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0
제170화
럼블이라는 마지막 말이 길게 이어지면서 관객들의 환호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관객의 호응도가 높아질수록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세컨드와 관계자들의 긴장감도 최고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로봇들은 전혀 미동도 없이 시작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롱쎄잉 스타디움 주변으로 불꽃놀이 폭죽이 터지면서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가뜩이나 초여름 날씨라 저녁에도 후텁지근했고 하늘을 수놓은 불꽃들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경기장 바깥에 있는 관광객들도 하늘의 불꽃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불꽃이 터지고 삐잉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프음과 함께 경기장에 조명이 확하고 켜지고 마침내 로얄럼블 매치가 시작되었다.
각각의 로봇들은 52개의 동그라미 안에 서 있다가 비프음이 들리자마자 제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제리! 어빈과 합류해!”
이번 로얄럼블은 무거운 로봇은 참가할 수 없는 저체중급 매치였고 화려한 기술이 초반부터 작렬했다.
매드쏘우는 기다란 전기톱 팔로 바로 옆에 있던 제리를 공격했다. 제리는 전기톱을 피해 뒤로 백 스웨이를 하면서 물러났지만, 뒤에도 또 다른 적이 있었다.
미식축구 선수 컨셉의 로봇이 냅다 제리의 등짝에 몸통박치기를 먹였다.
미식축구 선수 로봇 비프케이크는 오직 몸통박치기에만 특화된 로봇이었고 다리는 외발자전거처럼 폭 1미터짜리 바퀴 하나만 달렸지만, 상반신은 미식축구선수처럼 역삼각형이었다.
놈은 바퀴의 이점을 살려 순간 가속으로 제리의 등짝을 박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얕은수에 당할 제리가 아니었다.
제리는 등을 뒤로 빼는 백 스웨이 자세를 하면서 뒤로 팔을 뻗어 비프케이크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가랑이를 좍 찢으면서 뒤로 사뿐하게 점프했다.
말타기 놀이를 정반대로 하는 것처럼 제리는 비프케이크의 머리 위를 타 넘었고 놈의 등 뒤로 착지하면서 전기톱과 몸통박치기 둘 다 가뿐하게 피해버렸다.
가가각!
매드쏘우의 전기톱이 비프케이크의 헤드에 처박히고 쇳조각과 윤활유를 사방에 튀기며 놈의 머리를 뜯어버렸다.
전기톱의 체인에 비프케이크의 케이블다발이 얽히고 머리 부분 부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달려오던 기세가 때문에 매드쏘우는 비프케이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쿵!
여기 있는 로봇들은 거의 비슷한 급의 로봇들이었고 매드쏘우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이걸 보고만 있을 제리가 아니었다.
매드쏘우는 제리와 함께 소개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꽤 강자였고, 제리는 초장에 강자 한 명을 제거하려 했다.
매드쏘우가 비프케이크와 충돌했을 때, 제리는 이미 땅에 착지했고 두 로봇의 옆으로 휘돌아서 매드쏘우의 심장부를 주먹으로 짓눌러 터뜨리려고 했다.
위잉!
제리는 오늘 시험 삼아 장착한 호버대시를 사용하여 공중에 20센티미터 정도 붕 뜬 채로 빠르게 매드쏘우에게 접근했다.
이대로 가속을 받아서 아래로 후려치면 매드쏘우도 끝장이었다.
그러나 이건 태그매치나 싱글매치가 아니라 로얄럼블이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를 먼저 제거하려고 드는 건 다른 로봇들도 똑같았다.
“제리이! 어빈이랑 합류하라니까!”
제리에게 달려든 건 둘 다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
하나는 볼링공과 꼭 닮은 공 모양의 로봇이었고 다른 하나는 불도저에 장갑판을 붙여놓은 것만 같았다.
로봇 격투 리그에서는 이런 식으로 원시적으로 생긴 로봇들이 비록 인기는 없을지라도 높은 승률을 자랑했다.
공 모양의 로봇은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톡톡 공격을 하며 점수를 쌓는 아마추어 권투식 경기운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볼링공 로봇은 그런 소극적인 로봇이 아니었다. 공 모양의 몸체에는 구멍이 두 개 나 있었고 그 구멍에서 강산성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무게 규정과 미사일 혹은 레일건 구동식 무기만 아니라면 뭐든지 오케이.
