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1
제161화
5부 처리번호 나G 8859213
인공지능 및 로봇의 폐기에 관한 규칙
제 13조-인공지능, 로봇 등 자동무인화 장치를 파괴할 때는 본 규칙의 정한 곳에서 폐기하여야 한다.
제 18조 ①인공지능, 로봇 등 자동무인화 장치를 폐기할 때는 반드시 산업우주부에 폐기업체의 폐기필증을 납부하여야 한다.
②인간을 상해하거나 살해한 인공지능, 로봇, 자동무인화 장치는 경찰관 입회하에 물리적 폐기조치를 시행하며 폐기조치된 인공지능의 고유번호를 기록한다.
x1 브레이브 앤 제리
월미도 난민지구의 아침이 밝았다.
아직 5월밖에 안 됐지만, 아침부터 푹푹 찌는 것이 오늘도 여름 뺨치게 더울 것 같다.
남자는 더위 때문에 잠에서 깼다.
“시발 에어콘 또 고장이네.”
남자는 더러운 침대에서 일어나서 에어컨을 두들겨봤지만, 곰팡내 나는 냉각수만 줄줄 흐를 뿐 에어컨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담배.”
그는 담배를 찾기 위해 침대 주변을 뒤졌다.
“아야!”
“어 쏘리. 아 광동어로 해야 하나? 뙤이음쥐.”
남자는 담배를 찾다가 그만 여자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눌렀고 여자는 광동어로 신경질적으로 뭐라뭐라 그러다 다시 창문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며 잠을 청했다.
남자는 이불 밑으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를 바라보며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어제는 주머니 사정이 좋아서 제법 좋은 여자를 꼬셔서 같이 잘 수 있었다. 그는 괜히 여자의 종아리를 쓰다듬었지만, 여자는 파리가 달라붙은 것처럼 다리를 바르르 떨어서 그의 손을 털어낸다.
“쳇, 닳는 것도 아니고.”
그는 담배를 찾아 드르륵 먼지 낀 창문을 열었다. 차라리 창문을 닫아놓는 것이 훨씬 더 시원해 보인다.
바깥은 전기선, 통신선 등 온갖 배선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바람도 잘 들지 않았다. 전기선이나 통신선은 링로드에서 이어진 궤도 태양광 발전의 배선을 무단으로 끌어다 쓴 것이다.
궤도 엘리베이터의 지선인 링로드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도 난민지구의 많은 집들은 그 혜택을 맛봤다. 정작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기세에 전전긍긍하는 걸 생각해보면 꽤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남자는 담뱃불을 붙이며 하늘에 후우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연기 너머 길 건너에 번체자로 쓰인 ‘롱횅싸우나’의 간판이 낮인데도 환하게 비치는 게 보인다. 간위예 전쟁 때 홍콩에서 직접 떼온 저 간판은 여전히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롱횅싸우나 밑은 KFC 신간척 지점이었고 아침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술을 마시며 치킨을 먹고 있었다.
이곳은 낮이 없다.
아침이 되어 태양이 떠도 거대한 링로드 구조물 때문에 희미한 회색의 어둠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젠가 북극에서 본 백야를 보는 것 같아 이 시간 이 풍경을 꽤나 좋아했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 ‘김용기’의 월셋방은 바로 굴다리에서 가까웠다.
그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이었고 아직 기본소득 수급자였다.
때론 기본소득 수급자들이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월세를 못 이겨 방벽 바깥에 월셋방을 잡기도 했지만, 김용기가 이곳에 있는 건 월세 때문은 아니었다.
“흐흐흐흐, 어제처럼 이기면 소드 타워에 가는 것도 일도 아니야.”
그의 방에서는 저 멀리 햇빛에 반짝이는 초고층 아파트 소드 타워가 보였다.
저 빌딩의 진짜 이름이 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월미도 굴다리에서 소드 타워는 정말로 장검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답게 비쳤다.
김용기는 소드 타워를 보며 ‘언젠가는 저기서 살 거다’라고 매일 다짐하듯 말했다.
위이이잉.
파리가 날아다닌다. 침대에 누워 있던 난민 여자가 파리에 진절머리 났는지 창문을 닫는 시늉을 하며 광동어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야오스 짜이 나알.”
어차피 방안에는 훔쳐 갈 것도 없었다.
김용기는 서툰 북경어로 열쇠가 저기 있으니 알아서 잠그고 나가라고 말했고 여자는 베개에 머리를 박은 채 손을 들어 어서 꺼지라는 시늉을 했다.
