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2
제172화
왈도는 경량급 엑소슈트 아처를 라이트급 격투 로봇으로 개조한 물건이었고 인간이 조종하는 구동계를 전부 들어내고 아슬아슬하게 무게를 맞췄다.
이 녀석은 인공지능도 그저 그랬고 이번 게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전 배당률 역시 3점대로 꽤 높은 수준이었다.
롤러대시가 달리지 않은 왈도의 두 발밑에는 부식액이나 늪지 지형을 대비해서 넓적한 접시 같은 발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킬러비의 부식액 공격을 막아내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다른 로봇들이 합심해서 왈도에게 덤벼들었다.
왈도는 로봇 두 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별다른 반격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저 자세를 낮추기만 했다.
쾅!
바퀴가 달린 로봇 두 대가 왈도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지만 왈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빈과 제리는 서로 나란히 서서 다른 로봇들이 싸우는 걸 바라보며 세컨드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브이, 왈도는 버티기 전용이야. 딱 보니 오뚝이처럼 밸런스에만 중점을 뒀다. 다른 놈을 노려.”
킬도저처럼 왈도는 로얄럼블에 맞게 장비를 전부 교체했고 무게 전부를 밸런스 모듈과 중량 배분에만 신경 썼다.
마디로 그냥 쇠로 만든 추를 경기장에 갖다 놓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 왈도는 접시 같은 발을 이용해서 움직이기는 했지만 다른 로봇들과 교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버티고만 있었다.
“저게 뭐야! 게임 좆같이 하네에에! 우리는 치고받는 걸 보고 싶었다고오오!”
“저딴 게 무슨 로봇 배틀이야아아! 내 돈 물어내!”
탑 파이브로 다른 로봇을 뽑은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개체량 때 각 로봇의 장비는 공지가 된 부분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왈도에게 배팅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김용기가 뽑은 탑 파이브 중에는 왈도도 있다.
“제리! 이제 남은 놈은 저 킬러비야! 저 새끼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해!”
김용기는 순전히 자신의 도박복표 때문에 제리에게 볼링공 같은 킬러비를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
킬러비는 싸구려 마술사의 수정구슬처럼 경기장 무대 중앙에서 버티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만약, ‘생존’ 그 자체가 목표였다면 제리는 킬러비를 건드리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러나 이 로얄럼블 게임은 도박이었고 로봇들은 도박 배당률의 흐름에 따라 서로를 이 지옥의 링에서 밀어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이었다.
김용기처럼 팀의 책임자가 도박에 걸기도 했고, 또 다른 거물 도박사들의 입김이 로봇팀에게 미치며 경기장 위의 판세가 바뀌었다.
– 아 말씀드린 순간 제리가 움직였습니다! 화려한 휴머노이드 테크니션! 킬러비에게 돌격합니다!
킬러비는 제리를 인식하고 바로 기잉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였다.
치익.
부식액을 다 썼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컴프레셔로 부식액이 안개처럼 퍽하고 터져나가고 제리는 부식액을 피해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처럼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킬러비는 이미 그것도 예상했다는 듯 은색 몸체를 굴려서 냅다 제리를 들이받았다.
만약 동우 엔지니어링에서 호버대시 모듈을 받지 않았다면 제리는 킬러비의 이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킬러비에는 제대로 된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었고, 지체 없이 제리를 부식액이 흩뿌려진 곳으로 몰아세웠다.
은색 공 같은 킬러비의 몸체가 아슬아슬하게 제리를 스쳐 지나가고 제리는 호버대시를 가동하며 검은 부식액 위에 살짝 뜬 채로 좍 미끄러졌다.
그러나 로얄럼블에서는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다.
지금껏 조용히 간을 보던 왈도가 갑자기 매니퓰레이터 암을 펼치며 제리에게 레슬링 기술인 ‘크로스라인’을 걸었다.
제리는 림보 놀이를 하는 것처럼 허리를 바짝 뒤로 꺾으며 크로스라인을 피했지만, 이번에는 킬러비의 몸통박치기였다.
은색 구슬 같은 킬러비가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냅다 제리를 들이받아 버렸다.
킬러비의 매끈한 몸체에는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고 하나는 부식액 분사기, 또 하나는.
“제리! 파일벙커다! 그 새끼 무기가 두 개야아아!”
