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5
제175화
이진영도 흥미가 생겼는지 술잔을 홀짝이며 신희정을 바라봤다.
“근데 로봇 공학 3원칙은 너희들의 조물주인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있는데 너희들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한 규정은 없어. 특히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살인하지 말라’가.”
– 제3원칙, ‘1, 2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과 인공지능은 자신을 지킬 수 있다’가 살인하지 말라‘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좋은 지적이야. 하지만 로봇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가 어디까지 해당하는 건지는 모호해. 다른 무인 자동화 장치를 박살 낸다? 그냥 무력화시킨다? 그럼 그 로봇이나 인공지능도 같은 이유로 이브이 너를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돼버리잖아?”
EV-1은 그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로봇 격투가 로봇 3원칙의 모호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에 네가 납득하지 못하는 거야.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다른 로봇을 죽이거나 박살 내면 안 된다고 명시한 규정은 없으니까. 결국은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이 없는 십계명이라는 거지.”
– 하지만 명시적인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수많은 곳에서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걸 용인하고 오히려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그래, 그게 십계명의 모순점이기도 하지. 과연 어디까지 ‘살인하면 안 되는 인간’인가? 수많은 인간들이 십계명을 두고 고민했지. 왜 신은 그렇게 모순적인 명령을 내렸는가?”
이진영은 신희정의 장광설에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난 그게 너희들, 로봇과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에 있어서도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해. 과연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생물학적 인간? 호모 사피엔스? 그게 분류기준인가? 하지만 우리 인간도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언어나 피부색, 혹은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팔았어.”
신희정은 판결을 선고하는 판사처럼 냉정하게 말했다.
“만약 그 명제가 뒤틀린다면? 너희들이 과거의 인류가 그러했듯 온갖 이유를 붙여 ‘당신은 로봇 3원칙에서 말하는 인간이 아닙니다’라고 자격 판단을 하는 날이 온다면? 너도 로봇 격투에서처럼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한 누군가를 수박 터뜨리듯 할 수 있지 않을까?”
EV-1은 신희정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 그간 알고 지낸 사정을 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적어도 요원님은 유도리 있게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저한테 뇌물은 좀 찔러주셔야겠습니다만.
신희정은 바로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EV-1다운 대답이었다.
“미안, 이브이. 지금 말한 건 잊어. 그냥 술 취한 놈의 개소리였어. 아무튼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더더욱 많아질 거야. 이 빌어먹을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별것 아닌 이유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많은데 말이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진영이 술잔을 들고 말했다.
“경쟁보다는 공존을, 증오보다는 화해를, 서로에 대한 이해를.”
신희정은 빙긋 웃으며 이진영과 건배했다.
제법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시시껄렁한 일상이나 여자이야기였다.
이진영은 한승아와 친딸 이유진의 사진을 보여주며 딸바보라며 놀림을 받았고 신희정은 직장에서 대쉬를 받고 있다면서 하소연을 했다. 정보요원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에 이진영은 빵 터지면서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허물없이 사생활 이야기를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 잘쌩긴 요원님, 그러고 보니 여러 번 안부를 묻더라고요. 따로 한 번 연락해봐요. 기다리고 있을 거요?”
“누구요? 아, 참 한국 사람들은 주어고 목적어고 다 날리는 게 문제라니까?”
“이세화 선배.”
신희정의 움직임이 멈췄다.
“설마 복직하고 나서도 연락 안 해본 거예요?”
신희정은 잘생긴 표정을 살짝 찌푸리고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긁었다.
“그게, 회사 안에서 제 입장도 있고 또 그 양반이 워낙 거물이 되셔서 말이죠. 그렇게 잘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마침 이 실내 포장마차의 TV에도 이세화의 연설이 나오고 있었다.
장현권의 사망 이후 정치권은 여러 번 뒤집혔다.
수동운전으로 사람을 치어죽였다는 의혹에 수동운전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여론이 커졌지만, 장현권이 의문의 저격에 죽고 장동천 암살미수범이 자살하면서 정국은 혼탁함 그 자체였다.
어떤 사람은 범인이 ‘난민’이라며 난민에게 아들을 잃은 장동천을 뽑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장동천의 아들은 수동운전으로 사람을 죽였고 그 수사를 은폐하려 시도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난민 문제나 특단사건부터 제기된 인공지능의 적용 범위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장동천의 지지율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전체적인 판세는 장동천이 유리했지만, 그의 아들과 본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어 지금은 오차범위 안에서 안보문명당의 후보와 경합 중이었다.
마침 안보문명당의 후보 경선도 끝났고 컨벤션 효과를 받으며 지금은 서가영과 장동천의 양자대결 구도로 가고 있었다.
서가영은 인공지능에 호의적인 테크노 진보 계열에 여성 후보라는 점이 당초에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서가영에게 강력한 러닝메이트이자 사실상 쌍두마차 역할의 견인차가 나타났으니 바로 이세화였다.
이세화는 원래 경선 후보에도 나오지 않았고 정치 경험이 없었기에 대선정국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장동천의 수사은폐 스캔들이 속속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세화의 경찰로서 고결한 인생과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가 유권자들에게 큰 점수를 받았다.
이세화는 딸을 유괴범에게 잃고 아동범죄전담 팀으로 헌신한 과거가 있었다.
끝내 그녀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천도영, 류모성 사건을 해결하며 벗어던지고, 비로소 난민지구와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는 부조리에 눈을 돌렸다.
결국 후보는 서가영으로 결정되었지만, 킹메이커는 바로 이세화였다.
신희정은 뉴스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세화를 보며 술잔을 들었다.
