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로얄럼블 매치가 열린 후 하루는 조정기한이었고 김용기도 제리의 정비차 다시 매치를 뛰지는 않을 거라고 알려왔다.
하지만 이제 캐논볼 레이스가 코앞이었고 어빈 프레임도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상영은 전업인 폭탄 해체는 잠시 접어두고 전문 엔지니어로 어빈 프레임의 호버대시 모듈을 손보고 있었다.
오전부터 아선 인더스트리의 정비팀이 전상영과 함께 부산하게 어빈 프레임의 수리와 새로운 부품들을 업그레이드했다.
아마 EV-1의 원래 프레임이었다면 마이크로웍스, 제이미 킴 부사장의 직속 정비팀이 EV-1을 정비했을 테지만 지금은 위장상황이기도 해서 아선에 하청을 줬다.
아선 기술자와 로봇들은 영문도 모르고 어빈 프레임을 수리했지만 EV-1의 인공지능 OS에 매번 감탄했다.
정비 로봇은 EV-1이 어빈의 격투 프레임을 조정하는 걸 보고 총 에너지 효율과 출력을 계산해서 보여줬다.
– 출력 2백 퍼센트.
“2백 퍼센트라고? 거기까지 오버로드할 수 있다고? 이건 그냥 평범한 부품들이라고?
– 이 프레임의 OS는 그 이상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액츄에이터와 배터리의 냉각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로봇 격투의 헤비급과도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습니다.
빵끗. EV-1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전상영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 그의 품에 안긴 포메라니안도 헥헥댔다.
EV-1은 어빈을 구동하면 구동할수록 더더욱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마지막 점검에서 EV-1은 마루운동을 하는 체조선수처럼 제자리에서 도약해서 몸을 꽈배기처럼 돌리다가 우아하게 한 발로 착지했다.
명단을 조사하고 있던 임은혜가 두 팔을 벌리고 백조처럼 착지한 EV-1을 보고 박수를 짝짝짝 쳤다. 정비한 아선 측의 엔지니어들도 얼떨결에 따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진영은 커피를 호롭거리면서 EV-1에게 다가갔다.
“어빈, 어때. 우승할 수 있겠어?”
– 그건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안 해도 돼. 일단은 무사히 들어올 것.”
아선의 정비사들은 이진영이 어빈을 아껴서 그런 말을 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빈 프레임이 로봇 격투에서 끝내주는 성능을 보여도 EV-1은 어디까지나 경찰 로봇이고 형사였다.
– 후후, 제가 최선을 다할 곳은 따로 있는 거군요.
EV-1은 어디까지나 잠입해서 폭탄 로봇들의 행방을 쫓기 위해 어빈 프레임을 조종할 뿐이다.
조정을 마친 후 어빈 프레임은 다시 정지모드로 되돌아갔고 EV-1은 또다시 활약할 날을 기다린다.
이진영은 아선의 엔지니어들을 배웅한 후 자리로 되돌아와 신희정에게 받은 정보를 간추렸다. 정보국은 꽤 오래전부터 로봇을 이용한 대량 테러를 경고했었다.
일전에 유인환이 해결한 송도 폭탄테러는 그 예고편이었다.
이번 봄에만 로봇의 알고리즘을 이용한 폭탄테러가 총 13건이 집계되었다.
그중에는 무인 로봇 농장처럼 전혀 인명피해가 없는 곳도 있었지만, 광주의 빛고을 센터에서 일어난 폭발은 7명이 사망하고 12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큰 사고였다.
빛고을 센터는 남부지역 최대의 문화센터였고 하필 폭탄이 터졌을 때는 광주 세계 영화제가 열리던 때였다.
로봇은 육공과 경찰 공안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무대 위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알고리즘은 똑같았다.
특별단독 사건에서 제기된 저가형 부품의 환지통 오류 문제. 마이크로웍스는 그 알고리즘을 여러 번 보안패치 했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집요하게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로봇 제조사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값싼 부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김수겸의 예언대로 로봇 오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었고 새로운 형태로 발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번 뚫린 제방 구멍은 계속 뚫리듯이 수법은 전보다 한층 더 발전해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무려 ‘시상식’ 로봇에게 폭탄을 설치하고 각종 시상식을 하는 와중에 폭탄을 터뜨렸다.
