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79
제179화
“젠장, 중화대루라니. 전 무서워서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데.”
“이거 웡꺼가 다 박살 내는 거 아닐까요?”
김용기도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여기서는 꽤나 호탕한 척 허세를 부렸다.
“괜찮아요. 경찰만 아니면 대한민국 시민들도 거기서 밥 먹고 그래요.”
임은혜가 다시 켁하고 기침을 했고 김대현이 그녀에게 눈치를 줬다.
누가 봐도 이상한 분위기였지만 김용기의 머릿속에는 오직 체잉꺼가 준 배당률표 밖에 없었다.
“근데 이 부분은 왜 찢겨 나간 거죠?”
다른 생각을 하다 갑자기 질문을 받은 김용기는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김대현이 가리킨 부분은 바로 주요 로봇들의 지하도박장 배당률이 적혀 있던 곳이었다.
“꺼, 껌 버리려고요.”
껌을 버릴 종이로 썼다기엔 너무 뭉탱이로 찢겨 나가 있었다.
김대현은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그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캐논볼 레이스의 코스가 나왔으니 44팀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김용기는 다시 할 일이 있다며 바깥으로 나갔고, 김대현은 스캔한 코스를 바로 이진영에게 보냈다.
* * *
이진영은 동우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손님 한 명과 모퉁이가 뜯어진 관광 지도를 보고 있었다.
“나카토미 빌딩에 구 인천역. 아주 지랄 났구만? 전부 보안취약점이잖아요?”
이진영은 옆에 있는 이민호 안보수사국장에게 푸념을 했다.
“이진영, 대체 어떤 놈이 이딴 코스를 만든 거지?”
“정 대령이겠죠. 육공 놈들도 월미도의 보안취약점 따위는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당장 나카토미 빌딩에서 로봇이 낙화암 삼천궁녀처럼 떨어지면 아주 볼만하겠네요.”
“얌마, 니가 할 소리냐? 여기 니네 관할이야.”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정보국에서는 이 괴상한 대회가 열리는 목적이 방벽의 무력화라고 하던데요.”
“음, 우리 첩보도 그래.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잖냐.”
이민호는 ‘대 로봇테러 및 대 방벽테러 방어 전담 총괄 수사본부장’이라는 기나긴 직함의 명패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안보수사국장은 본청에서도 꽤나 높은 직책이었고 이민호가 직접 월미도에 연합수사본부를 차릴 정도라면 상황은 굉장히 심각했다.
“월미도 맛집 때문에 오신 건 아니고요?”
“아 새끼 거, 꼭 한 마디를 안 져요. 요요요 입이 문제야. 너는.”
이민호는 이진영의 뒤통수를 수첩으로 살짝 때렸고 윤숙희가 지나가다 말고 ‘나이스’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윤숙희 씨, 하늘 같은 팀장님이 맞는데 웃어?”
“하늘이고 나발이고. 아무튼 어쩔 거야? 작전 계속할 거야? 이쯤 되면 차라리 총 경계 태세로 하드하게 진압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참가자가 너무 많아요. 쎄잉꺼 개자식, 민간인과 아마추어 동호인을 인질로 잡았어요.”
이진영은 젊은이의 패기가 어쩌고 하는 동영상을 클릭하고 몸을 배배 꼬았다.
“국장님, 아마 계엄령 떨어진 것처럼 병력을 배치했다간 인천시에서 난리 날 겁니다. 안 그래도 관광객 많이 들어온다고 신났거든요.”
“하긴, 해외에서도 많이들 온다니.”
이제 캐논볼 레이스는 1주일 앞으로 다가왔고 월미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인천 신공항에는 세계의 로봇 격투 팬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었다.
로봇 캐릭터 상품이나 코스프레를 하고 방송국 카메라에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월미도뿐만 아니라 인천시에 돈을 뿌려주는 고마운 물주들이었다.
안 그래도 작년 여름부터 특단사건 등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지면서 관광객도 줄고 세수를 걱정해야 할 판에 캐논볼 레이스는 인천시 입장에선 가뭄에 단비 같은 이벤트였다.
“근데 저거 재밌긴 하냐?”
“뭐, 인간의 잔인함이 로봇에게 투영되는 것 같아서 저는 별로요.”
이진영의 태도는 이민호에게 꽤나 의외였다.
