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69
제169화
로얄럼블의 돈 걸기는 정말로 복잡했고 어떤 로봇이 살아남을지 예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로얄럼블 기록들을 보면, 아무리 제리와 어빈이 우승 후보라고 하더라도 가끔 배당률이 14.0, 21.0 대의 로봇들이 운 좋게 살아남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로봇을 탑 파이브에 올려놓으면 열 배 스무 배가 넘는 로또급 배당액을 받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다 운이었다.
김용기가 침을 튀겨가며 로얄럼블의 도박에 설명하고 있을 때 어느새 차는 경기장에 다다랐다.
이곳은 전에 이진영과 천수관음이 격전을 벌인 폐품의 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저번 장현권 사건에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된 해안도로에서도 가까웠다.
유인환과 김대현은 차에서 내리면서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이들이 무리해서라도 캐논볼 레이스에 참가하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로봇의 흐름’을 쫓기 위해서였다.
정 대령과 롱꺼 패거리들은 뭔가를 꾸미고 있었고 전국에서는 원격 로봇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장현권 사건에서 이진영의 44팀은 뜻밖의 단서를 잡았다. 진소홍의 행적을 좇다 우연히 서울대 공과대 학생회장을 체포했고 이후 인간해방전선에서 흘러나온 소스코드를 개조해 송도에서 폭탄테러를 자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도은주는 그 원본 소스가 마이크로웍스 테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마이크로웍스 테러는 바로 정 대령의 소행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인간해방전선의 소스가 바로 특별단독 사건에서 네드러드 일당이 의도한 통칭 ‘환지통’ 오류방식을 응용했다는 가설도 있었다.
몇몇 AI 전문가들은 김수겸 판사와 네드러드 일당이 다른 곳에 보안취약점을 만들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했었다.
전혀 동떨어졌다고 생각한 사건들이 맞물리며, 경찰청 본청에서는 인천 중부서 강력전담부에 폭탄 로봇의 흐름을 쫓을 것을 배당했다.
그 단서들을 쫓아 다다른 곳이 바로 캐논볼 레이스였다.
캐논볼 레이스의 주관사는 두말할 것 없이 쎄잉꺼의 성망유한공사였고, 정보국에 따르면 레이스는 ‘방벽’ 안까지 들어온다.
캐논볼 레이스에 참가하는 팀은 지금 신청된 팀만 1천 팀이 넘었고 각각의 로봇에 폭탄이 탑재되었을 가능성도 높았다.
높은 수준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정보국은 정부망과 경찰망에 대량의 로봇을 사용한 테러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 조짐은 전국에서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로봇을 이용한 로봇 공장 등 주요시설에 테러를 가하며 실재하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캐논볼 레이스는 난민 방벽 안쪽으로 수많은 정체불명의 로봇들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지금 캐논볼 레이스는 참가팀만 1천 팀이 넘었고 그 출발지는 바로 여기 로얄럼블 경기가 벌어지는 폐차장이었다.
어떤 로봇에 무슨 폭탄이 실리게 될지 경찰로서도 일일이 검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진영과 중부서 연합수사팀의 임무는 바로 캐논볼 레이스의 이면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로봇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고 대처하는 것이었다.
“대리님, 이거 생각보다 더 난린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은혜가 왔으면 아마 눈을 반짝였을 거야. 이건 뭐 거의 새로운 도시가 생겼는데?”
새롭게 리뉴얼된 로얄럼블의 규모는 이제까지 봐왔던 지하도박장과는 격이 달랐다.
며칠 전부터 시끄럽게 공사를 한다 싶었더니 폐차장에 축구 경기장 모습의 가설 스타디움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스타디움 지붕에는 캐논볼 레이스가 열린다는 걸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나부꼈고 기둥마다 각종 스폰서의 깃발이나 전자광고판이 현란하게 번쩍였다.
경기장 주변에는 월미도에서 원정 온 수많은 노점들이 성업 중이었고 셔틀버스가 쉴 새 없이 신인천공항에서 관광객들을 실어날랐다.
관광객들은 유명 라멘가게나 중국음식점의 팝업스토어에서 음식들을 즐겼고 심지어 버거킹이나 맥도날드도 경기장 근처에 팝업스토어를 열고 햄버거를 팔았다.
김대현의 말대로 작은 도시 하나가 폐차장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만 같았다.
