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8
제168화
체급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격투 로봇들은 프레임의 힘과 무기의 힘에 의지해서 싸우게 된다.
한때 R-1 리그의 최강자는 그냥 바퀴 두 개에 바퀴 축에 도끼만 달린 ‘아인헤자르’라는 로봇이었다.
이 로봇의 공격 전술은 굉장히 단순했다. 그냥 냅다 달려서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도끼로 상대방 로봇의 주요 부위를 도끼로 후려 까서 정지시킨다.
사실 R-1 리그도 휴머노이드인 짜르와 몇몇 로봇 외에는 거의 인간 형태의 로봇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체급이 올라가다 보면 점점 더 효율적인 형태를 찾게 되고 결국은 휴머노이드의 액츄에이터나 유동액 무게가 문제가 되어 좀 더 단순한 구조를 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인헤자르는 양자두뇌를 제거하고 인공지능조차 탑재되지 않은 단순 무선조종 기계였다. 이걸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김용기는 콜라를 마시며 다른 리그의 로봇을 둘러봤다. 그의 수첩에는 혹시나 위협이 될만한 로봇들의 명단이 좍 정리되어 있었다.
서 씨는 대낮부터 사케를 홀짝거리며 김용기의 어깨너머로 모니터와 수첩을 힐끔 바라봤다.
“뭐야, R-1 리그 로봇 보고 있는 거야? 설마 승격하려고? 아무리 제리랑 어빈이 잘 나간다지만 R-2 리그만 해도 빡세다는 거 너도 알 텐데?”
“승격도 좋지. 안 그래도 협회에서 포인트 조금만 더 채우면 어빈과 제리 둘 다 R-2 리그로 승격시켜줄 거래.”
“흥, 만날 R-1 리그 노래를 부르더니 잘됐네. 근데 벌써부터 R-1 리그 로봇들을 쳐다보는 건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닌가?”
김용기는 수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모르시는 말씀. 이건 어디까지나 캐논볼 레이스 준비야.”
서 씨는 다시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로 나갈라고? 그냥 차라리 R-2 리그 승격해서 찬찬히 정도를 밟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이제 막 스폰서도 괜찮은 데에서 많이 붙은 참이잖아?”
서 씨는 괜히 병 콜라를 들고 필기체로 써진 코카콜라 로고를 바라보다가 다시 상자로 되돌려 놨다.
“코카콜라 챌린지 스폰서가 붙을 정도라면 제리도 유망주라는 거잖아?”
김용기도 코카콜라 패치가 붙은 제리를 바라봤다.
코카콜라는 로봇 격투 리그의 메인 스폰서였고 세계 각지의 하위 리그 유망주 로봇들이 있으면 ‘언더독’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의미로 스폰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 씨 너도 알잖아? R-2 리그로 갔다가 다시 미끄러져서 R-3 리그로 내려올 수도 있어. 그래서 어느 세월에 R-1 리그로 가? 그리고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그놈의 황제 타령은.”
“R-1 리그로 올라가도 체급 때문에 매치 잡는 건 힘들겠지. 제리도 코카콜라랑 동우 엔지니어링 덕분에 좋은 부품도 받고 몸집을 키우긴 했지만 슬슬 한계야. 라이트급까지는 어찌저찌 체급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설계 방향성이 문제라고.”
“음…… 하긴 제리는 원래 휴머노이드 타입 공공 로봇이었으니까.”
또다시 설계 방향성 문제가 튀어나왔다.
격투 로봇의 OS도 프레임에 꽤 영향을 받았다. 체급과 성능에 맞지 않는 OS는 어린아이의 정신이 근육질 몸에 들어가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각 부를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딥러닝과 인공지능의 설계 방향이 아주 중요했다.
당장 청소용으로 제작된 로봇 인공지능이 휴머노이드 프레임을 조종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바퀴로 구동되고 먼지를 빨아들이거나 원형 걸레를 돌리게 설계된 청소용 인공지능.
그것이 휴머노이드 프레임에 이식되면 아마 두 발로 균형도 잡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용 로봇 OS를 무리해서라도 걷게 하려면 아이가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는 과정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바로 이런 효율과 비용 때문에라도 각각의 로봇과 인공지능은 설계 방향에 맞춰 설계되고 거기에 이익형량 문제도 있었다.
