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4
제174화
“아이고 팀장님. 주말마다 야구 내기하시는 분이 저한테 설교십니까?”
“시끄럽고. 오늘도 트윈스가 베어스에게 이겼다. 내놔.”
이진영은 5만 원짜리 한 장을 유인환에게 빼앗아 갔고 윤숙희는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정말 누가 누구에게 설교하는 건지. 아무튼 팀장님, 김상현 선배와 저는 폭약의 흐름을 쫓았습니다.”
거의 반쯤 졸고 있던 김상현이 자기 이름을 듣고 잠에서 깼다.
“어, 예, 맞아요.”
“맞긴 뭐가 맞아 임마. 딱밤이나 맞아라.”
김상현은 이진영에게 딱밤을 맞고 한바탕 우당탕 소란이 일어났다.
“여기가 남고 교실인지, 형사들 모여 있는 곳인지…… 에휴.”
윤숙희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해군과 해안경비대에 확인했는데, 웡꺼 쪽의 밀수선이 북한 영해를 통해 왔다 갔다 한답니다. 스케줄도 딱 보면 캐논볼 레이스에 맞춰져 있어요.”
“폭탄을 들여오고 있군.”
이진영은 김상현과 장난치다 말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아무리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유능해도 웡꺼의 반잠수정이나 잠수함을 전부 다 잡아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서해 섬들 근처는 해류도 지랄 같고 소나가 맥을 못 추는 마의 바다였다.
“캐논볼 레이스 코스는 나왔어?”
이진영은 임은혜를 바라봤다. 임은혜도 연일 각종 백업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장현권 사건 때처럼 강력부에서 수많은 사건이 내려오는 게 아니었지만. 잠입수사라는 게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다.
44팀 팀원들은 확실한 물증을 잡을 때까지 대충 회사를 꾸려가는 흉내만 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빈의 활약으로 정말로 동우 엔지니어링이 유명해지면서 이쪽으로 로봇 발주를 넣는 회사들이 많아졌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몇몇 로봇은 제작 의뢰를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팀장님, 이럴 바엔 그냥 로봇 회사 하나 차리는 게 낫겠어요. 실적 좀 나아지면 보험사에서 나종 보험 영업 올 거 같지 않아요? 세상에 오늘도 공작용 로봇 제작해 달라고 세 군데서 발주 주문이 들어왔다니까요.”
“브아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냐? 부품 수급은 본청을 통해 마진 없이 아선이나 다른 메이커에서 들여오니까 가능한 거지. 아마 이대로 회사를 차렸다간 다 같이 거지꼴이 될 거야.”
이진영은 임은혜에게도 살짝 딱밤을 때렸다.
위장회사 동우 엔지니어링은 사실상 껍데기고 그 뒤에는 마이크로웍스와 아선 인더스트리가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이크로웍스는 위장회사를 설립한다는 본청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고 인맥과 계열사를 동원해 동우 엔지니어링을 지원했다.
어빈과 제리가 양질의 부품을 값싼 가격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도 그 루트를 통해서였다.
“아무튼, 오늘 로얄럼블을 보니 리모트컨트롤 로봇을 주의해야겠어.”
– 예, 팀장님. 제가 직접 싸워보니 알겠더군요. 의외로 이런 단순한 기계들이 검문을 회피하긴 좋을 겁니다.
“하긴, 로봇 3원칙을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이미 본청에 주파수 블락하라고 말해놨어. 리모트컨트롤로 폭탄을 나르기는 힘들 거야.”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초창기에는 무선조종 자동차에 폭탄을 싣고 공장을 때려 부수기도 했다.
지금은 각지에 설치된 주파수 교란 장비로 소용이 없을 테지만 빈틈을 파고드는 경우도 충분히 생각해 봄 직했다.
“자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놀러 나온 거 아니야. 타격 목표, 수단 이것만 신경 쓰자고. 특히 너 유인원 이 시끼야.”