인명피해도 인명피해였지만, 로봇들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 영화를 주름잡는 인기 연기 로봇 다수가 폭발에 휩쓸려 완전 파손 판정이 났고, 감독 로봇도 몰살되었다.
바로 성명을 발표한 인간해방전선은 ‘영화예술을 로봇에게서 인간으로 되돌린다. 이것은 예술해방의 길’이라고 준엄하게 선포했다.
오랜 시간 딥러닝을 거친 로봇들이 파손되면서 매달 2백 편 이상 양질의 영화들을 쏟아내던 영화계에서는 모든 제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감정연습, 표정 미세조절 등 연기에 필요한 딥러닝을 하고 로봇을 새로 배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영화제, 미술관 인간해방과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로봇을 사용한 폭파로 겹겹이 강화된 보안을 맥없이 돌파했다.
이것도 로봇의 맹점이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은 ‘형사의 감’ 같은 건 없었고 합법적인 출입을 받은 로봇이고 각종 센서 검사상 이상만 없다면 무조건 오케이 통과였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뭔가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고 멈춰 세웠을 수도 있지만, 로봇들은 각각의 조건을 합쳐서 생각하는 메타인지는 인간보다 한층 뒤처졌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먼저 로봇만 통과시키고 케이크 상자에 담긴 폭탄을 보안이 약한 담장 너머로 집어 던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장을 시켰다.
로봇과 전임 인공지능에 모든 건물을 24시간 동안 경계할 수는 없었고 어디에나 사각은 존재했다.
“이번 달에도 7건.”
– 하임리히의 법칙이로군요. 일련의 사건들 밑에는 더 큰 사건들이 신고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맞아. 분명 이 테러들은 더 큰 건을 위한 준비단계야. 이브이, 우리가 막아야 한다. 안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몰라.”
– 하하, 저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다른 로봇을 때려눕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진영은 로봇행어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EV-1을 바라봤다.
정 대령과 웡꺼의 목표가 방벽의 무력화라는 건 알고 있지만,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이진영이 내려놓은 종이신문에는 한영중 3개 국어로 된 화려한 캐논볼 레이스의 전면광고가 실려 있었다.
중부서 강력부의 힘만으로 이 많은 로봇들이 방벽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큰불을 끄려면 맞불을 지르는 방법밖에는 없었고 지금으로선 이진영과 EV-1만이 그 유일한 불씨였다.
* * *
김용기는 신발에 담뱃불 불씨를 비벼 껐다. 그는 초조하게 차찬탱 입구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관광객 한 무리가 들어오며 카운터 테이블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김용기에게 눈치를 줬다.
서빙을 하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면서 김용기더러 옆으로 비키라는 시늉을 했다.
“시발 저쪽 일행이 있으니 비키라고? 곧 내 일행이 올 거라고 했잖아.”
여종업원은 껌을 짝짝 씹으며 뒤를 돌아봤다. 이곳 차찬탱도 이렇게 저렇게 웡꺼나 쎄잉꺼와 연결된 곳이었다.
김용기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자리를 내주고 구석으로 쭈그러졌다.
“제기랄, 나도 돈만 있으면…….”
언제나 구시렁거리며 하는 말이다. 그가 하릴없이 앉아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웨이트리스의 눈총을 받을 때쯤 그의 손님이 차찬탱 안으로 들어왔다.
“어, 여, 여기.”
손님은 두툼한 레게 헤어를 하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필리핀계 여자였다. 여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김용기에게 다가와 옆에 털썩 앉았다.
“미스터 블루가 보냈어.”
미스터 블루, 체잉, 청.
김용기는 괜히 두리번거리다 여자에게 핀잔을 받았다.
“병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김용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가 카운터 밑으로 내민 갈색 버거킹 햄버거 봉투를 받았다.
“지도와 총이야. 아 병신, 꺼내지 말라고. 니 가랑이에 있는 거랑 똑같아. 그걸 거리에서 꺼내면 병신 취급 받는 거지.”
여자는 김용기가 단축형 레일건 라이플인 오브레즈 피스톨을 꺼내려고 하자 다시 핀잔을 줬다.
“초, 총은 왜?”
“여차하면 죽여.”
여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훌쩍 일어서려고 했다 김용기는 잽싸게 여자의 팔을 잡고 말했다.
