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7
제167화
“그래서요?”
“박살 났죠. 인간이 수동운전 한 트럭이었는데 공공 로봇이 버티기나 한답니까? 근데 스트레이트를 먹이고 옆으로 굴러서 제리가 아이를 구해냈어요. 그 동작이 얼마나 민첩한지 만화 톰과 제리 아시죠? 그걸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제리가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을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었다.
“배짱, 스피드, 동작. 모든 게 완벽했어요. 아, 이거구나. 이 녀석이면 되겠구나 해서. 제가 불하를 받았죠. 그랬더니 관공서 담당 로봇이 뭐라 그러는지 알아요? 그딴 고물을 가져가서 뭘 하시게요? 하하, 당연하죠. 그때 제리는 머리하고 척추밖에 안 남았으니까.”
이만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살 난 공공 로봇을 불하받은 김용기. 그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이번에는 비록 어빈의 활약에 가려지긴 했지만 제리의 동작은 굉장히 남달랐고 사람의 가슴을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럼 제리를 위해 한잔하시죠.”
“예, 제리와 어빈을 위해.”
이만영 사장은 술이 굉장히 셌고 김용기는 나중에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는 로봇 인력거에 실려 방으로 되돌아가면서도 ‘제리와 어빈을 위해…….’라며 혀가 꼬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 * *
이만영 사장과 동우 엔지니어링 직원들은 김용기를 배웅하고 다시 누리식당으로 들어왔다.
“팀장님. 체잉꺼의 명함을 받았습니다.”
“어, 이브이한테 들었어. 아니 이제는 어빈이라고 해야 하나? 어빈이라는 이름도 괜찮은데?”
EarVIn.
오늘 놀랄만한 활약을 보여준 어빈은 난민들이 귀신 로봇이라 부르는 EV-1이었다.
랜드쉽을 단독으로 박살 낸 로봇이었다.
비록 격투 프레임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일반 격투 로봇들과 비교하긴 어려웠다.
이만영 사장, 아니 중부서 강력부 44팀장 이진영은 변장을 위해 기른 콧수염이 간지러운지 괜히 손으로 만지면서 말했다.
“일단 체잉꺼와 연결되기는 했군. 근데 체잉꺼 안에도 우리 언더커버가 있지 않나?”
몸에 맞지 않게 큰 동우 엔지니어링 점퍼를 입고 있는 임은혜가 대답했다.
“예, 그쪽에서도 뻐꾸기가 날아오기는 하는데 요새 감시가 심하다나 봐요.”
“그래, 차라리 우리가 직접 접촉하는 게 낫겠어. 대현이 너랑 인환이가 수고해줘.”
“예, 무리하지는 않을게요.”
이진영은 김대현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놀렸다.
“그래라, 여친도 있는데 조심해야지?”
“아, 아직 안 사귄다니까요?”
“안 사겨요!”
두 사람은 병아리처럼 동시에 입을 맞춰 말했다.
“니들 궁합 잘 맞을 거야. 아무튼 캐논볼 레이스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쎄잉꺼와 접촉해야 해. 이브이, 아니 미스터 어빈 오늘은 너무 화려했다고.”
EV-1은 이진영 옆에서 조용히 44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진 로봇의 부품을 들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건가요?
“아아, 그거. 다 쇼맨쉽이야.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인간이 잔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 인간이 잔인해서요?
“그래, 로마 시대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을 콜로세움에 몰아넣고 검투사나 맹수와 싸우게 했지. 그때랑 똑같아. 다만 지금 싸우는 검투사가 로봇으로 바뀐 것뿐이야.”
– 음, 여전히 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걸 좋아해. 다만 평소에는 그걸 얄팍한 도덕관념 아래에 숨기고 있을 뿐이지. 어쩌면 나도 여기 계신 점잖은 숙녀님이신 윤숙희 여사께서도 사람의 내장이 튀고 심장을 꺼내서 펄떡거리는 걸 보고 싶어하는 야만적인 본성이 있는지도 몰라.”
난데없이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윤숙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줏잔을 들이켰다.
“아무튼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보니. 이브이, 너는 격투 로봇에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천상 형사야.”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V-1은 평소에는 온화한 말투였고 지금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격투장 안에서 그 화려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잘 연상되지 않았다.
