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3
제163화
“제리는 태그매치를 해본 적이 없는데요?”
로봇 격투는 프로레슬링처럼 때론 로얄럼블로 한 대의 로봇이 다수의 로봇을 상대하거나 두 대의 로봇이 함께 팀을 먹고 싸우는 경기도 있다.
흥행만 된다면 사람들은 거의 모든 시합방식을 로봇 격투에 적용했다. 말하자면 로봇 격투는 이 시대의 검투 경기였다.
남자는 태그매치를 생각하고 있는 김용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아마 빅게임의 자세한 내용을 아시게 되면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건 격투라기보다는 레이스니까요.”
“레이스요?”
김용기는 한층 더 알쏭달쏭한 표정을 남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남자는 그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김용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가 차찬탱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수상쩍은 제안에 수상쩍은 남자였다.
“제기랄,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체잉꺼의 수금원은 다음 달에 제리를 가져가겠다고 못 박았다. 위험한 일이든 뭐든 김용기는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침 나온 국수를 후루룩 물 마시듯 허겁지겁 먹고 로봇 행거로 돌아갔다.
* * *
남자의 예언은 맞았다.
오후가 되자 두꺼비 상가 전체에 쎄잉꺼가 후원하는 ‘빅레이스’ 이야기가 나돌았다. 쎄잉꺼는 조직폭력배였지만 번듯한 우주 개발기업의 사장이기도 했다.
쎄잉꺼의 성망개발공사(星網開發公司)에서는 언제 준비했는지 포스터까지 만들어서 굴다리에 도배했다. 포스터의 중앙에는 R-1 리그 절대강자 짜르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고 양옆에는 기라성 같은 R-1 리그 로봇들이 찍혀 있었다.
R-1 리그 로봇들이 참여하는 것도 의외였지만 참가 자격은 더 의외였다.
[체급 무제한, 자격 제한 없음]즉 관공서용 공공 로봇이나 가사로봇이라도 협회에 신청만 하면 참가할 수 있었다.
정신 나간 건 참가 자격뿐만 아니었다.
[상금 천만 달러]“천, 천만 달러라고?”
포스터 가장 위에는 달러가 쌓여 있는 유리박스가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규칙도 간단했다. 쎄잉꺼의 영역인 폐차장에서 시작해서 방벽 안쪽의 반환점을 돌아서 다시 폐차장으로 돌아오면 된다.
“어떻게 되든 1등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되네? 그럼 자동차형 로봇이 최고 아닌가?”
“멍청한 새끼. 자동차면 공격을 어떻게 막으려고? 짜르의 고주파 펀치 몰라? 아마 출발하자마자 다 박살 날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게임이 진행될지 멋대로 예상했다.
또 어떤 사람은 벌써부터 성망개발공사에 신청서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작년부터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로 경기가 침체되어 있던 월미도가 이 ‘캐논볼 레이스’ 덕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서 씨는 마침 정비행거 앞에도 붙은 포스터를 바라보며 김용기에게 말을 걸었다.
“캐논볼 레이스. 나갈 거야?”
“어, 물론이지.”
“이길 수 있겠어? 제리로? 제리는 경량급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투자를 받아왔다고.”
“투자 같은 소리 한다.”
“진짜야. 1억짜리 스폰서인데 반은 물품으로 반은 현찰로 준대.”
서 씨는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김용기를 바라봤다.
“그거 또 위험한 거 아니야? 너 체잉꺼 돈 함부로 끌어썼다가 아까도 지랄 났었잖아?”
“그러니까 더더욱 위험한 다리라도 건너야지? 백억 원이라고? 백억 원이면 소드타워에 들어가는 것도 꿈이 아니야.”
“흥, 소드타워, 소드타워 이젠 귀에 딱지가 앉겠다. 그리고 백억 따기 전에 제리가 박살 나면 넌 체잉꺼에게 끌려가서 죽을지도 몰라.”
서 씨의 말이 맞았다.
“걱정 말래두? 그리고 이건 경주잖아? 제리의 스피드라면 충분히 R-1 리그 헤비급 놈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거야. 녀석은 제리처럼…….”
“재빠르니까. 근데 같은 만화에 쥐 캐릭터라면 차라리 스피디 곤잘레스가 낫지 않겠어? 이하, 이하, 아리바 아리바.”
