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4
제164화
김용기는 방으로 들어와 싱크대 문을 열었다.
싱크대 배수구 아래에는 그의 비밀금고가 숨겨져 있다.
그는 사브레 쿠키 깡통을 꺼내 돌돌 말린 달러 지폐를 바라봤다.
어제 딴 돈까지 합친 그의 전 재산 1천만 원이었다.
“아니지, 다 걸 순 없어. 방세도 있고. 조심해서…….”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꾸러미를 풀어서 딱 5백 달러, 50만 원 정도만 챙겼다.
언제나 비상금은 필요한 법이다.
그는 쿠키 깡통을 싱크대 밑에 자석으로 척 붙이고 방을 나왔다.
이제 슬슬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굴다리는 물론 인천 시가지 역시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체잉꺼의 사업인 R-3 리그는 지하격투장에서 열린다. 하지만 의외로 리그 자체는 합법이었고 여기에서 승리한 기록은 협회의 공식인증까지 받게 된다.
다만 거기다 돈을 거는 건 복권법 위반이었다.
굴다리에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지하격투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버젓이 칠판에 배당표가 쓰여 있었고 귀에 분필을 꽂은 체잉꺼의 똘마니가 돈을 받고 배당권을 나눠주고 있었다.
“오우 브레이브, 용기 씨 오셨네요?”
“새끼, 손윗사람한테 용기 씨가 뭐냐? 아무튼 출전 신고 겸 돈 좀 걸라고 왔어.”
“예? 출전이라고요? 어제 제리 반파 당했잖아요? 아, 맞다. 어제 정말 끝내줬어요? 무사시보의 블레이드를 피하고 퍽퍽 스트레이트 두 방을 때리더니 마지막에 그거 뭐예요? 어디 한 번 벨 테면 베어 보라는 듯이 딱 멈춰 서서는…….”
이 체잉꺼의 똘마니 진가구(陳家溝)는 다 좋은데 말이 많아서 탈이었다.
김용기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돈을 턱하고 올려놨다.
“애걔, 5십만 원? 어제 돈도 많이 땄잖아요?”
“빚으로 다 나갔지. 아무튼 출전은 두 대 태그매치.”
“태그매치요? 제리가요? 아저씨네 로봇 하나뿐이잖아요?”
“어, 그게 다른 곳이랑 콜라보야. 그리고 캐논볼 연습도 할 겸 겸사겸사.”
“아, 아저씨네도 캐논볼 나가려고 그랬구나? 그 캐논볼 나간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옆집에도요 글쎄 가정용 가사 로봇을 등록한다고 난리지 뭐예요?”
“아, 시끄러. 제리하고 어빈이라는 로봇이 나갈 거고. 체급은 그대로.”
“밴텀급이요?”
“어. 좀 시험해 볼 게 있기도 하고.”
“근데 태그면 볼케이지는 아닐 텐데 괜찮겠어요?”
“아, 새끼 시끄럽게 말 많네. 걱정 마, 제리는 평지건 볼케이지건 다 잘하니까.”
진가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어빈의 사양이 담긴 공식인증 서류를 받아서 확인했다.
“얼씨구? 군용 액츄에이터에 프레임도 아선 제품이네요? 격투 로봇으로 나온 거.”
김용기는 어빈의 사양표를 제대로 본 적 없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진가구에게서 서류를 빼앗아 확인했다.
“뭐야 이거? 무게는 가벼운데 다 군용 라인업이잖아?”
배터리부터 시작해서 롤러대시에 파일벙커까지 어빈의 프레임은 전체적으로 오버스펙이었다.
“와, 이 정도면 신참인데도 배당률 조정이 좀 들어가야겠는데요? 제리도 보니까 액츄에이터랑 유동액을 바꿨네요?”
진가구는 행정 로봇에게 서류를 스캔한 후 도박 메인 인공지능의 대답을 기다렸다.
“현재 어빈, 제리 태그매치 배당률 3,34. 와, 돈 더 거셔야겠는데요? 따도 겨우 돈 150이에요?”
“상관없어. 어차피 빅게임을 위한 연습게임이니까.”
“오늘 빅게임 소식 듣고 다들 그런다니까? 근데요. 오늘 그래플러 기술 좋은 로봇 하나가 R-2 리그에서 강등당했어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딥러닝을 무슨 러시아의 레슬러가 가르쳤다나?”