“누구를?”
“난 몰라. 그 안에 답이 있을 거래.”
여자는 팔을 뿌리치고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차찬탱 밖으로 나섰다.
김용기는 다시 초짜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햄버거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예 총열이 10센티미터 정도 남은 오브레즈 피스톨, 웬 관광지도 하나, 그리고 얼마간의 돈과 명함 따위가 들어있었다.
김용기는 이곳에서 이걸 열어볼 순 없다고 판단하고 차찬탱 뒤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곳 화장실은 로봇으로 관리되긴 하지만 굴다리답게 굉장히 더러웠다. 번체자로 쓰인 수많은 광고 명함과 장기매매, 수상쩍은 약품 판매 등등의 전단지가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냄새도 지독해서 이딴 곳에서 성욕이 동하는 게 용한 수준이지만 갈 곳 없는 남녀들이나 싸구려 매춘부들이 몸을 불사르면서 야릇한 소리가 들린다.
당장 김용기가 있는 옆 칸에서는 여자의 숨 막히는 교성이 들리면서 쿵쿵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용기는 그런 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햄버거 봉투를 변기 물 뚜껑 위에 탈탈 털어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지도는 월미도 관광 지도였고 ‘데인저 투어’라고 쎄잉꺼와 웡꺼의 영역 곳곳의 명소들이 나와 있었다.
체잉꺼는 어디서 입수했는지 관광지도 위에 대략적인 캐논볼 레이스의 트랙을 그려놓았다.
x4 캐논볼 레이스! 쉬이이이이작하겠습니다아아!!!
“출발은 폐차장지구. 이렇게 해안도로를 끼고 한 바퀴 돌아서 방벽 안으로.”
김용기는 손으로 지도위의 붉은 선을 따라갔다.
트랙은 F-1 레이스처럼 완벽하게 포장된 도로나 판넬로 만들어진 벽 따위는 없었다.
그저 대략적인 코스만 지키면 오케이였고 코스를 어디를 선택할지도 로봇과 세컨드의 재량사항이었다.
다만 중간중간 반드시 스탬프를 찍고 가야 하는 체크포인트가 있었다. 이곳의 ‘도장’이 한 곳이라도 없으면 아무리 빨리 결승점에 다다라도 무효였다.
“자동차형은 쓸모없어.”
이건 자동차 레이스가 아니었다. 곳곳의 체크포인트 중에는 빌딩 꼭대기도 있고 지하철역도 있었다.
도대체 쎄잉꺼가 이런 공공장소를 어떻게 섭외했는지는 몰라도 자동차형 로봇들이 빌딩벽을 타고 올라갈 게 아니라면 굉장히 불리했다.
코스는 휴머노이드에 유리한 곳도 있고 직선주로처럼 자동차에 유리한 곳도 더러 있어서 꽤 공평한 트랙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오르락내리락하고 온갖 지형을 돌파해야 하는 트랙은 휴머노이드 로봇들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빌딩 꼭대기를 예로 들면 바퀴로 구동하는 로봇들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오르락내리락해야 했고 아마 엘리베이터를 잡느라 한세월을 허비할 것이다.
“코스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비할 수 있다는 거군. 그 킬러비 같은 놈도 계단 리프트 같은 걸 이용하는 방식으로 계단을 올라갈 수도 있어.”
김용기는 곳곳의 체크포인트를 보면서 어떻게 진입하고 나올지 상상해보았다.
당장 빌딩 꼭대기의 체크포인트 만해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건물에 매복해서 경쟁자들을 박살 낼 수도 있고 스탬프를 찍고 내려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낙하산, 낙하산 모듈이 반드시 필요해. 스탬프를 체크하고 바로 뛰어내리면 다음 체크포인트까지는 금방이야. 그리고 여기서는 음, 진짜로 늪이 있군. 호버대시로 통과하고.”
어느새 체잉꺼에 협박당한다는 공포를 잊고 김용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형편없는 도박꾼이긴 했지만, 동시에 좋은 세컨드였다.
김용기는 캐논볼 레이스 트랙을 손으로 쫓아가면서 각각의 체크포인트에 사인펜으로 메모를 했다.
이 지도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게임은 유리하게 풀릴 것이다.
“결승점 직전 체크포인트가 중화대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