가끔 이진영도 EV-1이 때론 폭격을 유도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랜드쉽을 박살 낸 로봇이라는 걸 잊곤 했다.
EV-1의 본성, 즉 설계 방향성은 뭘까?
이 로봇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천도영 사건에서 EV-1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열차를 강제 탈선시키며 백여 명의 사람들을 살렸다.
이진영은 괜히 격투 로봇 프레임으로 바뀐 EV-1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자, 오늘은 이쯤하고 정리하지. 나도 승아가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하고.”
“저, 팀장…….”
“아, 깜짝이야!”
이제 전상영은 이진영의 뒤에서 은근슬쩍 말을 거는 걸 즐기는 듯 보였다. 그걸 보는 팀원들도 이진영이 놀랄 때마다 질리지도 않는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팀장. 승아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이브이투 잘 지내나?”
이진영은 전상영이 품에 안고 있는 개를 바라봤다. 그는 3류 영화의 악당처럼 음침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개를 쪼물락거렸다.
이 개는 장현권 사건에서 그가 잘못 잡아 온 바로 그 포메라니안이었다. 전상영은 개에게 포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44팀의 마스코트로 만들었다.
“왜요, 선배님 또 그 개 보러 오신다고요?”
전상영은 빵긋 웃었다.
겉모습이 다른 방식으로(?) 개를 좋아할 것 같아 그렇지 그는 정말로 개를 좋아했다.
문제의 EV-2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려 이머전시 원장 이동우의 개 정식이였다. 그 개 역시 주인이 죽으며 오갈 데가 없어졌고 이진영이 데려다 기르고 있었다.
이동우의 개에게는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한승아는 개를 보자마자 EV-2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말 개를 아꼈다.
EV-1은 개에 왜 EV-2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승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브이 원, 투가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알았어요. 선배. 주말에 놀러 오세요. 제가 술상 차려놓을게요.”
빵긋. 전상영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먼저 누리식당 바깥으로 나갔다. 44팀의 회식 겸 회의는 이것으로 끝이었고 이진영은 천장에 대고 말했다.
“자, 23팀, 15팀, 저희 먼저 나갈게요. 뒷정리 부탁드립니다아아.”
– 야, 이 시끼야. 설거지는 하고 가라고?
“에헤이, 가사 로봇이랑 요리 로봇 뒀다 어디다 쓰려고요? 팀장님 수고오?”
이진영은 23팀장에게 경례를 슬렁슬렁하고 누리식당 밖으로 나왔다.
나름 월미도 지리에 빠삭한 김용기가 누리식당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이곳은 중부서에서 현장지휘본부로 만든 곳이었고 누리식당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 없었던 건 동우 엔지니어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본청에서 폭탄테러 로봇 사건을 조사 명령을 받고 위장회사와 식당을 만들었다.
이진영은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를 물고 한쪽 눈썹만 치켜떴다.
“이브이, 사실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왜 사람들이 로봇 격투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EV-1은 조용히 그의 파트너를 배웅했다.
* * *
다다음날도 어빈과 제리는 태그매치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번 매치는 한 체급 위의 로봇들과 싸우는 핸디캡 매치였지만 어빈과 제리는 서서히 호흡을 맞춰 싸우면서 어렵잖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빈이 주먹으로 화염 방사 로봇의 카메라 헤드를 박살 냈고 제리는 잽싸게 빈틈을 파고들어 일격에 연료통을 터뜨려 버렸다.
결국 주력 무기를 잃은 화염 방사 로봇은 마구잡이로 팔을 휘젓다가 어빈에게 암바가 걸려서 팔이 뽑혔고, 최종적으로 제리가 무릎으로 배터리팩을 내리쳐 정지시켰다.
일단 둘이 합세해서 로봇 하나를 거꾸러뜨리자 하나 남은 로봇을 상대하는 건 쉬웠다.
적도 휴머노이드 로봇이고 하필 격투형이라 파일벙커로 제리를 노렸지만, 이번 게임에서 가장 빛난 건 제리였다.
제리는 상반신을 글자 그대로 재봉틀이 움직이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어 고속 위빙으로 놈의 주먹을 모두 피해내고 마지막에는 크로스카운터까지 먹여버렸다.