김용기는 바지를 꿰어 입고 티셔츠를 입었다. 그는 키가 167센티미터로 작은 편이었지만 근육이 다부져서 전혀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옷을 대충 입고 나가기 이 방에서 유일하게 금빛으로 빛나는 물건인 전국체전 금메달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 후 문밖으로 나섰다.
전국체전 권투 밴텀급 금메달.
그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명함도 못 내미는 판에 전국체전 금메달 따위야 누가 알아줄까?
그를 아는 친구나 지인들은 술자리에서 그걸로 늘 놀렸다.
“嘿! 你重係冇食早餐啦? (아직 아침밥 안 먹었지?)”
“아니, 괜찮아! 밥 안 먹어도 배불러!”
김용기는 밥을 먹는 시늉을 하며 홍차를 타는 노점상인에게 말했다.
노점상인은 그가 왜 신났는지 알고 있었고 검지와 엄지를 비비면서 ‘돈 좀 벌었구나!’하고 김용기를 약 올렸다.
김용기는 무대 인사하는 연극배우처럼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서 씩 웃었다. 그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서서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슉슉.
잠시 멈춰서서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모습을 보면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복싱선수들의 루틴인 로드웍을 하고 있다.
권투는 오래전에 은퇴했지만, 그는 아침에 로드웍을 하지 않으면 영 개운하지 않았다.
그는 말은 잘 안통했지만 난민들과 친했고 그가 로드웍을 하는 걸 보고 오렌지를 툭하고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김용기는 ‘떠제(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그의 일터로 향했다.
일터?
그냥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는 기본소득대상자였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소위 ‘나종보험’ 보장 직업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시장 거리가 끝나고 김용기는 세탁소 거리를 지나 공장 거리로 향했다.
이곳의 치안은 굉장히 안 좋았지만, 김용기는 ‘체잉꺼(青哥)’ 패거리와 좀 아는 사이라 걱정할 건 없었다.
막 내걸린 커다란 소가죽 뒤로 온갖 잡동사니가 늘어서 있는 두꺼비 상가 안쪽이 나왔다.
그는 90년대 물건으로 가득한 두꺼비 상가를 둘러본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인상적인 진품 패미컴과 브라운관 TV에서 슈퍼마리오 1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는 잠시 넋 놓고 슈퍼마리오의 점프를 바라봤다.
이런 물건들은 인공지능 시대가 되고 더더욱 구하기 힘들어졌다. 지금도 인공지능이 만든 A급 게임이 쏟아져 나왔지만, 사람들은 역으로 사람이 만든 게임들을 찾아 헤맸다.
그는 한동안 난민 꼬마가 게임하는 걸 바라보다 좀 더 안쪽으로 걸었다.
이곳은 없는 게 없었고 특히나 굴다리에서 가까운 쪽에는 중장비나 로봇 부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이! 오늘 물건은 어때?”
“冇好嘅. 哦,以前, 你講願意機器人嘅動力電池呢? (좋은 게 없어. 아, 그러고 보니 너 전에 로봇 동력 배터리 필요하다 그러지 않았나?)”
“어! 배터리 들어온 거야?”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USSF(United States Space Force) 마크가 찍힌 신품 배터리팩을 보여줬다.
김용기는 씩 웃으면서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로봇, 엑소슈트용 배터리를 어루만졌다.
“게이떠친.”
“最小也五千美貨? (최소한 5천 달러는 줘야지?)”
“5천 달러라고? 지랄하네. 이거 군용품 빼돌린 거잖아? 웡꺼 아니면 나 같은 로봇 격투꾼밖에 더 사? 싸게 해줘.”
상인은 마지못해 손가락 네 개를 펼쳤고 김용기는 손가락 세 개를 펼친다.
“三點五? (삼쩜오?)”
“쌈딤이응?”
“你眞係好吝嗇, 三點二五. 但係現札. (진짜 인색하구만. 삼쩜이오, 대신 현찰로.)”
“현찰이라고? 어… 그럼 반만?”
김용기는 어제 딴 돈에서 1백 달러 지폐를 돌돌 말아 고무줄로 묶은 걸 꺼냈고 고무줄을 풀자마자 부품 상인은 잽싸게 돈을 빼앗아갔다.
3천 2백 달러면 꽤 큰 돈이었지만 김용기는 어제 딴 돈을 아낌없이 냈다.
“제리는 말이야. 이것만 달면 정말 날아다닐 거야 히 윌 플라이!”