진가구는 배당표에 1.43으로 적혀 있는 로봇 이름을 가리켰다.
“걱정 마라. 우리 제리의 스트레이트는.”
“세계 최강. 알아요. 그거 하나 보고 제리에게 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직 낭만이 다 뒈지진 않았나 봐요.”
김용기는 배당권을 쥔 손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언제봐도 쭉 뻗는 오른손이 정말 깔끔한 폼이었다.
* * *
빅게임 소식 때문인지 오늘따라 저녁 지하격투장은 더더욱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욕망이 로봇들의 격투에 불을 지폈고 관광객이든 도박꾼이든 로봇이 한 대씩 터져나갈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제리와 어빈이 출전하는 태그매치 경기는 싱글매치가 다 끝난 후에야 열린다. 하지만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대전하는 양측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벌어지는 것이 개체량이었다.
로봇들은 모든 장비를 탑재한 후에 체중을 잰다.
때론 배터리팩을 빼거나 동력케이블로 연결하는 꼼수가 나오기도 하고 막상 개체량 때 없었던 미사일 같은 무기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런 건 다 규정 위반이었고 나중에 들키게 되면 설사 다른 로봇을 시원하게 박살 냈다고 하더라도 몰수패를 당한다.
R-3 리그의 정비 로봇이 제리와 어빈을 꼼꼼하게 검사했다. 규정에 없는 미사일 등 화력병기가 없는지, 각 부품의 안정성은 어떠한지 로봇의 구석구석을 다 훑었다.
월미도에서 벌어지는 R-3 리그는 쎄잉꺼의 입김이 강했지만, 어이없게도 세계 로봇 파이팅 협회의 감독을 받았고 절차 자체는 공정했다.
때문에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수많은 로봇 엔지니어와 로봇 소유주들이 월미도까지 들어와서 리그에 참가한다.
여기서 인기를 끌거나 이름을 날리면 종종 R-1 리그 팀에서 스카웃 제의도 왔고 R-2 리그로 승격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일푼 떨거지라도 딥러닝이 잘된 격투 로봇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소드타워를 사는 것도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김용기도 같은 이유로 난민지구에 들어왔다. 그는 제리를 만난 이후 더욱 꿈이 커졌다.
제리와 함께 R-1 리그, 아니 세계 리그에까지 나갈 꿈을 꾸고 있었다.
– 양 로봇 다 부품의 안정성 이상 및 무게 개체량을 통과했습니다. 다만, 봉인지를 떼거나 본 게임에서 개체량 당시의 무기를 바꾸면 실격패 당합니다. 이 사실을 고지받으셨으면 서명해주십시오.
김용기는 시원하게 서명했고 이만영 사장의 대리인으로 나온 김대현 역시 사인했다. 이로써 개체량은 끝나고 제리와 어빈은 타원형의 아레나에서 치열하게 싸울 일만 남았다.
그가 개체량 서류에 사인했을 때 갑자기 아레나에서 큰 함성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아-
“황제가 왔다! 황제가 왔다고!”
이 지하격투장에서 황제라고 불리는 존재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가 뭐죠?”
김용기는 김대현의 질문을 무시하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화려한 정비 트레일러가 보였다.
겉면에는 팀 엠페러라고 영어로 쓰여 있고 짜르가 고주파 펀치를 날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팀은 R-1 리그의 절대강자 짜르봄버를 트레이닝해서 동양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짜르봄버는 이제 곧 있을 세계 타이틀 싱글매치에 도전할 차례였다.
이곳에는 수많은 트레이너 꿈나무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김용기처럼 선망의 눈길로 팀 엠페러의 세컨드나 엔지니어가 차량에서 내리는 걸 바라봤다.
팀 엠페러 사람들은 마치 연예인들처럼 몰려든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하고 짜르봄버의 캐릭터 인형들을 마구 뿌리기도 했다.
“월미도 아레나 여러분! 팀 엠페러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황제! 짜르봄버가 인사할 겁니다!”
트레일러의 옆뚜껑이 위로 스르르 올라가고 폭죽이 터지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황제! 황제! 황제!”
“꺄아악! 짜르 날 가져오오오오!”
지하격투장에 온 수많은 이들이 짜르봄버를 향해 환호성을 터뜨렸고 로봇은 그 응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허공에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파드드드득.
짜르봄버의 무기는 고주파 스트레이트였고 저 주먹에 맞으면 강화장갑이 우그러지고 로봇의 동력계가 이상을 일으킨다.
