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0
제180화
어디서 돈을 구했는지 그는 꽤 많은 배당권을 사들였다.
옆에 있던 또 다른 도박꾼이 김용기의 배당권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들! 이 친구 배당권을 좀 봐! 짜르나 R-1 리그 로봇이 하나도 없어!”
도박꾼의 호들갑은 다른 도박꾼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도박꾼은 김용기에게서 배당권 표를 뺏어서 동네방네 소리를 질렀다.
“전부 R-3 리그 로봇이야! 하하하하. 말이 돼 이게! 짜르나 황금로드도 없어! 진심으로 R-3 로봇이 우승할 줄 알고 있다고!”
김용기는 벌컥 화를 내며 도박꾼에게 마권을 빼앗았다.
“니, 니들이 뭘 알어! 우리 제리는 무적이야! 그리고 짜르도 우승은 못 할걸!”
몇몇 도박꾼들이 김용기를 알아보고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누군가 했더니 제리 주인이었네! 나도 R-3에선 제리에게 걸었지만 돈 날릴 일 있어? 캐논볼에서 제리에게 돈을 걸다니!”
“흥! 제리 따위는 출발하자마자 짜르의 진동펀치에 갈가리 뜯겨나갈걸?”
여기저기서 김용기를 비웃는 웃음소리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지금 가장 손꼽히는 우승 후보는 R-1 리그의 황제 짜르였다.
사람들은 배당권의 1번에는 무조건 짜르를 집어넣었다.
짜르는 해외리그에서도 순위권이었고 곧 있으면 세계 타이틀 매치를 치를지도 모르는 헤비급의 강자였다. 그런 짜르를 잘 쳐줘야 라이트급에 불과한 제리가 이긴다니?
그리고 배당권에도 아예 짜르를 찍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부 김용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니, 니들이 뭘 알아! 짜르는 말이야!”
그 순간 김용기는 체잉꺼가 보여준 배당권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짜르가 뭐!”
“어? 짜르가…… 그, 짜르라고 무, 뭉탱이로 출발하는 데 알 게 뭐야? 강한 만큼 견제를 많이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뿐이야! 캐논볼이 팀 먹고 팀 공격 금지인 태그매치도 아니고. 뭔 상황이 벌어질지 어떻게 아냐고!”
김용기는 체잉꺼의 배당표 이야기를 감추려고 아무 말이나 했지만, 오히려 그의 말에 감명을 받은 도박꾼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팀 엠페러는 배당률이 높으니 초반부터 겐세이를 당할 거야.”
“그렇네? 생각해보니 그래. 우승 후보를 가만두겠어? 뭔 편을 먹은 것도 아닐 테고.”
도박꾼들만큼 팔랑귀도 없었다.
김용기의 배당권을 빼앗아 망신 주려던 놈도 김용기의 말에 혹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배당률이 낮다는 건 온갖 견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확률도 높다는 뜻인데 이들의 귀에는 그런 당연한 논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도박꾼들은 언제나 정론보다는 한 방 역전극을 일으키는 기책이나 무슨 찌라시 같은 뒷정보를 더 신뢰했다.
역배에 몰리는 도박꾼들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자신의 감을 합리화할 명분뿐이었으니.
김용기는 다시 배당권을 새로 사러 진가구에게 몰려드는 인파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훈수를 두는 꼴이라니.”
그는 괜히 수첩이 있는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체잉꺼가 준 배당표의 우승 후보에는 짜르는 물론 R-1 리그의 상위권 로봇들이 없다.
체잉꺼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놈들이 우승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괜히 김용기가 주요 우승 후보들이 빠진 배당권을 산 게 아니다.
그러나 정작 확인할 수 없는 뒷정보에 휘둘리는 건 김용기였고 그가 혀를 차며 한 말은 김용기에게도 해당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 * *
우여곡절 끝에 캐논볼 레이스가 개막했다.
레이스 개막 일주일 전부터 월미도 신간척지나 인천 시가지도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전 세계에서 외신기자들이 몰려와서 레이스에 참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로봇들을 뉴스로 내보냈다.
이젠 볼거리가 없어서 형편없이 쇠퇴한 올림픽보다 오히려 이 캐논볼 레이스가 훨씬 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았다.