청소용 로봇은 복잡한 이익형량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인간이 치이지만 않게 운행하면서 열심히 쓰레기를 빨아들이고 바닥을 윤이 나게 닦으면 그만이다.
반면 경찰 로봇인 EV-1이나 응급실의 간호 로봇은 로봇 공학 3원칙의 한계까지 인간의 신체를 침해할 수 있어야 했다.
“김용기, 너도 알겠지만 제리는 부품을 갈고 또 갈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슬슬이 아니라 이미 한계야. 제리가 아웃복서 스타일인 것도 거기에서 오는 고육지책이었고.”
“나도 알아. 하지만 꿈이거든.”
김용기는 다시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이 스트레이트로 강적들을 쓰러뜨리는 거.”
서 씨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꿈같은 이야기는 그만둬. 제리는 현실이야.”
“흐흐, 꿈이 없으면 팍팍해서 어떻게 사냐?”
“차라리 나처럼 살라니까? 취생몽사라잖냐? 살아서는 취하고 죽어서나 꿈꾸는 게 나을걸?”
“아냐 서 씨, 이젠 마냥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지.”
마침 로봇 행거 쪽으로 동우 엔지니어링의 차량이 들어섰다.
이제는 얼굴이 익숙해진 김대현과 유인환이 차량에서 내려서 제일 먼저 어빈, 즉 EV-1을 트럭에서 내렸다.
어빈은 그동안 여덟 차례의 격전을 벌이면서 검은 도장이 까져서 곳곳이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러나 이 검은 로봇은 단 한 번의 부품 손상도 허용하지 않았고 그저 겉만 긁혔을 뿐이다.
곳곳에 도장이 까진 모습이 관록이 더해진 것 같다.
김용기는 한 주 약간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며 어빈에게도 정이 들었다.
“여, 어빈 오늘은 어때?”
– 예, 컨디션 양호합니다.
“흐흐흐, 오늘도 우리 제리 잘 부탁한다.”
김용기의 말투는 마치 잘 나가는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쑥스럽게 말하는 부모와도 같았다.
어빈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마찬가지로 출전 정비를 받는 제리를 바라봤다.
– 걱정 마십시오. 제리는 강합니다.
“니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오늘 매치는 그냥 태그매치가 아니거든.”
어빈은 이미 이야기를 들었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 로얄럼블이라도 저와 제리의 성능이라면 제리는 무사할 겁니다. 확률로 말씀드릴까요?
어빈은 평소에는 꽤나 싹싹하고 농담도 곧잘 했지만, 가끔 이렇게 기계적인 답변을 할 때가 있었다. 김용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우 엔지니어링’이라고 쓰인 어빈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동우 엔지니어링에게도 코카콜라 챌린지 스폰서가 왔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저 회사는 일체의 스폰서를 받지 않았다.
덕지덕지 온갖 스폰서 패치가 붙은 제리, 스폰서 패치가 없는 깔끔한 도장의 어빈.
스폰서 패치 면에서도 어빈과 제리는 강렬한 대비를 보이면서 오히려 인기 요소가 되었다.
김대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 로얄럼블이라는 게 원래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방식 아닌가요?”
김용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 이거만큼 흥행이 잘 되는 게 없거든요. 게다가 R-3 리그는 온갖 로봇들이 다 나오니 더더욱 인기도 많고요. 아마 이걸 TV 중계했다면 R-3 리그도 인기가 치솟을 거예요. R-1 리그는 끽해야 태그매치밖에 없으니까.”
김용기는 뒤이어 로얄럼블의 규칙을 설명해주었다.
로봇이 더 이상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으면 패배.
거기에 더해 일정한 공간 바깥으로 나가면 로봇의 가슴에 달린 불이 4회 점등된다.
삐삐삐삑.
이렇게 네 번 비프음과 함께 점등되고 4번이 되었을 때는 로얄럼블 특제 ‘폭탄 조끼’가 폭발한다.
원래는 링아웃되면 바로 탈락이었지만 R-3 리그는 흥행을 위해 이런 위험한 방식을 택했다.