서 씨는 만화 스피디 곤잘레스의 흉내를 내면서 다시 제리 정비를 하러 갔다.
* * *
의문의 스폰서에게서 부품지원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저녁 8시가 될 때쯤 근육질 사내와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사원’이 아까 말한 액츄에이터와 유동액을 가져왔다.
“어? A급 신품인데?”
서 씨는 유동액 등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로봇의 피에 해당하는 유동액은 등급이 여러 가지가 있었고 남자들이 가져온 유동액은 군납용 최고급품이었다.
제리는 그동안 저렴한 재생 유동액을 쓰고 있었고 신품으로 교체하는 건 처음이었다.
김용기도 비닐 포장된 신형 액츄에이터와 그 옆에 있는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호버대시입니다. 캐논볼 레이스가 폐차장의 늪지대를 통과한다니 필요하실 거예요.”
호버대시는 캐터필러 앞에 검은 수영튜브 같은 것이 붙어 있는 모양으로, 유사시에는 캐터필러 밑으로 호버대시를 내리고 붕 떠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제리의 배터리를 감안하면 계속 호버대시로 이동할 수는 없겠지만, 물이나 늪지대를 돌파할 때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문의 스폰서는 아까 김용기가 지나가며 ‘도어노커’가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기 김용기, 이건 군용품인데? 랜서에 다는 거야?”
서 씨는 정비사답게 파일벙커 모듈의 로트번호만 보고 군용품이라는 걸 알아냈다.
“아니, 그쪽 회사는 도대체 뭐 하는 회사랍니까? 이걸 다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사원들은 회색 회사 점퍼를 입고 있었고 가슴팍에는 ‘동우 엔지니어링’이라는 패치가 붙어 있었다.
“걱정 마세요. 탈 나는 물건은 아니니까. 우리 ‘이 사장님’이 정부 쪽에 끈이 있거든요.”
“이사장?”
순간 김용기는 법인 이사장인 줄 착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이건 제리의 페이스메이커 로봇. 어빈(Earvin)이요.”
어빈은 제리보다 약간 더 위 체급의 휴머노이드 격투 로봇이었다.
로봇은 얼핏 보면 공격 로봇으로 착각할 만큼 다부진 모습이었고 검은색 프레임이 전체적으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 어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생긴 것과 달리 어빈은 굉장히 싹싹했다.
김용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빈의 인사를 받고 괜히 한 바퀴 돌았다. 어빈의 프레임은 신품이라 도장이 까진 자국도 없었다.
“이 정도 로봇이면 저희 제리가 오히려 페이스메이커를 해야 할 텐데요?”
서글서글하게 생긴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누가 이기든 백억만 따면 되지 않습니까? 아 그리고 우리 이사장님이 말씀 안 했는데 어빈, 제리 누가 1등으로 들어오든 6대 4입니다. 그쪽이 4고요.”
“아, 그건…….”
김용기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40억이라도 김용기는 이게 어디냐였다. 그리고 이 정도 퀄리티의 물품들이라니. 수상쩍긴 해도 동우 엔지니어링의 지원을 받는다면 우승할 확률이 확실히 높아진다.
“음, 그럼 우리 제리도 태그매치는 처음이고 팀 먹고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조정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시합 또 열릴 텐데 혹시 괜찮겠어요?”
뒤에 있던 서 씨가 김용기의 팔을 잡아끌고 속삭였다.
“미쳤어? 아직 정비 다 안 끝났다고. 어제 데미지도 남아있고 부품도 신품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야, 하지만 캐논볼 대회가 다다음 주야.”
“그러니 더 정비를 말끔하게 해야지?”
“아니지, 미리 저 로봇과 호흡을 맞추는 걸 연습해야지? 나중에 손발이 안 맞으면 어쩌려고?”
서 씨와 김용기는 의견이 갈렸다. 그때 동우 엔지니어링의 사원이 끼어들었다.
“저희도 정비를 도울게요. 마침, 정비 로봇도 한 대 있고.”
RR-04 로봇은 문어발처럼 여덟 개의 매니퓰레이터를 가지고 있었고 바로 제리에게 다가갔다.
“어이 로봇! 함부로 손대면…….”