“아, 그 별명으로는 부르지 마시라니까.”
“아, 그리고 전상영 선배. 군 EOD랑 협력은 잘 되시나요?”
이런 소문난 잔치에 육군이 빠질 리 없었다. 육군은 세계 최대의 폭탄 해체부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육군과 협력해야 했다.
전상영은 포메라니안을 쓰다듬으며 음침한 표정으로 시무룩해했다.
“말을 안들어. 언 리즈너블.”
“예, 그래도 선배님의 노하우가 많이 필요할 거에요. 지금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난 육군이 싫어. 그치요? 프랑소와즈?”
개 이름은 프랑소와즈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진영이 그놈의 프랑소와즈 어쩌고 하면서 타박을 주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통신기를 쥐고 팀원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아무튼 내일도 캐논볼 레이스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다들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이대현, 임은혜. 연애질은 월미도에서 하지 말고. 염장 질려서 뒈지겠다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두 사람은 입을 삐죽거리고 항변하려 했지만, 이진영은 쉿하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면서 전화를 받았다.
– 잘 지냈나요? 뭐 해요?
“뭐래애? 안 좋게 헤어진 남자친구도 아니고.
– 하하, 보고 싶지 않았나 봐요?
“더더욱 헤어진 남자친구에게서 듣기 싫은 말 베스트군요. 그래 이 야심한 밤에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에요?”
팀원들은 이진영이 혹시나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뜬 게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상현을 제외하고 44팀 팀원들은 전화를 건 사람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김상현도 전화 통화만으로 이진영이 무슨 뜬구름을 잡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오케이, 근데 제가 주안이라. 아 이쪽으로 오신다고요? 나 참 전국에서 술맛 나는 술집들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알았어요. 거기서 뵙죠.”
술이라는 말에 전화를 끊고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진영을 바라봤다. 특히 전상영은 포메라니안과 함께 쌍으로 눈을 반짝였다.
하여튼 술 마시는 이야기만 나오면 44팀 팀원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진영을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기고 따를 기세였다.
“아이구, 다들 안 됐네요. 오늘은 비밀 데이트라.”
“데이트요?”
“예압. 윤숙희씨. 불 끄고 가고요? 그리고 혹시나 미행 이런 거 다 안 됩니다. 이브이가 다 캐치해 낼 테니까. 가자 이브이.”
이진영이 EV-1만 데리고 나가려 하자 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브이는 왜 데려가시는데요?”
“그야, 수사의 일환이랄까?”
“또또, 이상한 일 꾸미시는 거 아니에요?”
임은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진영 흉내를 냈다. 이진영은 와이퍼처럼 검지를 까딱거렸다.
“너는 김대현이랑 술 마시면 되잖아? 왜 아자씨를 따라오려고 그러는데?”
“대현 오빠랑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오오오오. 나와쓰! 대현 오빠랜다아아아! 직장에서 오빠라고 부르게 되어 있나? 임은혜 팀원?”
좋은 먹잇감을 내버려 둘 44팀이 아니었다. 팀원들은 너도나도 임은혜와 김대현을 마구 놀렸다.
“아무튼, 아무도 따라오지 마. 야생동물처럼 수줍음이 많은 친구라 모르는 사람이 나오면 냅다 도망갈지도 몰라.”
그 말에 김상현을 제외한 사람들은 정말로 곰이나 늑대 혹은 귀여운 토끼 같은 야생동물을 제각각 떠올렸다.
이진영은 오랜만에 친구를 보는 데 굳이 팀원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진영은 동우 엔지니어링을 나와 삼강 주유소로 향했다.
* * *
주안역 근처는 재개발이 실패하면서 허름한 콘크리트 빌딩들이 많았고 옛 주유소 건물을 재활용한 실내 포장마차가 영업 중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이브이? 그래…… 그게 아마.”