킬러비는 어디로 들이박을지까지 계산했고, 제리의 가슴팍에 구멍 하나가 닿자마자 숨겨진 파일벙커를 사출했다.
캉!
길이 1.5미터로 꽤 길쭉한 파일벙커가 제리의 옆구리를 완전히 관통했다. 킬러비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놈은 제리를 찍고는 내부의 무게추를 가동시켜 달려온 방향과 반대로 공 모양의 몸을 틀었다.
제리의 몸이 말뚝에 꿰인 허수아비처럼 들어 올려지고 킬러비는 그대로 제리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아까 청소 로봇이 으스러졌을 때처럼 제리의 팔다리가 손상된다면 이 공격을 피한다고 해도 여전히 위험했다.
“어빈! 뭐 하는 거냐! 네 파트너가 당하고 있잖아!”
어빈, 제리의 태그팀에 돈을 건 사람들이 마구 어빈에게 고함을 지르며 욕까지 했다.
도박꾼은 내 돈을 따줄 때만 ‘어이구 내 새끼’지 돈을 잃으면 우상이고 뭐고 없었다.
–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라면 그냥 전투를 피하는 것이 최적의 승리패턴입니다.
EV-1에게 로얄럼블의 승리는 알 바 아니었다. EV-1은 어디까지나 경찰 로봇이었고 그는 로봇이 서로를 때려 부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봇 3원칙을 어떤 로봇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제3원칙. 1, 2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상대방 로봇을 박살 내고 살아남아라!’라는 것이 인간의 명령이라고 치면 단순 리모트컨트롤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모든 인공지능들은 로봇 공학 2원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EV-1은 상대방 로봇을 파괴하거나 기동정지가 목적인 로봇 격투가 인간에게 무슨 득이 되는 건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진영의 말대로 로봇 격투는 뒤틀린 인간의 파괴본능을 해소하기 위한 검투놀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브이, 그냥 도와줘. 제리가 없으면 우리도 곤란하니까. 명배우 이브이 선생, 언더커버에 충실하셔야지?”
– 스타니 슬랍스키 식 메소드 연기를 기대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요.
x3 대출은 계획적으로, 계약서를 확인할 때는 깨알 같은 글씨에 주의하세요.
EV-1, 어빈이 제리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동안 태그매치 경기를 11번이나 치르며 어빈과 제리는 호흡을 맞췄었다.
제리가 킬러비에게 고전하고 있을 때 어빈이 반대 방향에서 호버대시를 가동하며 달려왔다.
킬러비는 어빈이 가세하는 걸 보고도 제리를 먼저 끝장을 내려고 했다.
놈이 파일벙커를 숨겨진 구멍으로 되돌리면서 제리를 아래로 패대기쳤다. 파일벙커가 은색 몸체로 쏙하고 들어가고 제리의 다리가 깔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리의 자세는 완전히 무너졌고 다리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 제리이이! 스트레이트으으으!”
사람으로 치면 쓰러지기 직전 완전히 어깨가 빠진 상태에서 날리는 펀치였다. 하지만 제리의 펀치는 정확히 놈의 부식액 분사기에 작렬했다.
자로 잰 듯한 펀치였고 킬러비의 인공지능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수였다.
퍽!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부식액에 대번에 제리의 오른손이 부식되었고 케이블이 녹아 지글지글 끓어오르며 바닥에 떨어진다.
제리는 오른쪽 팔을 분리하고 킬러비에게서 떨어졌다.
부식액 컴프레셔가 안쪽에서 터지면서 킬러비의 안쪽 부품들이 녹아내리고 킬러비는 통제 불능이 되었다
제리는 킬러비를 바라보며 벙어리장갑 같은 왼손을 놈에게 겨누더니 마치 콜로세움에서 황제의 손가락이 어디를 향하는지 지켜보는 검투사처럼 관객석을 바라봤다.
이 또한 김용기가 가르친 쇼맨십이었다.
“제리! 끝장을 내!”
“저 개같은 방구쟁이를 링아웃 시켜버려!”
“제리이이! 킬러비를 박살내 버려어어어!”
킬러비에게 돈을 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킬러비를 처형하라며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완전히 무력화된 로봇이 등장하면 가끔 나오는 상황이었다.