RR-04 통칭 알알이는 먼저 제리의 반동강 난 몸에서 척추 프레임을 분리하고는 구동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정비사는 저리 갈만한 움직임이었고 잘생긴 남자는 거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김용기는 제리의 프레임이 분해되는 걸 보고 동우 엔지니어링 사람들 쪽으로 빙글 돌며 말했다.
“그러어엄. 저녁에 운동장에서 뵙죠. 지하격투장이 어딨는지는 아시죠? 아, 그리고 혹시 배당권 사시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체잉꺼 쪽에 좀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근육질 남자는 냉큼 돈을 꺼내려고 했지만 잘생긴 남자가 근육질 남자의 옆통수에 딱하고 딱밤을 때렸다.
“돈은 쫌 있다 걸게요.”
“아, 예 그렇게 하세요.”
근육질 남자는 투덜대면서 트럭으로 되돌아가고, 잘생긴 남자는 명함을 한 장 남겼다.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김대현 대리. 뭔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김용기는 명함을 지갑에 넣고 허리를 숙여 두 사람을 배웅했다.
“동우 엔지니어링, 동우 엔지니어링.”
“김용기, 벌써 검색해 봤어. 딱히 수상한 회사 같지는 않은데?”
서 씨는 회사 홈페이지를 김용기에게 보여줬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 속에는 어빈이나 알알이같은 로봇들도 있었고 꽤 귀엽게 생긴 여직원도 한 명 있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동우 엔지니어링은 창업 20년차 중견 로봇 제조업체였고 지게차 로더 등 각종 특수로봇들을 제작하던 회사였다.
“산업부 기업공시도 제대로 되어 있고…… 등기부 등본에도 회사 위치랑 다 나와있고오.”
서 씨는 동우 엔지니어링을 검색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 회사가 왜 캐논볼 레이스에 참가하는 거지?”
“기술력 자랑 뭐 그런 거 아닐까? 저 로봇이 우승한다고 생각해봐? 랠리나 F1 경주에서 우승하는 거나 다를 바 없잖아?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된다고.”
어빈의 가슴팍에는 ‘동우 엔지니어링’이라고 촌스러운 서체로 하얗게 적혀 있었다.
캐논볼 레이스는 자그마치 TV 방송국에서도 중계 예정이었으니, 거기서 우승만 한다면 동우 엔지니어링의 기술력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만영 사장이라. 아무리 봐도 사장 같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옷은 방금 온 김대현 대리처럼 같은 옷을 입었지만, 김용기는 이만영 사장에게서 뭔가 피비린내 같은 걸 맡았다.
김용기도 간위예 전쟁 참전용사였고 참전용사끼리는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아무튼, 서 씨, 저녁까지는 다 되겠지?”
“지금 페이스라면 어, 가능할 것 같아. 저 로봇 성능 끝내주는데? 제기랄, 우리 정비 로봇에 비하면 저건 거의 공장 수준이야. 동우 엔지니어링…… 은근 기술력 있는 회사일지도.”
김용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 방으로 되돌아왔다. 어젯밤을 같이 불태웠던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니, 열쇠 숨겨놓고 가지 대놓고 밖에 놓으면…… 어! 어!”
김용기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문을 열자마자 보여야 할 전국체전 메달이 없다.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신발장 밑을 뒤졌지만 메달이 나올 턱이 없었다.
“아! 그 여자! 금이라 착각하고 들고 간 거구나! 이런 제기랄!”
김용기는 허름한 나무문을 박차고 나가려다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자의 주소는커녕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그는 철창처럼 생긴 계단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제기랄, 그거 딱 하나였는데.”
김용기의 인생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만한 건 바로 그 전국체전 금메달 하나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무채색으로 떡칠 되어 있다고 늘 생각했다.
회색과 검은색 유화물감으로 찐덕찐덕하게 덧발라진 어두운 캔버스.
그런 그의 인생에서 딱 한 번 황금빛으로 빛났던 순간이 바로 전국체전 금메달을 땄을 때였다.
김용기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담배를 신발로 밟아서 껐다.
아마 그 메달은 지금쯤 두꺼비 상가 어디에서 관광객에게 팔렸거나 가짜 금이라는 게 밝혀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몰랐다.
“에이, 없어진 거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