팀 엠페러는 R-1 리그 팀답게 마이크로웍스나 호리코시 같은 수많은 대기업의 스폰서를 받았는데, 저 고주파 주먹 역시 호리코시의 군용 라인업이었다.
김용기는 황제의 스트레이트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흥, 누가 딥러닝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제리의 발끝도 못 미치는군.”
그의 목소리는 짜르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제리를 아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오히려 역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제리도 성인 남자와 비교하면 꽤 크긴 했지만 겨우 0.5톤급의 소형 로봇이었다. 반면 짜르는 체급 무제한의 헤비급 로봇이라 그 설계 자체가 달랐다.
제리는 서 씨의 많은 개조가 뒤따르긴 했지만 사실 OS도 기본프레임도 그냥 ‘공공용 오픈프레임 로봇’이었다. 반면 짜르는 처음부터 로봇 격투를 위해 만들어진 OS와 프레임으로 그 위용이 남달랐다.
마치 중세기사를 보는 것처럼 삼각형의 전면장갑과 팔 역시 중장기병 파이크맨의 길쭉한 팔을 개조한 걸 장비하고 있었다.
아마 제리와 짜르가 무제한급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면 아마 고주파 주먹에 형체도 없이 찌그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용기는 짜르의 실제 모습을 보고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크다고 다 잘하는 게 아니야.”
그는 괜히 사타구니를 손으로 만져서 위치를 정리하고는 지하격투장으로 되돌아왔다.
김대현과 아까는 못 본 음침하게 생긴 동우 엔지니어링 직원이 열심히 어빈의 마지막 정비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좀 시끄럽죠!”
“아, 예! 하지만 신나는데요! 우리 어빈의 첫 데뷔무대잖아요!”
대기실에도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시끄럽게 힙합이나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김대현은 고함을 지르며 김용기에게 답했다.
“근데 그쪽 사장님은 바쁘신가 봐요!”
“아! 예! 위치가 위치다 보니, 그리고 요새 여기저기서 쪼이는 게 많아서 오늘은 못 나오셨어요!”
김용기는 관공서나 다른 업체의 갑질인가보다 하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동우 엔지니어링은 로봇 제작 업체답게 기자재들도 서 씨나 김용기가 가진 것보다 더 훌륭했다. 덕분에 제리 역시 오른팔 관절의 미세조절을 받았다.
“라이트 액츄에이터가 마벨라스하군요. 엔지니어가 델리킷하게 케어했다는 게 느껴집니다.”
음침하게 생긴 사람이 김용기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영어를 막 섞어 쓰는 괴상한 말투로 말했다.
남자는 3류 영화에 나오는 악역처럼 왠 포메라니안 개를 안고 쓰다듬고 있었다.
“아아, 예.”
음악 소리가 시끄럽기도 시끄럽고 김용기는 못들은 척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정비도 끝났고 이제는 출전의 시간이었다.
주최 측 안내 로봇이 준비하라고 알렸고 두 대의 로봇은 원형 경기장 밑의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김용기와 동우 엔지니어링 사원들은 케이지에 담긴 로봇 두 대를 따라갔다.
그때 잠시 바깥에 나가 있던 서 씨가 배당 결과와 대전상대를 알아 왔다.
“이런 제기랄, 그 그래플러 로봇이랑 붙게 되었어. 이상한 기술 쓴다는 놈. 제리 팔이 안 좋은데.”
김용기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개체량이 끝나고 주최 측은 어빈의 부품 검사표를 보고 아까 진가구가 알려준 그 그래플러 로봇과 붙게 했다.
“서 씨, 걱정 마. 빅게임을 위해서라면 언젠가는 한 번 넘어가야 할 산이니까.”
“그놈의 빅게임 같은 소리한다. 계속 말하지만 제리도 지금 이기고 있어서 비싸게 쳐주는 거지 한 번 지기 시작하면 말이야…….”
“시발, 막 경기 시작하는데 재수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제리는 이기고 또 이길 거야.”
김용기의 표정을 보고 서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지고 나서 계속 지고 또 지는 건 김용기의 인생 그 자체였다.
김용기는 제리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고 종종 제리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 김용기에게 제리 욕을 하는 건 자식 욕을 하는 거고 싸우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퇴물이 되었지만 김용기의 스트레이트 펀치만큼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고 서 씨는 괜히 그의 오른손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