적이 달려오는 속도와 제리의 고속이동 속도가 합쳐지면서 상대 로봇은 머리에서 척추까지 뽑혀서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제리는 그 머리통을 들고 아레나를 한 바퀴 빙글 돌면서 인간의 잔인한 폭력 욕구를 충족시켰다.
어빈, EV-1은 로봇이 행동 정지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제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 로봇은 충격적인 태그매치 데뷔전 이후 거의 하루에 한 번꼴로 격투에 참여하며 R-3 리그에서 상당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좋은 인상을 남긴 로봇 파이터에게는 스폰서가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로봇 부품 회사들이나 작은 공작소의 스폰서도 붙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음료 회사나 아선 같은 대형 대기업에서도 스폰서 제의가 왔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아뇨, 스폰서는 됐어요. 용품은 충분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희도 마음 같아서 아선 계열사에서 직접 물건이야 받고 싶죠. 근데 저희도 메인 스폰서가 로봇 조립회사라 겹쳐가지고요.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요. 아, 예, 사장님, 그럼 다음 기회에 같이 하시는 걸로 하시죠.”
김용기는 굽신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요새 많이 받는 스폰서 제의 전화였다. 그는 전화를 받을 때도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이런 거절 전화라면 백 통이 와도 환영이었다.
“제리, 네 인기가 마구 치솟고 있다.”
제리는 인간처럼 조끼 같은 걸 걸치고 있었고 조끼 앞뒤에는 김용기가 받은 스폰서 업체들의 이름이 복잡하게 쓰여 있었다.
마산횟집, 전원회관 같은 구수한 업체 이름이 있는가하면 코카콜라나 보원 할매 순댓국같은 대기업 프랜차이즈 광고 패치도 붙어 있다.
R-3 리그가 공중파에 중계되지는 않는 리그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파격적인 스폰서들이었다.
김용기는 코카콜라 병을 기울이면서 제리에게 보낸 팬레터나 선물 따위를 들어 보였다. 제리와 어빈은 R-3 리그 로봇치고는 꽤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마 제리 혼자라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지는 못했으리라.
이 두 로봇은 프레임 색깔도 정반대였고 쇼맨쉽도 정반대라 오히려 더 독특한 인상을 남겼다.
제리도 휴머노이드로서 놀랄만한 성능을 발휘했지만 사실 어빈 쪽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어빈은 전혀 쇼맨쉽을 부리지 않았고 그저 눈앞에 있는 로봇을 박살 내고 부러뜨리고 기능정지를 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두 로봇은 싸움 방식 또한 전혀 달랐다.
어빈은 권투로 치면 인파이터 성향에 그래플링 관절기도 서슴없이 쓰지만, 제리는 일격이탈 방식의 아웃복서 방식이고 타격기 위주였다.
제리는 정말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무함마드 알리의 표현이 딱 맞는 로봇이었다.
어빈이 눈앞의 적을 무자비하게 땅바닥에 갈아버릴 때, 제리는 다른 상대에게 가볍게 풋스텝을 밞으며 달려들어 스트레이트를 먹여서 KO시켰다.
이는 두 로봇의 딥러닝 성향 차이였고 딥러닝이 격투 스타일까지 결정했다.
인공지능 EV-1은 한승우나 천수관음 등 엑소슈트와의 근접전에 능했고, 대부분의 적은 EV-1보다 프레임과 인공지능 성능에 있어서 한 수 아래였다.
EV-1은 랜드쉽의 인공지능까지 압도하며 자체의 성능으로 찍어 누르는 형태의 싸움에 익숙한 그야말로 이레귤러였다.
그러나 제리는 누더기 프레임이라 EV-1이 택한 효율적인 공격 방식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제리는 R-3 리그에 데뷔하기 전에도 상대의 공격을 전부 피하고 카운터 펀치를 먹이는 형태의 기술을 익혔다.
프레임 자체가 누더기라 약하기도 하고 각종 부품들 역시 인파이터로 공격을 허용하면 고장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제리의 격투는 화려하긴 하지만 잘 보면 철저히 데미지를 받지 않는 걸 감안한 동작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용기 역시 현역에 있을 때는 아웃복서였기에 제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인파이터 그래플러와 깔끔한 히트의 아웃복서.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콤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