강산성 액체가 쓰러진 비프케이크의 등짝을 녹이더니 펑하고 배터리가 폭발했다. 배터리 폭발이 폭탄 조끼의 폭발로 이어지면서 사방으로 부식액과 로봇 파편이 터졌다.
카드드득.
롤러대시로 급히 피하려고 했던 다른 로봇 역시 부식액이 롤러대시에 맞으며 캐터필러가 분해되었다. 로봇은 어쩔 수 없이 롤러대시를 분리시키고 두 다리로 잠시 멈춰 섰다.
그때 불도저 로봇이 냅다 송곳이 삐죽삐죽한 장갑판을 들이밀며 그 로봇을 밀어버렸다.
로봇은 송곳에 꿰여 몸을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불도저는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리다가 링 경계에서 급정거했다.
송곳에 꽂힌 로봇이 관성의 힘으로 빠져나와 링 바깥에 패대기쳐졌다.
경기장은 약 2미터 정도 높이의 돌판 위였고 링아웃 되면 2미터나 되는 담벼락을 점프하거나 기어 올라와야 했다.
“안돼애애! 올라가! 올라가라고!”
제일 먼저 링아웃 된 로봇에게는 불운이 겹쳤다.
하필 불도저에 치였을 때 다리가 으스러지면서 로봇은 외다리로 콩콩 뛰면서 무대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로봇은 점프 기능이나 슬라스터 노즐을 장비하지 않은 상태였고, 결국 2미터나 되는 벽을 비참하게 걷다가 운명을 직감하고 동작을 멈췄다.
삐, 삐, 삐, 삐이이이익!
로얄럼블을 아는 관객들은 네 번의 신호가 울릴 때 발을 구르면서 ‘삐!’하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콰앙!!!
로봇의 폭탄 조끼가 폭발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장 가까운 관객석에 파편이 튀면서 몇몇 관중들은 부상을 입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불도저 로봇은 또 다른 로봇을 찍어서 무대 밖으로 내던졌고 이제 거의 모든 관객들이 발로 땅을 구르면서 ‘삐삐삐삑’을 외쳤다.
그러나 이번에 치인 로봇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니라 청소 로봇을 개조한 작은 자동차 같은 녀석이었다.
이 로봇은 두 바퀴를 굴리더니 풍뎅이처럼 길쭉한 갈고리 후크를 경기장 위쪽에 걸고 후크를 잡아당기며 간신히 무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관객들은 발을 구르다가 ‘아아아’하는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나 볼링공 로봇이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무대 위로 올라온 놈에게 부식액을 끼얹었다. 로봇은 부식액에 몸 반쪽이 부식되어 강도가 약해졌다.
볼링공 로봇의 무기는 부식액뿐만이 아니었다. 지닌 무게 자체도 훌륭한 무기였다. 놈은 냅다 청소 로봇 위로 몸을 굴리면서 청소 로봇의 프레임을 으스러뜨려 버렸다.
바퀴 하나가 깔리면서 청소 로봇의 바퀴 축이 퍽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볼링공 로봇은 처참하게 으스러진 로봇을 그냥 내버려 두고 다른 곳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청소 로봇은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했지만, 바퀴 전부가 볼링공 로봇에게 깔려 으스러지면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걸 본 관객들이 이번에는 박수를 치며 ‘하나! 둘! 셋!’하며 카운트를 셌다. 10까지 카운트를 센 후 무대 밖에 있던 정리 로봇이 갈고리 케이블로 청소 로봇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이 경우는 링아웃이 아니라 카운트아웃이라 폭발 조끼가 터지는 건 면했지만, 부식액에 녹고 프레임이 박살 나면서 어차피 완전파손이었다.
볼링공 로봇은 불도저 로봇과 한패였다.
그렇게 팀을 먹은 두 로봇은 링 위의 로봇들을 하나하나 줄여 나가고 있었다.
사실 두 놈은 처음부터 제리를 노렸지만, 제리는 호버대시를 사용하며 위기를 벗어났었다.
“제리! 저 볼링공 새끼는 신경 쓰지 마! 무게 제한 때문에 곧 부식액이 오링날 거야! 넌 링아웃만 신경 써! 그리고 빨리 어빈과 합류해!”
김용기는 열심히 강화유리 쉘터 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닿은 건지는 모르지만 제리는 연이어 호버대시를 사용하며 볼링공의 부식액 공격을 피했다.