노점 시설의 조명이나 새롭게 설치된 가로등 조명들은 이곳이 관광지인지 아니면 폐차장인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주변에는 높다란 산처럼 온갖 폐기물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그들이 알던 폐차장이 확실했지만, 경기장 주변만큼은 도로도 산뜻하게 새로 포장되어 있고 시설들도 깔끔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캐논볼 레이스를 위한 준비였다.
캐논볼 레이스는 한국의 R-1 리그 팀만이 참가하는 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금이 점점 늘어나서 거의 1억 달러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리님, 저, 저거 봐요.”
이 가설 스타디움에서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건 바로 투명 유리에 담긴 1천억 원이라는 돈이었다.
하얀 우주강화복을 입은 쎄잉꺼의 직속부대가 그 돈을 24시간 철통처럼 경비하고 있었고, 게임에 협찬하는 다른 기업이나 팀이 돈다발을 넣는 모습도 보였다.
관광객들은 자기가 딸 돈도 아니면서 돈이 점점 불어날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분위기는 축제 그 자체였다.
도박을 좋아하는 유인환은 넋을 놓고 실시간으로 우승상금이 불어나는 걸 보다가 김대현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얌마, 일해야지. 일.”
“아, 일이요.”
벌써 팀 제리, 김용기와 서 씨는 주최 측 접수 로봇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수송 로봇이 정비용 간이행거, 예비부품들을 싣고 줄줄이 대기실로 들어갔고 김대현과 유인환도 보스턴 백을 들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 무기를 가지고 계시면 맡아두겠습니다. 여기는 경찰이 아니라 사설 경비회사가 경비를 맡았고 로봇이 유인환과 김대현의 몸수색을 했다. 두 사람은 혹시나 해서 가져온 권총을 빼앗기다시피 로봇에게 건넸다.
“대리님, 영 불안한데요.”
“걱정 마라. 여차하면…….”
김대현은 뒤에 있는 어빈, EV-1을 바라봤다.
경찰청은 틸트로터 여러 대를 띄우고 정보국의 위성 자산까지 빌려 이곳 롱쎄잉(龍城) 스타디움을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김대현과 유인환이 위험해지면 블랙스와트가 강하할 테고 여차하면 EV-1도 있었다.
EV-1은 지금 어빈 안에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이진영의 원격조종만 있으면 언제든 ‘귀신 로봇’으로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롱쎄잉 스타디움 안에는 중앙에 커다란 돌을 잘라 만든 매끈한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위에서는 중장기병용 엑소슈트와 로봇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관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오프닝 매치였다.
중량형 엑소슈트 파이크맨이 창으로 오픈프레임 로봇들을 꿰어서 돌판 바깥으로 던지는 걸 보고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기랄,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랑 다를 게 뭐야?”
이 오프닝 매치는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공공 로봇을 데려와 처형쇼를 하는 장면과 거의 비슷했다.
중량형 엑소슈트 파이크맨은 랜서보다 훨씬 느린 대신 중장갑이라 오픈프레임 로봇 따위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파이크맨은 앞으로 다가오는 로봇들을 짓밟고 창으로 후려쳐서 허리를 동강 내며 사방으로 검은 유동액을 흩뿌렸다.
저 로봇들이 사람이었다면 그야말로 피의 축제였을 것이다.
이 롱쎄잉 스타디움에는 별다른 관객 보호장치가 없었고 관객석으로 유동액과 윤활유가 튀는데도 관객들은 오히려 그 검은 비를 맞으며 즐거워했다.
파이크맨은 연이어 7대째의 로봇을 으스러뜨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있던 12대의 로봇을 제압하고는 그 잔해를 들고 빙글빙글 타원형의 무대를 맴돌았다.
하얀 돌판이 검게 물들고 관객들은 파이크맨에게 박수를 쳤다.
엑소슈트 파이크맨은 마지막으로 프레임 제조사인 에어로믹스와 호리코시의 신모델 광고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놈은 들고 있던 로봇 잔해를 버리고 전자광고판넬을 들고 스타디움 안을 돌아다니다가 출구 쪽으로 쏙 들어갔다.
오프닝 매치가 끝나고 그다음은 R-3 리그의 크고 작은 싱글 타이틀 매치들이 진행되었다.