“이브이가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놈들을 박살 내고 날아다녀서 넌 기뻐할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거죠. 차라리 그럴 거면 온라인상에서 데이터로 이뤄진 허상들이 싸우는 걸 보든가. 자원 낭비잖아요? 저기 들어갈 자재들과 로봇들이 궤도 엘리베이터 개발이나 좀 더 생산성 있는 곳에 투입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민호는 정말 의외라는 듯 이진영을 쳐다봤다.
“인간은 쓸데없는 폭력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요. 피 대신 유동액이 튀고, 부품이 떨어져 나가는 걸 즐기고 있으니. 정작 이렇게 말하는 저도 이브이가 상대 로봇을 박살 낼 때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으니 할 말 없지만요.”
로봇 격투는 원초적인 인간의 폭력과 살해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아무튼, 저희는 계속 잠입해서 정 대령이나 롱꺼 패거리가 어떻게 방벽을 공격할지 첩보를 잡아내겠습니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그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수고해라.”
“아, 대 로봇테러 및 대 방벽테러 방어 전담 총괄 수사본부장님께서는 이제 중부서로 되돌아가시는 건가요?”
이진영이 일부러 긴 직함으로 놀리자 이민호는 삼각형 명패로 이진영의 머리를 톡 쳤다.
“김 수한무냐?”
“내애말이.”
이민호는 빙긋 웃으며 다시 명패를 옆구리에 끼고 동우 엔지니어링 사무실을 나섰다.
이진영은 상사를 놀릴 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김용기가 가져온 지도를 노려봤다.
“지도는?”
동우 엔지니어링의 사무처리를 하던 윤숙희가 바로 대답했다.
“대현이 말로는 김용기씨가 체잉꺼의 아는 사람에게 받아왔대요.”
“체잉꺼 조직에서 나온 거면 뻔하지. 대현아, 김용기 조심해라. 아마 체잉꺼에게 압력을 받고 있을 거야.”
김대현이 모니터 속에서 대답했다.
– 압력이라니요?
“뻔하지 임마. 그 양반 돈 엄청 잃었다메? 체잉꺼 놈들이 그런 물주를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잖아? 아마 꼼수를 부릴 거야.”
– 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니가 위험해. 옆에 여자친구도 있는데 괜히 목숨 걸지 말라고.”
이쯤 되면 ‘누가 여자친구냐?’하고 발끈할 타이밍이지만 김대현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아 재수 없어. 여기고 저기고 아주 다 연애질이에요. 아주 봄은 봄이다.”
이진영은 영상통화를 끊고 EV-1의 빈자리를 노려봤다. 지금 온라인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EV-1의 어빈 프레임은 지하도박장 근처에 있었다.
오늘도 R-3 리그의 매치가 잡혀 있었고, EV-1과 제리는 최종 점검 겸 이 마지막 매치를 뛰기로 했다.
어빈의 팬들에게는 안 됐지만 사실상 이 경기는 어빈의 은퇴 경기나 다를 바 없었다.
캐논볼 레이스가 끝나면 44팀의 잠복수사도 끝이었고 수수께끼의 로봇 어빈도 은퇴를 해야 했다.
“트레이딩 카드까지 나오다니. 젠장할.”
R-3 리그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봇 격투 리그 사무국에서는 어빈과 제리의 인기에 힘입어 특별히 트레이딩 카드 2종을 발매했고, R-3 리그의 애청자들에게 두 장의 카드는 벌써부터 레어 아이템이 되었다.
이진영도 기념으로 시제품을 하나 받아두었다.
카드는 각도를 기울이면 어빈 프레임이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가 그래플러 기술을 거는 모습으로 바뀐다.
우연이겠지만, 어째 이 트레이딩 카드가 EV-1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EV-1은 지금은 리그를 씹어먹는 격투 로봇이지만 실은 경찰 로봇으로 우수한 형사였다.
이진영은 시제품 카드를 수첩에 끼워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도의 독자적인 인맥으로 첩보들을 수집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한편 캐논볼 레이스에 앞선 제리와 어빈의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이번에는 주최측이 체급을 올려 라이트급 휴머노이드 로봇들과 매치를 주선했지만 제리와 어빈의 실력은 환상적이었다.
공이 땡하고 치자마자 어빈은 스트레이트를 뻗는 로봇의 밑으로 더킹하더니 놈의 팔을 잡고 배에 ‘통배권’을 먹였다.
로봇에게 내공이 있을 리 없었지만, 어빈은 각 관절부의 힘을 절묘하게 분산시키며 한 곳에 모든 힘을 몰아넣었다.