이진영도 신희정을 언제 만났는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이진영은 포장마차 자리에 앉았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가 은근슬쩍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씨구. 안 좋게 헤어진 남자친구치고는 매너가 있으시네요? 먼저 나와서 기다리시다니?”
“그럼요. 밤에 전화해서 질척거리려면 최소한 매너는 좋아야 하니까.”
서로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이진영은 신희정과 반갑게 악수했다.
44팀이 결성될 때 만나고 지금이니 거의 4, 5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어이구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는 신수가 훤해지셨네? 요새 다들 죽겄다 난린데 그쪽은 경기 좋은가 봐요?”
이진영은 신희정이 입은 옷만 보고도 그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신희정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검은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었고 면도도 깔끔하게 했다. 신희정은 꽤나 잘생긴 편이었고 새로 맞춘 수트도 잘 어울렸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이 힐끔힐끔 신희정을 쳐다볼 정도였다.
신희정은 여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의식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예, 뭐 이번에도 경위님 도움을 받았네요. JHK.”
장현권.
정보국의 일부는 민족민생당 대통령 후보 장동천에게 배팅했고, 그 결과 ‘언니야’를 비롯한 수많은 요원들이 JHK 스캔들로 갈려 나갔다.
아무리 레임덕 기간이라지만 차기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려고 했던 정보국을 정부에서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 결과 신희정은 친 장동천 계열이었던 정보국 내부 세력들이 쓸려나간 덕분에 복직할 수 있었다.
“전에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 비긴 걸로 하죠.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만 아니었으면 요원님이 밖으로 나도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이진영은 담백하게 말했다.
신희정은 정 대령을 살려서 놔줬기 때문에 누명을 쓰고 반역자로 쫓겼었다.
“에헤이, 우울한 과거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왔으니 그거면 된 겁니다.”
두 사람은 소줏잔을 들고 짠하고 건배를 한 후 멋지게 잔을 내려놓았다.
“자 이제 근황 토크?”
전에 바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은 패턴이라 신희정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님도 이제 제가 복직했다는 건 아실 테고. 우리 회사 내부의 복잡한 정치지형도 솔직히 궁금은 하실 테지만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아실 테고.”
“와, 그럼 진짜 술이나 한잔하자고 부르신 건가요?”
“거 팀장님은 제가 그렇게 정 없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그래도 알고 지낸 게…… 어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신희정과는 작년 백헌강 사건을 계기로 친해졌었다. 이진영과 신희정은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은 얼마 안 됐지만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서로를 깊이 신뢰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소주잔을 채우고 연거푸 다섯 잔을 들이켰다.
어느새 테이블에는 소주병이 점점 쌓여 갔고, 두 사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 뒤에 앉아계신 분이 두 분을 게이 커플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한쪽 옆에 서 있던 EV-1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진영도 그럭저럭 남자답게 잘생겼고 신희정은 거의 연예인 로봇처럼 잘생겼는지라 그런 오해를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술을 꼭지가 돌아가도록 마실 때도 가끔 그런 오해를 받았다.
“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빈의 활약도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브이, 요즘 어때?”
– 여전히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로봇 3원칙에 비춰보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신희정은 이진영에게 술을 따라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고지식한 로봇과 만나는 것도 은근 기대했었다.
“이브이, 대충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왠지 알 것 같다. 로봇 3원칙에는 십계명에 있는 말이 부분적으로 빠져있으니까.”
EV-1은 고개를 갸웃하며 신희정의 설명을 기다렸다.
“로봇 공학 3원칙은 너희들의 십계명이야. 1원칙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2원칙 인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건 야훼가 유일신이며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 3계명까지의 규칙과 일맥상통하지. 이건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규정들이야.”
EV-1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신희정을 바라봤다.
“나머지 십계명의 구절들은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거나 도둑질이나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피조물 사회에 관한 규정이야. 너한테 아내가 있거나 도둑질은 의미가 없으니 해당이 안 되는 규정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