처형 명령이 떨어지자 제리는 무자비하게 킬러비를 발로 걷어찼다.
부식액이 은색 몸체 안쪽에서 터지면서 킬러비는 이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심판 로봇이 텐 카운트를 세서 끌려 나가게 할 수도 있었지만 제리는 놈을 걷어차서 링아웃 시켰다.
또다시 킬러비의 세컨드가 강화유리 안에서 절규하며 발광했다.
킬러비는 링 밖에서 맥없이 데굴데굴 구르다가 삑삑삑삑하는 네 박자 소리가 끝난 후 폭발에 휩쓸렸다.
동그란 초합금 반구가 핫도그 집으로 날아들면서 끓는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끝장난 건 킬러비만이 아니었다.
– 아아아! 제리의 뒤를 지켜주던 어빈! 그래플링 기술로 왈도를 완전히 끝장냅니다아아!
왈도는 쇼맨십을 부리고 있는 제리를 뒤에서 덮치려고 했고 그 왈도를 어빈이 막아섰다.
검투사처럼 화려한 쇼맨쉽을 보여줬던 제리와는 정반대였다.
자세를 낮추고 방어하던 왈도의 오른팔이 몸에서 뻗어나오자마자 어빈은 그 팔을 양손으로 잡고 발로 걷어차서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왈도의 다리를 잡아서 씨름의 밭다리걸기로 쓰러뜨리곤 주먹으로 마구 왈도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카앙!
도어노커가 또다시 터지면서 파일벙커가 왈도의 가슴을 꿰뚫었다.
배터리 모듈이 터지면서 왈도는 완전 정지되었고 심판 로봇이 확인하지도 않고 두 팔을 마구 흔들며 왈도가 KO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 아! 어빈! 자신의 동료를 뒤에서 덮치려는 왈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저 야만적인 로봇을 보십시오! 저것이 현재 R-3 리그를 씹어 드시고 있는 검은 폭군입니다!
어빈은 전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제리를 쳐다봤다. 제리는 감사를 표시하는 건지 그저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 탑 파이브 결정! 어빈, 제리, 매드쏘우, 청마일발, 웬사이! 탑 파이브 결정 되었습니다아아아아!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프리 로봇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어빈과 제리에게 달려드는 로봇들을 말렸다.
특히 매드쏘우는 초반에 어빈과 제리에게 당해 초반부터 탈락할 뻔했는지라 심판 로봇들에게 제지를 당하면서도 달려들려고 했다.
“아…….”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로얄럼블을 즐겼지만 몇몇 사람들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배당권 복표를 찢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제리의 주인이자 세컨드인 김용기도 있었다.
김용기는 탑 파이브 중 하나로 왈도를 꼽았고, 하필이면 제리의 파트너인 어빈이 왈도를 처참하게 박살 내면서 그는 전혀 돈을 딸 수 없었다.
로얄럼블은 끝까지 살아남는 로봇 5대를 맞추지 못하면 아예 배당이 안 되는 구조였다.
“으아아아아아아! 대리님! 나 됐어요! 맞았다고오요요!”
김용기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유인환은 끝에 남은 다섯 기의 로봇을 전부 맞췄다.
특히 고물 로봇이라 금방 쓰러질 줄 알았던 청마일발이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고 살아남으면서 1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배당액에 당첨되었다.
김용기는 즐거워하는 유인환을 보면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왜 그래요? 김 사장님? 아, 설마 제리 팔 한쪽 날아간 것 때문에 그래요?”
“아니, 그, 그, 그건 아니에요. 부품값은 있어요. 저, 잠시만 먼저 화장실에. 저, 정비나 그런 건 서 씨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김용기는 말까지 마구 더듬으며 화장실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장난삼아 오늘 경기에 모든 걸 건 게 아니었다.
짤짤이나 다를 바 없는 태그매치 경기보다 오늘 경기는 큰돈을 벌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유인환은 거액을 손에 넣었다.
유인환이 로봇을 고를 때 똑같이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김용기는 유인환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돈을 버릴 거라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전 재산을 오늘 로얄럼블에 걸었다. 전 재산뿐만이 아니다.
김용기가 어푸어푸 세수를 하다 거울을 바라보니 어느새 등 뒤에는 낯익은 특공복 차림의 수금원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