김용기가 검지와 중지로 사람이 붕 하고 날아오르는 시늉을 하자 상인은 그냥 코웃음만 쳤다.
로봇 도박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용기는 스스로 로봇을 트레이닝 하는 세컨드이자 도박꾼이었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도박이자 스포츠는 바로 로봇 격투였다.
권투나 이종격투기가 사양길에 접어든 것도 바로 이 로봇 격투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로봇 격투는 인간들의 격투기 경기보다 몇 배는 더 자극적이었다.
상대편 로봇의 목이 날아가고 팔이 뜯어져서 마치 피처럼 붉은 유동액이 카메라에 흩뿌려진다.
인간들은 자신의 폭력성을 로봇에게 투영해서 로봇이 잔인하게 당하면 당할수록 열광했다.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로봇 격투도 잔인한데 더군다나 체잉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로봇 격투는 한층 더 잔인했다.
사람과 비슷하게 인간의 스킨을 씌운 로봇들끼리 싸우거나 홀딱 벗은 여성의 몸을 한 로봇들끼리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했다.
김용기는 바로 그런 체잉꺼의 로봇 리그 R-3 리그에서 돈을 벌고 있었다.
R-3 리그라지만 이 리그는 정석적인 로봇 격투에 가까웠고 공중파에 방영되는 R-1 리그처럼 로봇의 무게별로 체급이 나뉘어 있었다.
로봇은 마치 복싱의 체급처럼 무게에 따라 각각 헤비급부터 모스키토급까지 출전할 수 있었다.
굳이 로봇에 무게 제한을 걸어둔 이유는 인간들의 격투기처럼 선수 보호 차원은 아니었다. 순전히 관객과 도박꾼들의 흥미를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김용기의 로봇 ‘제리’의 체급인 밴텀급은 최대 5백 킬로그램의 무게 제한이 달려 있고 5백 킬로그램 안에서는 그 어떤 무기도 장착할 수 있다.
파일벙커, 화염방사기, 강산성 부식액. 온갖 창의적인 무기들이 로봇 격투에 동원된다.
그러나 무기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었다.
무게 배분을 잘 하지 않으면 로봇은 방어력이나 기동력에 영향을 받는다.
5백킬로그램의 한정된 무게를 어디에다가 투자할 것인지 어떤 무기를 선택할 것인지 그것이 바로 R 리그의 묘미였다.
김용기는 R-3 리그의 페넌트가 펄럭이는 로봇 행거로 들어왔다. 행거 안에는 연습용 링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복잡한 전선으로 연결된 그의 로봇 선수 제리가 앉아 있었다.
제리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공기관용 오픈프레임 로봇과 닮았다. 휴머노이드 로봇답게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손가락은 없었고 벙어리장갑 같은 아이언피스트가 달려 있다.
아이언 피스트뿐만 아니라 제리의 안쪽의 부품들은 전부 로봇 격투에 맞게 세팅되어 있었고 어지간한 공격 로봇 저리 가라 할 만한 성능을 뽑아낼 수 있었다.
특히 제리는 팔에 화약추진식 파일벙커가 달려 있었고 그걸 교묘하게 사용해서 다른 로봇을 무력화시키는 게 특징이었다. 김용기는 그걸 ‘스트레이트’라고 불렀다.
“어이, 미케닉. 우리의 챔피언은 어때?”
“어, 왔냐?”
로봇 정비사 ‘서(徐) 씨’는 로봇 주인인 김용기를 보고도 본체만체 열심히 제리의 정비에 여념이 없었다.
제리는 어제 체중 차가 두 배나 나는 ‘무사시보’와의 핸디캡 매치에서 몸 반쪽이 히트블레이드에 날아가는 대신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제 로봇 반쪽이 날아갔으니 정비사가 할 일이 태산이었다.
서 씨는 히트 블레이드에 날아간 로봇의 쇄골 프레임을 갈고 목뼈 프레임에 연결했다. 김용기는 옆에 앉아서 제리의 반쪽 몸이 복구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김용기는 가만있는게 좀이 쑤셨는지 쉐도우 복싱을 하다가 제리의 가슴장갑에 주먹을 댔다.
“어이, 제리, 마이 파트너. 기분은 어때?”
– 손상된 부품을 교체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새 배터리가 들어왔으니 그거 교체하면 기분이 더 좋아질 거야. 우리 선수 어제는 정말 잘했어.”
– 감사합니다. 주인님.
“에헤이. 주인님이 아니라니까? 넌 내 선수고, 난 네 코치야. 코치라고 부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