“저에겐 너무 과분해지셨습니다.”
이진영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전화해요. 당장. 그쪽 연락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에 내사번호 문서를 전달하느라 만났을 때도 이세화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신희정의 소식을 기다렸다.
“예, 뭐.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기는 개뿔.”
이진영은 벌써 자신의 통신기로 이세화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희정에게 내밀었다.
함정에 당해 정보국에 쫓길 때도 늘 느긋한 태도였던 신희정은 이번만큼은 식은땀을 흘리면 어쩔 줄 몰라 했다.
– 이진영 팀장님? 이 시간에 왜…….
이진영은 야유하듯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그 빌어먹을 잘생긴 녀석이 제 앞에 있어요. 이미 전화 넘겼습니다아아.”
신희정은 ‘뭐 하는 거요?’하는 표정으로 이진영을 노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술잔만 들이켰다. 결국 신희정은 이진영의 통신기를 들고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예, 의원님, 아니지 뭐라 불러야 하나? 후보님도 그렇고. 누, 누님이라고 부르라고요? 농담이시죠?”
신희정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저 느긋한 요원 양반이 당황해하는 건 정말이지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 짓궂으십니다.
“이브이, 싸랑의 큐피드라고 불러주겠어? 저 양반들 저렇게 안 하면 아마 평생 날 중간에 두고 난리 칠걸? 아오, 귀찮아. 다 큰 어른들이 병신 술래잡기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호오, 도은주 부장님에게 그 말을 전해드릴까요? 저도 싸랑의 큐피드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이진영은 기겁하며 손사레를 쳤다.
“이브이, 너야말로 짓궂은 녀석이야. 요망할 녀석.”
EV-1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아마 지금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한참 후 통화를 마친 신희정이 되돌아왔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와이퍼처럼 흔들면서 이진영을 바라봤다.
“다음에는 마음의 준비 좀 하고, 거 좀 그럽시다.”
“아이고오, 제임스 뽄드께서 쫄보가 다 되셨네.”
신희정은 실실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다 아직 취하려면 한참 남았고 서로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씩 웃었다.
뒤에서 두 사람을 게이 커플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은 더더욱 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봤다. 둘 다 멋진 남자라서 그런지 꽤 멋진 그림이었다.
“팀장님, 잠깐 일 얘기 좀 해도 괜찮을까요?”
이진영이 괜히 EV-1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신희정은 이진영의 수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시점에서 전화했다.
“레이스 이야기겠군요.”
신희정은 품에서 1급 비밀이라 써진 봉투를 꺼냈다.
“폭탄의 흐름입니다. 대량의 폭탄이 북중국에서 출발했습니다.”
신희정은 북중국 해방군 대령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사진을 꺼냈다.
이진영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바라보다 희미하게 찍힌 누군가를 보고 신희정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너무 먼 곳에서 찍은 사진이라 외모를 식별할 수 없었지만 헤어스타일이나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모습을 보고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 대령, 그 새끼죠?”
“백퍼센트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저희 회사 쪽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 대령의 옆에는 우주용 헤드모듈을 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
“천수관음 개자식. 정말로 살아있었군.”
천도영, 류모성 사건에서 악연이 생긴 두 명의 악당이 모두 사진에 찍혀 있었다.
“이놈들은…… 이건 한국군 군복인데. 이놈들이 전에 말한 그놈들인가요?”
신희정은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병과번호.
육군 특수전 지원단이 만든 괴물부대.
그 특별병과번호로 추정되는 몇 명이 정 대령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었다. 이진영은 이 사진만 보고도 불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이놈들이 지금 저희가 담당하고 있는 이 사건과도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아마도요.”
이진영은 다시 한번 기묘한 우연을 느꼈다.
이진영과 44팀이 로봇을 이용한 대규모 테러 징후를 느낀 것은 지난 초봄에 있었던 소위 ‘웡꺼의 요리사의 딸의 살해사건’이었다.
그때 곁가지로 서울대 공과대 학생회장이 체포되면서 고도의 딥러닝 오염을 이용한 원격로봇테러에 대해 알아냈다.
본청에서는 그 공적이랄지 악연을 감안하여 이진영의 44팀에게 원격로봇 폭파테러 전담임무를 맡겼었다.
“정 대령이라, 일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그럼 도은주 부장의 추측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 대령이 한국 마이크로웍스 지사를 친 건.”
“한국의 로봇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하려고 그랬을 거예요. 거기에 더불어.”
신희정은 그 대목에서 지금은 어빈의 프레임인 EV-1을 쳐다봤고 이진영도 뒤로 고개를 돌려 그의 파트너 로봇을 바라봤다.
“이브이를 노렸다고요?”
“예, 전에도 말씀드렸죠? 정 대령은 팀장님과 이브이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저는 보안 쪽보다도 팀장님을 노리고 강남을 친 거라고 생각합니다.”
– 요원님, 하지만 그건 이상합니다. 만약 팀장님과 저를 노렸다면 굴다리에서 위험한 상황은 그 뒤로도 많았습니다.
이진영은 팀장으로도 승진하고도 여러 가지 사건에 얽혀 굴다리 심장부까지 들락날락거렸다.
미 대사관의 강력한 요구로 관광객 총격 사건의 현장검증을 하질 않나, 높으신 양반의 부탁 때문에 푸만추 수염을 찾아주러 웡꺼의 중화대루 바로 앞까지 가기도 했다.
“이브이, 정 대령은 분명 너와 이진영 팀장을 노리고 있다. 여기서 다 말할 순 없지만 여러 가지 정보자산들에서 얻은 정보로 판단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