양 철창의 바닥으로 달려오던 제리의 머리 위로 시뻘건 블레이드가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제리는 이종격투기 선수였던 김용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 로봇은 블레이드를 피하면서 히트 블레이들을 왼손으로 잡았다.
– 아 제리!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미쳤나요! 블레이드를 친 손이 잘립니다아아! 칼날이 제리의 어깨를 찌릅니다아아!
제리의 왼쪽 반신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그러나 아직 제리의 푸른 카메라 헤드는 꺼지지 않았고 제리는 칼날에 몸 반토막이 잘려 나가면서도 위로 팔을 뻗었다.
펑!
화약식 파일벙커가 격발되면서 황동색 탄피가 옆으로 튀어 나갔다. 제리는 몸의 반을 버리고 오른손의 파일벙커로 무사시보의 헤드를 박살 냈다.
순간적으로 메인 카메라를 잃은 무사시보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제리는 칼자루를 발로 디디면서 수직으로 치솟아 오르며 무사시보의 비대한 배터리에 다시 한번 파일 벙커를 꽂아 넣었다.
파캉!
초합금 말뚝이 무사시보의 배터리에 박히고 어마어마한 전류가 파일벙커를 타고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제리는 화약식 분리기구를 터뜨려 오른팔까지 분리했다.
이판사판이었다.
제리는 두 팔을 다 잃었고 만약 무사시보가 멈추지 않는다면 남은 2분의 시간 동안 쫓겨 다녀야 했다.
제리는 이름답게 뒤로 잽싸게 물러섰고 무사시보는 히트 블레이드를 달구며 제리를 뒤쫓았다.
톰과 제리의 한 장면처럼 두 로봇이 공 모양 철창의 천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을 때.
제리는 동작을 멈췄다.
베어 볼 테면 베어보라는 태도였다.
그리고 무사시보의 붉은 히트 블레이드는 더 이상 붉게 달아오르지 못했다.
툭.
제리의 어깨를 칼날이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무사시보의 움직임이 멈췄다. 배터리가 모두 방전되면서 무사시보는 제리의 앞에 멈춰 섰다.
“제리이이이이이!”
김용기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철창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사방에 도박 복표가 눈가루처럼 흩날렸다.
김용기와 제리는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승리자였다.
오늘만큼은.
넘버즈
4부 내사번호 057399,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