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1
제171화
제리와 어빈은 그런 전투에 특화된 로봇이었다.
제리는 볼링공 로봇을 내버려 두고 불도저 로봇에게 달려들었다. 불도저 로봇은 엄밀히 따지자면 로봇도 아니었다.
“제리이이! 알지! 수신기를 찾아 박살 내! 안테나가 있을 거야! 저놈은 그냥 조종기로 움직이는 원시적인 기계야!”
불도저 로봇은 제리와 김용기가 처음 상대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로봇은 조종자와 연결을 끊기만 하면 그냥 바로 멈춰 선다.
하지만 말이 안테나 찾기지 제리가 무슨 수로 불도저의 안테나를 찾아낸단 말인가?
그러나 이곳에는 닳고 닳은 형사인 이진영에게 수많은 수사 경험을 체득한 수제자이자 파트너 EV-1, 어빈이 있었다.
어빈은 그래플러 기술로 근처에 있던 로봇 하나의 팔을 손쉽게 뽑아버리고 프레임을 통째로 바깥으로 집어 던졌다. 어빈은 쓸데없이 배터리 낭비를 하기보다 링아웃을 노리는 전략을 택했다.
펑!
불도저 로봇이 다가오기 직전. 어빈의 뒤에서 폭발이 터지고 폭파진동에 불도저 로봇의 무선수신 상태가 잠시 그 영향을 받는 듯 보였다.
어빈은 격투프레임에 달린 기초적인 센서만으로 무선신호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삼각측량하고 바로 수신기의 대략적인 위치를 잡아냈다.
불도저 로봇은 상업용 소형 불도저를 개조한 것으로서 수신기는 사람이 타는 좌석 밑에 있었다.
아무래도 아래쪽에 수신기를 달면 파손 우려가 있기도 했고 무선수신 상태를 위해서는 위쪽에 다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어빈은 고개를 돌리거나 삿대질을 하지 않고도 위치를 제리에게 알려줬고 제리 역시 곧바로 어디가 약점인지 알아챘다.
로봇끼리 의사소통은 인간의 언어구조를 거칠 필요가 없기에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이른바 고속기계어라고 불리는 로봇만의 의사소통 체계였다.
어빈이 삼각측량으로 불도저의 구조를 파악한 것과 제리가 불도저의 앞을 막아선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어딜! 제리고 어빈이고 다 뒈져라아아!”
부아아앙!
불도저는 굉음을 내며 가속하면서 위협적으로 장갑판을 들어버렸다. 플레이어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어빈, 제리를 동시에 장갑판에 꿰어 박살 낼 기세였다.
그러나 어빈이 한쪽 팔을 들더니 제리가 그 위에 발을 디뎠다. 제리가 발레라도 하듯 어빈의 팔을 디딤돌 삼아 위로 휙하고 날아올랐다.
그 순간, 관중들의 열광은 최고조에 달했다.
지금까지 볼링공과 불도저가 거의 모든 로봇들을 쓸어내면서 바닥을 발로 구르며 ‘삑삑삑삑’을 외치는 것도 재밌었다.
하지만 곧 단조로운 두 로봇의 공격 패턴에 약간 질리기 시작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제리는 체조선수처럼 중간에 몸을 휘돌리더니 거꾸로 곤두박질치면서 불도저 로봇의 등짝으로 떨어졌다.
“후후후훗, 이미 예상한 공격이라는. 죽어라, 날파리. 우주의 먼지가 되어라!”
불도저의 컨트롤러를 잡고 있는 살집이 두둑해 보이는 남자는 뿔테안경을 치켜들면서 유치한 대사를 제법 진지하게 치고 있었다.
슈슈슈슉!
불도저의 등짝이 열리며 쇠꼬챙이들이 위쪽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심판 로봇은 스캐너로 그것들을 확인했다.
이미 개체량 장비 스캔 때 위험한 물건이 없는지 확인은 했지만 저게 고화력 병기 미사일이거나 레일건, 화약식 총기 따위라면 불도저는 몰수패다.
하지만 불도저는 등짝에 파일벙커를 잔뜩 박아놓은 것뿐이었다.
“이름하여 거북선 전법! 하하하하하하!”
엉망인 네이밍 센스와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만한 표현과 달리 거북선 전법(?)은 효과적이었다.
불도저 로봇의 등짝으로 날아오른 제리의 팔이 파일벙커에 꿰여 으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냥 보고 있을 어빈이 아니었다. 어빈은 호버대시를 가동하더니 지금껏 수많은 로봇을 링아웃 시켰던 고슴도치 장갑판을 밀어붙였다.
카앙!