이 통배권은 전에 천도영의 보육 로봇이었던 로비가 엑소슈트 팔라딘을 상대로 썼던 기술이었다.
이진영은 그걸 ‘여래신장’인줄 알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로비는 통배권을 개량해서 한 곳에 타점을 모으는 방식으로 써먹었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다른 로봇에 강점을 가지는 건 바로 관절기과 이런 타격기였다.
손바닥에 모든 힘이 집중되며 어빈의 팔 역시 과부하가 걸리며 유동액이 터져나갔다.
그 통배권을 맞은 로봇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어빈이 잡은 팔이 닭 날개 뜯는 것처럼 뜯겨 나가고 배의 방어부품이 형편없이 우그러지더니 척추가 부러졌다.
너트나 전선다발 따위의 부품이 와르르 뒤로 쏟아져나오고 불운한 로봇의 상반신이 강화유리벽에 맞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무협지에서 말하는 ‘단 한 번의 초식’으로 어빈은 상대를 박살 내버렸다.
반면 제리는 좀 더 시간을 끌었다.
적 휴머노이드 로봇은 전자식 파일벙커 모듈로 순간적으로 다리나 팔을 늘려서 공격하는 변칙 파이터였다.
아래쪽으로 로우킥 발차기를 하는가 싶더니 발이 쭉 늘어나서 제리의 날렵한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려고 했다.
제리는 가볍게 풋워크로 쭉 늘어난 발을 피하고 잽으로 카운터를 먹였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날리는 잽이라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이 상대는 그래플러였다.
그 쭉 뻗은 다리의 무릎이 역으로 꺾이더니 제리의 허벅지를 잡았다.
놈은 흐물거리는 문어처럼 허벅지의 발을 끌어당겨 붕하고 날아올랐다.
일단 가까이 붙으면 타격기가 제대로 들어갈 리 없었고 역관절로 구동하는 팔다리가 문어처럼 상대 로봇에 휘감겨 하나 둘 사지를 뜯어낸다.
그러나 제리의 펀치는 리그 그 어떤 로봇보다도 빨랐다.
상대 로봇은 다른 팔다리로 제리의 팔이나 다리에 휘감으려고 했지만 제리는 펀치로 놈의 팔다리를 요격했다.
퍽퍽퍽퍽!
오직 잽만으로 상대의 팔다리를 격추시킨 제리는 상대 로봇의 몸쪽 가드가 완전히 무방비일 때 오히려 앞으로 롤러대시를 가동했다.
팔다리를 다 벌린 적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제리의 판단은 정확했다. 놈이 쭉 뻗은 팔을 되돌리려고 했을 때 제리의 스트레이트가 불을 뿜었다.
– 아! 제리! 단박에 쿼터퍼스의 심장부를 관통합니다! 먼저 상대를 박살 낸 검은 폭군! 어빈이 도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쿼터퍼스.
네 다리 달린 문어는 제리의 일격에 완전히 핵심부가 박살이 났다.
도어노커의 탄력을 받은 주먹이 심장부를 관통하면서 검은 유동액을 좍 뒤로 뿜어냈다.
– 문어가 터지면서 먹물이 튑니다! 아 심판 로봇! 팔을 휘둘러 게임 셋을 알립니다! 게임 셋! 게임 셋!
어빈은 거의 펀치를 주고받는 동작 한 초식에 상대를 끝장냈다.
하지만 제리는 좀 더 일찍 끝낼 수 있음에도 한 번 더 상대의 공격을 끌어내고 좀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어빈은 제리의 성능을 잘 알고 있었고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제리를 바라봤다.
제리는 천부적인 흥행사였고 둘 다 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절단내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좀 더 극적인 방법을 썼다.
승리 후의 행동도 지금까지와 똑같았다. 제리는 박살 난 쿼터퍼스를 전리품처럼 들고 아레나를 한 바퀴 돌았다.
이 싱거운 경기로 어빈과 제리의 캐논볼 레이스 준비가 끝났다.
라이트급이지만 체급을 올린 경기에서 어빈과 제리는 별다른 강화프레임 없이 간단하게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관중들은 무제한 헤비급이 참가하는 경기에서도 어빈과 제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바빠진 건 도박꾼들이었다.
마침내 임시지만 유력 우승 후보에게 돈을 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 벌어진 경기 결과를 보고 어빈과 제리에게 돈을 마구 걸었다.
배당권을 사는 인파 속에는 김용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