무엇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로봇들이 부아아앙 롤러대시를 가동하며 레이스를 하며 서로를 때려 부수기도 하고 체크포인트를 공략하며 머리도 써야 한다.
레이스 하루 전 코스 안전 점검 명목으로 열린 시범경기는 전 세계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전에도 레이스 방식의 로봇 격투는 존재했지만 이보다 더 짜릿할 수 없었다.
수십 대의 로봇이 이국적인 월미도 난민지구를 배경으로 질주하거나 처절하게 싸우다니.
목이 뽑힌 로봇이 중국풍 담벼락에 처박혀 그 위로 우르르 기왓장이 떨어져 내린다.
한편 그 옆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딤섬집 앞을 달리다가 서부 영화처럼 로봇 두 대가 맞닥뜨리기도 했다.
검은 유동액이 튀고 박살 난 부품이 홍등을 찢어발기며 전기가 퍼드득거리며 전신주가 쓰러진다.
시범경기에 불과한데도 온통 터지고 박살 나고 찌그러지는 파괴, 또 파괴의 현장이었다.
로봇 인권론자들은 시범경기를 하는 와중에 코스에 난입하며 뉴스거리가 됐다.
이들은 ‘로봇은 장난감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힌 피켓을 들고 로봇춤을 추면서 항의했고, 하마터면 질주하는 로봇에 치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런 소수의 로봇 인권론자나 애호가들을 제외하고는 로봇 격투 레이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였다.
동물 애호가들도 즐겼고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도 이유야 어찌 되었건 로봇이 박살 나는 장면이니 즐겼다.
그렇게 캐논볼 레이스는 로봇 시대의 또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현상이 된 로봇 레이스가 빨리 시작되길 조바심을 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마 TV 방송국들이 대거 특집프로그램을 편성하며 이들의 조바심을 달래주고 있었다.
레이스 시작 1시간 전. 방송국 리포터 로봇이 출발지점인 롱쎄잉 스타디움 곳곳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 아, 이번에는 대학생 팀이군요? 어? 서울대 인공지능 동아리 참가팀입니다. 소개 부탁드릴게요?
예쁘게 생긴 리포터 로봇은 호들갑을 떨며 마이크를 하늘달리기의 팀장인 ‘서영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예! 저희는 서울대 인공지능 동아리 하늘.”
“달리기 팀입니다!”
서영은과 팀원들은 멘트에 맞춰 제자리에서 달리는 흉내를 냈다.
하늘색으로 후드티까지 맞춰 입은 동아리 사람들의 모습은 처절한 레이스가 아니라 과학 경진대회나 대학교 MT에 나온 학생 같았다.
– 오늘 참가하시는 각오는요? 또 몇 위로 들어왔으면 하고 생각하고 계시나요?
서영은과 그녀의 동료들은 그것도 이미 준비했는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저희 팀은 당연히 1번 선착을 노리고 있습니다! 무술 영화를 통해 딥러닝도 잘 되었고요. 라이트급 무게로 정비조정도 끝냈습니다! 저희 스카이러너는 이름답게 하늘을 달려서 1등을 노릴 겁니다.”
이 역시 미리 준비한 건지 스카이러너라는 오픈프레임 로봇이 팀원들을 따라 달리기를 하는 시늉을 할 때 ‘저 하늘을 달려’하는 노래가 튀어나왔다.
이들의 로고송은 오래전 노래인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였다.
– 역시 젊은이의 패기가 보통이 아니군요?
“예! 열정과 패기로 1등 잡아보겠습니다!”
‘잡아보겠습니다.’ 할 때 로봇과 팀원들 전부가 트로피를 거머쥐는 시늉을 했다.
보는 사람들은 어색해 죽으려 하겠지만 막상 저 안에 있으면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다.
– 그럼 하늘달리기 팀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랄게요. 아 그리고 옆에는 프로팀이시군요? 팀 엠페러의…….
리포터 로봇은 멋대로 정비 트레일러 쪽으로 들어왔다가 경비 로봇에게 제지당했다.
– 보안상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는…….
–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예쁜 리포터 로봇은 경비용 공격 로봇의 위압감에 뒷걸음질 쳤다.
– 아, 죄송합니다. 팀 엠페러를 꼬옥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사정상 안 될 것 같군요.