다행히 호버대시와 부식액은 상극이었다.
아직도 곳곳에는 볼링공 녀석이 뿌린 부식액으로 바위가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볼링공은 무슨 약품처리를 해둔 건지 정작 놈의 본체는 멀쩡하게 부식액 밭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로봇들은 부식액 반응이 멈출 때까지 부식액이 안 뿌려진 바깥으로 도망쳤지만 그건 이 잔인한 태그팀이 바라는 결과였다.
애초에 볼링공 녀석은 불도저의 행동반경을 감안해서 부식액을 뿌렸고 부식액을 피해 도망 나온 로봇들은 차례로 불도저에 찍혀 링아웃 됐다.
그중 운이 좋은 로봇들은 간신히 폭탄 조끼가 터지는 것만은 면했지만, 다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삑, 삑, 삑, 삐이이이이익!”
관중들은 링아웃이 되어 폭탄 조끼가 터지는 걸 그 어떤 장면보다 즐거워했다. 또다시 역관절 방식 2족 보행 로봇이 무대로 되돌아오지 못하며 박살 났다.
두 다리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날아가면서 스타디움 전광판과 스페인 족발 매대에 처박혔다. 스페인 족발집이 로봇 다리에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족발 뼈가 사방으로 튀었다.
전광판에서 불꽃이 퍽퍽 터지면서 관중석으로 튀었지만, 오히려 관객들은 즐거워하면서 폭죽놀이를 하듯 그 밑에서 춤까지 추기도 했다.
볼링공 로봇과 불도저 로봇의 조합은 왜 휴머노이드나 2족 보행, 다족 보행 로봇이 로봇 격투에서 불리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리가 달린 로봇들은 다리를 잃으면 전투력이 감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전투 불능이 된다.
지금이 순간에도 휴머노이드 로봇 하나가 불도저 로봇의 전면 장갑판에 찍혀 액츄에이터가 터지며 검은 윤활유가 피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각 구동계에 쓸데없이 무게 배분을 해야 했고 밸런스 조절을 위해 섬세한 딥러닝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도저나 공모양 로봇이나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생김새였다.
심지어 불도저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무선조종 리모트컨트롤 카였다. 놈은 비싼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고 그냥 강화유리벽 바깥쪽에서 플레이어가 컨트롤러로 조종하고 있었다.
이런 기술은 이미 20세기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불도저 로봇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로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로봇 3원칙에 구동되는 인공지능 OS가 깔린 로봇만 로봇 리그에 참가하는 건 아니다. 로봇 리그에서는 무게 규정만 지킨다면 모든 것이 자유였기 때문이다.
EV-1처럼 비싼 인공지능 OS를 깔든 원시적인 리모트컨트롤로 직접 조종하든.
아니면 케이블을 연결해서 유선으로 조종하든.
움직이기만 하면 사무국에서는 아무런 제한 없이 신청을 받아주었다.
인간이 엑소슈트를 장착하고 직접 싸우지만 않는다면 뭐든지 오케이였다.
이런 전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균형까지 잡아야 하는 휴머노이드는 굉장히 불리했다.
밸런스 모듈이나 2족 보행 알고리즘을 구동시키려면 비교적 고가의 인공지능 OS가 필요한 점도 그렇다.
로봇 리그의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룰은 바로 ‘돈’이다.
휴머노이드는 정비도 부품도 그냥 떨렁 리모트컨트롤 기기보다는 단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두 번 나가떨어지면 솔직히 파이트머니나 기타 부수입과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김용기가 괜히 도박에 돈을 거는 게 아니었다.
모든 점에서 불리한 휴머노이드가 유리한 점이 딱 하나 있긴 했다.
같은 무게의 로봇이라면 불도저 로봇은 한 곳에 타점을 집중할 수도 특별히 달리는 속도 이상으로 가속할 수도 없다.
그러나 휴머노이드는 다르다. 인간의 격투기에서 한 점에 체중을 싣고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들처럼 휴머노이드 로봇도 잘만 딥러닝을 한다면 그게 가능했다.
1킬로그램의 힘으로 송곳으로 찌를 때와 책으로 때릴 때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먹이나 파일벙커 끝에 모든 힘을 폭발시킨다면 그 충격량은 같은 체급의 그 어떤 로봇도 따라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