여기 나온 로봇들은 거의 비슷한 무게였고 휴머노이드라고 해도 불도저보다 가벼운 건 아니다. 불도저의 캐터필러가 뒤로 주르륵 밀리면서 제리는 파일벙커를 피했고 멋지게 주먹을 리모트컨트롤 모듈에 꽂아 넣었다.
두 로봇이 각각 리모트컨트롤 모듈과 고슴도치 장갑판에 펀치를 꽂아 넣은 것 또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캉! 캉!
두 번의 금속음이 연속해서 울려 퍼지면서 불도저의 움직임이 멎었다.
등짝에서 일제히 터져 나오던 파일벙커도 그대로 멈춘 상황.
제리는 놈의 리모트 콘트롤 모듈을 뽑아서 그걸 관중석에 확인시켜줬다.
그러나 지금은 쇼맨십을 보여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심판 로봇이 불도저 옆으로 달려와 카운트를 하다 8이 되었을 때였다.
남자는 뿔테안경을 치켜올리면서 지금까지 들고 있던 컨트롤러를 휙 하고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관중들에게 보여줬다. 놈이 컨트롤러를 집어 던지자마자 불도저가 다시 움직였다.
“하하하하!! 우리 킬도저를 우습게 보지 마라!”
로봇 안에 뭐가 들었든, 어떤 구동 방식으로 움직이든 심판 로봇의 10번의 카운트 안에 다시 움직이면 실격패가 아니었다. 킬도저가 다시 움직이면서 장갑판 앞에 있던 어빈이 바로 링아웃의 위기에 몰렸다.
카앙!
하필 어빈의 바로 뒤는 무대 아래였고 킬도저는 어빈을 튕겨내고 바로 캐터필러를 휘돌려 옆으로 방향을 꺾었다.
어빈이 링아웃 되자 관객들은 신나서 ‘삑삑’을 연발했다.
이번에는 제리가 어빈을 도왔다.
킬도저에서 내려온 제리는 어빈 쪽으로 케이블 다발을 던졌고 어빈은 홍콩 무협 와이어 액션을 하듯 붕하고 날아올라 삑삑 두 번 만에 무대 위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킬도저와 부식액을 내뿜는 볼링공은 여전히 로얄럼블 현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분명 조종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킬도저는 청소 로봇을 개조한 덩치를 전면 장갑판으로 꿰어 퉁하고 밖으로 내던졌다.
바퀴로 움직이는 로봇들은 전복되었을 때 위아래를 뒤집는 장치가 반드시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운 없는 청소 로봇은 거꾸로 떨어지면서 그 장치를 작동하기도 전에 네 번의 링아웃 카운터에 걸렸다.
콰앙!!!
고무 타이어가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 돌벽에 부딪히더니 관객석을 덮치면서 한 명이 타이어에 깔려 중상을 입었다.
오늘 로얄럼블 경기는 굉장히 위험했지만, 관광객이나 로봇 격투 팬들은 오히려 사람이 다치고 박살 나는 걸 보면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이런 스릴을 맛보기 위해 로봇 격투 현장을 찾는다.
또다시 킬도저가 불운한 희생자를 찾기 위해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고 이쪽에서는 볼링공 녀석이 냅다 데굴데굴 달리다가 또 다른 로봇을 들이받아 링아웃 시켰다.
한쪽은 볼링공, 한쪽은 킬도저.
어빈과 제리는 호버 대시를 간간이 사용하며 둘과의 대결을 피하고 다른 로봇들을 먼저 KO 시키고 있었다.
“와오, 머리 좀 굴렸군.”
지직거리는 화면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이진영은 킬도저의 움직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 EV-1, 어빈의 옆에는 세컨드로 김대현이 붙어 있었지만 진짜 세컨드는 김대현이 아니었다.
“이브이, 킬도저 저거 도로 표식 그리는 로봇이다.”
– 그건 퍼지(Fuzzy) 아닙니까?
“그래, 옛날 세탁기나 전기밥솥 광고에나 나올 기초적인 인공지능이지. 놈은 경기장 외곽을 따라가고 있어. 참 기가 맥힌 속임수로군.”
킬도저는 전기밥솥이나 세탁기, 도로표식 도장 로봇처럼 일정한 작업만을 수행하기 위한 퍼지 인공지능을 장착했다.
퍼지는 퍼지함수를 이용한 인공지능이었고 1990년 전후에나 반짝 빛을 본 원시적인 기능이었다.
킬도저의 행동 원리는 간단했다.
이 로봇의 주인은 먼저 경기장의 외곽 테두리를 먼저 스캔해서 코드를 짰고 불도저는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그 밖을 벗어나지만 않게 설계했다.