로봇들은 널따란 아레나에서 보다 폭넓은 기동을 선보이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로봇이 파괴되고 다른 로봇이 잔해를 들고 포효할 때마다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타이틀 매치가 아니라 로얄럼블이었고 이들 로봇들의 활약도 그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이윽고 밤이 되며 조명이 다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널따란 무대 위를 비췄다.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한 사람 한 명이 로봇 잔해를 밟으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 롱쎄잉 스타디움을 찾아주신 신사숙녀 여러분들! 반갑습니다아아! 오늘! 이곳 롱쎄잉 스타디움에서는 총 52기의 무시무시한 로봇들이 탑 파이브를 가리는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자는 관객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고 52기의 로봇을 한 대씩 소개했다.
R-3 리그 로봇들치고는 훌륭한 시설의 스타디움도 그렇고 관객들의 숫자도 그렇고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이었다.
– 아! 이 로봇의 전기톱 공격은 간담이 서늘하죠! 팀알렉세이의 매드쏘우! 그리고 최근 이 로봇을 모르면 월미도 R-3 리그에서는 북중국의 간첩이라죠오오! 싱글 매치 21전 전승! 태그매치 11전 11승의 신화! 제리이이이이이이이이!
사회자는 화제의 로봇인 제리 소개를 매드쏘우보다 더 길게 했다.
제리가 롤러대시로 힘차게 대기실을 박차고 나오며 그 어떤 때보다 더 높은 환호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리는 이번 로얄럼블 매치의 강력한 탑 파이브 후보였고 인기도 어마어마했다. 제리가 롱쎄잉 스타디움 외곽을 돌자 여기저기서 꽃다발과 인형 선물 따위가 쏟아져 내렸다.
제리는 팬들의 선물을 모두 주워들고 오른손을 높이 쳐든 채 멋지게 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았다.
제리가 스타디움을 돌 때도 속속 다른 로봇들이 소개되었지만, 사람들은 제리에게 환호성을 보내면서 다른 로봇들의 소개가 묻혔다.
제리는 횟집과 코카콜라 패치가 붙은 조끼를 입고 걸어 다니는 광고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는 쇼맨십만큼이나 격투 로봇에게 중요한 업무였다.
그러나 딱 하나 제리와 거의 비슷한 인기의 로봇이 있었다.
– 최근 태그매치로 데뷔해 제리와 함께 R-3 리그를 씹어먹는 로봇이 있습니다. 이름이 뭐지요오오?
사회자는 다 알면서도 관객석에 귀를 갖다 대며 듣는 시늉을 했다.
– 힌트를 드릴까요? 검은 프레임의 폭군! 검은 용!
사람들은 서서히 ‘어빈’을 연호하면서 발을 쿵쿵 굴렀다.
어빈! 어빈! 어빈!
– 자, 소개합니다! 제리의 파트너이자 검은 폭군! 어어어어어비이이이인!
사회자가 굉장히 과장되게 소개하거나 말거나, EV-1은 전혀 쇼맨십을 부리지 않고 그저 최단거리로 제리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롤러대시를 가동해 끽하고 멈춰 섰다.
“우아아아아! 어비이이인! 멋지다아아아! 난 너한테 전재산을 걸었어! 오늘도 잘 부탁한다아아아!”
“어빈! 오늘은 로봇을 몇 대나 부술거냐아아! 난 7대에 걸었어! 그 이상은 부수지 마!”
도박꾼은 물론이고 어린이 팬까지 어빈을 외치면서 검은 해적 깃발을 펄럭거렸다.
EV-1 원래 프레임이나, 어빈 프레임이나 사실 해적과는 별 상관없었다.
하지만 ‘동우 엔지니어링’이라는 하얀 글씨를 멀리서 보면 마치 졸리라저스 해적깃발처럼 보였고 팬들은 어빈에게 새로운 캐릭터성을 부여했다.
검은 폭군이니 블랙드래곤이니 흥행을 위해 갖다 붙인 온갖 수식어들이나 검은 깃발은 정작 로봇의 파트너인 이진영이나 EV-1은 굉장히 어색해했다.
하지만 지나가던 강력전담부장, 전 23팀 팀장에 따르면.
‘니들 비품 조달 안 나온다고 인천시경 창고 털었다메? 니들이 경찰이냐? 해적이나 산적이지. 월급 안 나오면 아주 국세청이나 한국은행 털겠다?’
이 한 마디로 44팀은 해적팀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해적 로봇(?) EV-1은 제리의 옆에서 조용히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사회자는 어빈의 뒤에 로봇 몇 대를 더 소개하고 마침내 ‘레이디스 앤 젠틀맨’ 멘트를 꺼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메인 매치인 로얄럼블을 시작하겠습니다. Let’s get ready to rum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