인조피부가 씌워진 로봇은 인간 리포터보다 더 인간답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포터는 로봇이기 때문에 전혀 기죽지 않고 프로듀서의 지시에 따라 다음 인터뷰이에게 다가가 상투적인 질문들을 했다.
그리고 리포터 로봇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한창 출전 준비를 하고 있던 팀 어빈의 트레일러 앞이었다.
어빈은 R-3 리그에서 꽤나 주목을 받았고 반드시 인터뷰를 따야 하는 팀이었다.
– 아! 이곳이 소문난 어빈! 팀 어빈입니다!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음…… 저…….”
하필 트레일러에 남아있던 사람은 전상영이었고 그는 음침한 표정으로 리포터를 바라보며 개만 만지작거렸다.
– 아아, 개가 되게 귀엽네요? 직접 기르시는 갠가요? 혹시 팀 어빈의 마스코트?
빵끗. 전상영은 개 칭찬을 듣자 음침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리포터 로봇은 생각한 대로의 반응이 아닌지 프로듀서를 괜히 쳐다봤고 프로듀서는 손바닥으로 목을 치며 끊으라는 시늉을 했다.
마침 팀 어빈의 트레일러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고 할 수 없이 리포터 로봇은 옆에 있는 제리의 세컨드 김용기에게 말을 걸었다.
– 팀 어빈은 몇 위를 노리고 계시나요?
“아, 저희는 팀 어빈이 아니라 팀 제리입니다.”
– 아, 이거 실례를 했군요. 제리라면 R-3 리그를 씹어먹고 있는 바로 그 화제의 로봇 아닌가요? 아, 이쪽이 제리인가 봅니다.
이미 정보링크로 다 알면서도 리포터 로봇은 호들갑을 떨며 제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제리는 리포터 로봇에게 잽을 날렸다.
리포터 로봇은 날아오는 잽을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했다.
로봇 제3원칙 로봇은 1, 2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못 피했을 테지만 리포터 로봇은 가볍게 주먹을 피해버렸다.
제리는 로봇을 일부러 공격했지만 이건 리포터 로봇과 사전에 합을 맞춘 것이었다.
– 잘 피하시는군요. 레이스에 나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아, 그럴까요오오? 제가 제리의 펀치를 피하는 모습 보셨나요? 이거이거어어 저도 우승을 노리고 싶어지는데요? 제리, 혹시 지금 시청하고 있는 분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 예,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완주하겠습니다.
– 예에, 역시나 인기 로봇 제리의 인터뷰였습니다. 그럼 팀 어빈의 어빈에게도 물어볼까요?
리포터 로봇은 어빈에게 마이크를 갖다 댔지만 어빈은 고개를 갸웃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진영과 함께 있을 때는 재잘재잘 농담도 잘하지만 어빈으로서 EV-1은 혹시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말을 굉장히 아꼈다.
보다 못한 김용기가 뭐라도 말하라며 속삭였지만 어빈은 무시했다.
– 예에! 역시나 R-3 리그의 검은 폭군답습니다. 이렇게 과묵한 게 또 매력이죠! 짜르 역시 언어모듈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데 이번에 둘의 대결이 성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기대되는군요. R-3의 폭군과 R-1의 황제. 오늘 롱쎄잉 스타디움에서 이 꿈의 대결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시청자 여러분 경기 시작할 때까지 채널 고정!
리포터 로봇은 어지간한 사람보다 더 사람답고 돌발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 프로듀서에게 돌아갔다.
이제 각 팀의 인터뷰도 끝났고 준비시간 몇 분만 지나면 캐논볼 레이스가 시작된다.
직접 경기장에 온 관중이나 TV 중계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과연 누가 이 빅이벤트의 우승자가 될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속 편하게 이 광경을 지켜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진영은 로봇테러 어쩌고 하는 길고 긴 이름의 수사본부로 이동했고 화면상으로 그의 파트너가 출발선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노려봤다.
이민호는 정말 다양한 로봇들이 있는 걸 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이거야 원. 이건 레이스가 아니라 할로윈 가장행렬이라고 해도 믿겠다.”
팀 앰페러 같은 프로팀은 진지하게 우승을 노리고 있겠지만 참가 자격에 아무 제한이 없다 보니 그렇지 않은 팀들이 훨씬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