즉 계속해서 일정한 도로 안내선을 긋는 로봇이나 일정 간격으로 화단 꽃을 심는 로봇처럼.
킬도저는 오직 상대방 로봇을 링아웃 시키는 기능에만 충실한 일종의 ‘전임 인공지능’이었다.
어빈은 그 말을 듣자마자 킬도저의 약점을 알아챘다.
– 정면에만 서 있지 않으면 된다는 거군요.
“아니지 마타도르 선생? 용기 있는 마타도르라면 황소를 잔뜩 화나게 만들어서 끝장을 내버리라고”
– 하하, 팀장님, 이곳에서 붉은 천을 흔들면 북중국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EV-1, 어빈은 재치 있는 말투로 이진영의 농담을 받아치고 킬도저의 앞에 섰다.
킬도저는 간단한 레이저 센서로 어빈을 인식하고 어빈을 링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가속했다.
그때 어빈은 도어노커 탄약을 터뜨리며 경기장 모서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동색 탄피가 퉁하고 튕겨지면서 어빈의 손자국이 돌 위에 자자작하고 새겨졌다. 곧이어 돌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뭉탱이가 떨어져 나갔다.
– 어빈, 위험하다.
– 제리, 걱정 마라. 킬도저는 내가 기동정지 시키겠다.
어빈은 쇼맨십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빈은 제리도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쇼맨십을 선보였다.
킬도저는 제리를 노리고 미친 듯이 돌진했고 어빈은 아슬아슬한 순간 옆으로 슥하고 비켜서면서 킬도저의 전면 송곳을 피했다.
“아, 안 돼애애애애!”
지금까지 여유만만했던 살찐 남자가 강화유리벽을 치면서 절규했다.
어빈은 단순히 경기장 외곽을 박살 낸 게 아니라 퍼지 인공지능이 인식하는 가이드 선을 박살 낸 것이다.
킬도저는 레이저 센서로 경기장 외곽을 인식하는 방식이었고 어빈은 이미 센서 한계를 알고 가이드 선이 되는 모서리 부분을 붕괴시켰다.
킬도저는 모서리의 높낮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냅다 2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쾅!
킬도저의 앞부분이 거꾸로 처박히고 캐터필러만 경기장 끝에 걸려 카가각 돌가루를 어빈에게 튀겼다.
어빈은 발로 툭 차서 킬도저를 옆으로 밀었고 킬도저는 옆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지금껏 킬도저의 무자비한 링아웃을 즐거워했던 관객들이 이번에는 킬도저의 링아웃 카운트를 기꺼이 발을 구르며 셌다.
“하나, 둘, 셋, 네에에에에엣!”
쾅! 킬도저의 상단부가 터져나가며 킬도저의 캐터필러고 배터리팩이고 전부 박살이 났다.
살찐 남자는 강화유리에 머리를 쾅쾅 들이받으며 난동을 부렸다.
“킬도저가아아! 킬도저가아아아!”
만약 킬도저가 기초적인 인공지능이 달려 있다면 이런 어이없는 링아웃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인공지능의 등급과 단가도 로봇 격투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강적 킬도저를 링아웃시켰지만 아직도 위기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경기장 무대 위에는 어지간한 로봇들은 링아웃 된 후 11대의 로봇들이 남아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 어빈, 제리! 둘 다 살아남습니다! 볼링공 모양의 킬러비 역시 살아남았고 이제 남은 건 베스트 일레븐! 지금부터 게임은 시작이죠!
어지간한 로봇들이 앗하는 사이에 쓸려나가며 무대는 굉장히 넓어졌고 로봇들은 이제 소모성 병기를 거의 다 써버렸다.
볼링공 모양의 킬러비는 초반에는 부식액을 뿜어내며 로봇들을 하나둘 퇴장시켰지만, 지금은 그냥 조용히 무대 중앙에 멈춰 서서 다른 로봇들의 간을 보고 있었다.
– 후반으로 갈수록 소모품을 많이 장비한 로봇들이 불리하죠오!
– 예, 맞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소모품 병기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것도 문제지요.
딜레마다.
로봇 격투는 뒤로 갈수록 도어노커 탄피나 여분의 배터리 전원을 다 쓴 쪽이 불리하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서는 초반을 넘기기 힘들었다.
김용기가 이 로얄럼블이 캐논볼 레이스의 초반과 비슷할 거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제리와 어빈은 가능한 한 후반부까지 소모품과 배터리를 아끼면서 버텨야 했고, 링아웃이 있는 로얄럼블에서는 ‘거북이 전략’이 유효할 때도 있었다.
– 아, 왈도 거북이 전략을 썼군요! 전혀 전투에 휩쓸리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치사하지만 좋은 방법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