때때로 관객이 폭발에 휘말리거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할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감안하고도 로얄럼블의 흥행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링아웃된 로봇이 어떻게든 링으로 되돌아오려다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장면은 최고의 흥행 요소였다. 현장에 있는 관객들은 펑펑 터져나가는 진동을 느끼며 열광한다.
어차피 아레나에서 죽어가는 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었기에, 이진영의 말대로 그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파괴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로얄럼블은 로봇 차주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리했다. 폭탄을 설치하고 싸우는 거나 다름없어서 가끔 링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도 기계 오류로 폭발하기도 했다.
폭발력도 상당해서 관객들이야 쩌렁쩌렁한 소리와 진동을 즐긴다지만 그걸 당하는 로봇 입장에서는 이만저만한 고난이 아니었다. 재수 없게 양자두뇌가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쌓은 딥러닝 훈련이나 전투 경험치가 말짱 도루묵이 된다.
“로얄럼블은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유인환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김용기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캐논볼 레이스 초반 상황이 로얄럼블이랑 똑같을 거예요. 태그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예방주사 삼아 초반 난전을 한 번 경험해보고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저희 제리도 로얄럼블은 경험이 없으니까요.”
동우 엔지니어링 사람들보다 서 씨가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리를 쳐다봤다.
제리는 아웃복서 스타일이었고 난전에 휘말려서 프레임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라도 한다면 캐논볼 레이스는 바이바이였다.
새로운 프레임을 살 돈은 있지만, 기초적인 딥러닝을 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이제 빅게임 레이스는 바로 다음 주였고 코앞으로 다가왔다.
로얄럼블은 김용기의 말대로 캐논볼 레이스를 위한 최종 점검이었다.
“어빈, 너만 믿는다.”
김용기는 다시 한번 어빈에게 제리를 부탁했다. 어빈은 그래플러 능력도 뛰어난 로봇이었고 난전에서도 충분히 제힘을 발휘할 것이다.
동우 로봇과 팀 제리는 월미도에서 빠져나와 쎄잉꺼의 폐차장으로 이동했다. 로얄럼블은 50대의 로봇이 뒤엉켜 싸우는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폭발 때문에 월미도에서 경기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김대현은 운전석에서 위를 바라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으아, 경찰 많이 따라오네요?”
김용기도 조수석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야, 로봇 격투는 쎄잉꺼의 주요 사업이기도 하니까요. 경찰 쪽에서는 진작에 R-3 리그 운영권을 빼앗고 싶을 거예요.”
김대현은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미도의 R-3 리그는 세계 로봇 격투협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리그였지만 거기다 돈을 거는 게 문제였다.
협회 측에서도 몇몇 인사들이 쎄잉꺼의 운영에 항의했지만, 세계 최대 폭력조직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오늘 돈 거셨어요? 제가 대신 걸어줄까요?”
유인환이 밴 뒤에 앉아 있다가 냉큼 5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김용기에게 건넸다. 운전석에 있는 김대현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인환은 눈을 빛냈다.
유인환은 어빈이 EV-1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 로봇이 어지간한 로봇들을 다 박살 내고 살아남을 거라 믿고 있었다.
“예, 좀 걸어주세요. 근데 로얄럼블은 어떻게 돈을 거는 건지 모르겠네요. 태그는 승패만 걸고 배당을 받는 거였잖아요?”
“아, 경마랑 똑같아요. 근데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로봇을 최대 5대만 찍으면 돼요.”
“최대 5대요?”
“5대를 전부 맞추면 기본배당이 1.1이고 기본배당을 못 맞추면 다 꽝입니다. 거기에 로봇 개인배당을 평균값으로 계산해서 곱하는 거니까…… 대략 제리랑 어빈의 배당이 각각 2.4, 2,3이고…….”
김용기는 구식 계산기를 타다닥 두드리면서 복잡한 수식을 계산했다.
“여기에 배당률 7.0 대 다크호스 한 방만 터지면 곱하기 배당이라 정말 큰돈 벌 수도 있어요. 로또가 따로 없다니까요?”
“하지만 다섯 대를 전부 맞춰야 한다면서요?”
“예, 그게 어렵죠. 기본배당이 겨우 1.1이라 1점대는 아무리 평균을 내도 거기서 거기라. 우리 제리랑 어빈 합쳐 봐야 대략 5배? 치기? 사실 그것도 따기 힘들긴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