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2
제182화
두 로봇은 나란히 롤러대시를 가동하며 앞으로 달려 나가는 가사 로봇들 틈에 끼어 있었다.
워낙 경량형 로봇들이다 보니 가사 로봇 사이에 있어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전광판에는 짜르와 크로커다일 등 R-1 리그의 동맹 로봇들이 동맹을 맺지 않은 다른 R-1 리그 로봇들을 사냥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타디움 바깥은 폐차장이었고 짜르 패거리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물 산에 고물을 더 얹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곳 중간그룹에도 강자들은 많았다.
일전에 로얄럼블에서 제리와 어빈도 고전한 상대인 킬도저-킬러비 콤비가 일반참가 로봇들을 깔아뭉개며 전진하고 있었다.
킬도저는 여전히 리모트컨트롤로 조종받고 있었지만 한다(飯田) AI의 스티커가 붙은 걸 보면 인공지능 스폰서를 받은 모양이다.
킬도저는 캐터필러로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며 무자비하게 불도저 삽 같은 전면장갑판으로 일반참가 로봇들을 찍어버렸다.
장갑판에는 여전히 초합금 말뚝이 박혀 있었고 말뚝에 꿰인 로봇들이 박제된 곤충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놈에게 꿰인 로봇들이 생물이었다면 사람들은 그 끔찍함에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로봇 레이스, 로봇 격투였다.
몇몇 관중들은 킬도저가 하나둘 일반참가 로봇을 공격할 때마다 발을 구르면서 박수를 쳤다.
“하나요오오! 둘이요오오!”
스타디움 안에 있는 로봇들 중에는 킬러비와 킬도저 콤비가 제일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어느새 ‘하나요, 둘이요’ 혹은 ‘원, 투’하는 박자 맞추는 소리가 스타디움으로 퍼져나갔다.
킬도저는 전면장갑을 위로 휙 들어 올려 말뚝으로 꿰어버린 로봇들을 뒤로 날렸다. 비가 내리듯 온갖 부품이 후미 그룹 위에 쏟아져 내리면서 뒤에서 간을 보고 있던 로봇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킬도저는 그 자리에서 드리프트를 하면서 부우웅하고 경적을 울렸다. 놈 역시 쇼맨십을 아는 로봇이었다.
로봇 3원칙에 따라 위험을 감지한 로봇들이 놈을 피해 옆으로 달리거나 그 자리에 멈춰서면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제리와 어빈은 놈의 옆을 롤러대시로 빠져나왔고 킬도저는 마치 전의 원한을 기억한다는 듯 두 로봇 쪽으로 차체를 선회하며 다시 한번 뿌우우웅하고 경적을 울린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 어빈, 공격하지 마라. 전략은 똑같다.
어빈은 뒤따라오는 수많은 아마추어 참가 로봇들을 바라봤다.
– 제리, 먼저 가라.
– 전략에 어긋난다.
– 난 가능한 한 많은 로봇들을 구하겠다.
제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빈을 바라보더니 먼저 롤러대시를 가동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로봇은 설계 방향성도 딥러닝도 다 달랐다.
어빈을 조종하는 EV-1은 어쩔 수 없는 형사 로봇이었고, 아직도 근본적으로 이 로봇 격투를 납득하지 못했다.
어째서 로봇들끼리 서로 박살내고 죽여야 하는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공격하는 거라면 차라리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킬도저나 짜르 같은 놈들은 레이스에 위협이 되는 적도 아니고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데 힘이 약한 로봇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 살인하지 말라?
EV-1은 신희정에게 들은 십계명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냅다 킬도저 쪽으로 달려들었다.
– 아아아! 어빈! 파트너 제리를 먼저 보내고 킬도저에게 달려듭니다! 초반부터 볼만한 매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해설진이나 사회자도 유력 우승 후보끼리의 대결은 나카토미 빌딩에서 벌어질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레이스의 양상은 약한 일반참가 로봇들을 먼저 박살 내서 기선을 제압하고 선두로 치고 나가는 것이 유리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카토미 빌딩에 도착하는 강자들이 많아질 것이고, 슬럼화된 빌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정글이 되어 뒤에 들어오는 로봇들을 매복 공격하기 쉬웠다.
그러나 어빈, EV-1은 유리함을 포기하고 다른 일반참가 로봇들을 구하기 위해 킬도저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로봇 테러 수사본부의 이민호 국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이브이 왜 저래? 선두그룹을 쫓아가야지?”
이진영은 EV-1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에헤이, 국장님도 돈 걸었어요? 이거 수사잖아요? 어차피 선두로 달려가 봐야 그놈들은 상관없을 거예요. 비싼 돈 처바른 로봇들을 누가 폭탄테러로 써먹겠어요?”
“그, 그건 그렇지만. 저놈은 왜 저런대?”
“모르죠. 요새 서부극영화나 무협영화를 같이 많이 봐서 그런가?”
“저 녀석이 지가 보안관이나 협객이라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글쎄요. 낸들 아나요?”
어빈은 킬도저에게 다가와 그때처럼 리모트컨트롤 모듈을 박살 내려고 했다.
하지만 킬도저에는 이제 보조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었고 전보다 훨씬 더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저 어빈 개자식! 잘 됐다! 킬러비! 저 새끼부터 박살 내자! 어차피 저 새끼도 우승 후보니까!”
뚱뚱한 몸의 파일럿은 뿔테안경을 치켜올리며 살벌하게 말했다.
킬러비는 완전히 인공지능으로 조종되는 로봇이었고 그쪽 로봇팀 사람들은 키보드로 조용히 어빈 말살 명령을 내렸다.
두 대의 로봇이 어빈의 앞을 가로막고 그 옆을 각양각색 수많은 일반참가 로봇이 달리거나 바퀴를 굴려 스쳐 지나갔다.
킬도저가 부우우우 경적을 울리면서 어빈 쪽으로 질주했다.
어빈은 뒤로 롤러대시를 가동시키면서 일단 킬러비의 사거리에서 물러났다.
치이이익.
킬러비는 부식액을 뿜어내는 건 전과 같았지만 컴프레셔를 개량했는지 분무기처럼 앞으로 부식액 안개를 뿜어냈다.
방호처리가 되지 않은 로봇이 그 부식액 안개를 맞고 다리 너트가 녹아내려 앞으로 나자빠졌다. 볼링핀이 쓰러지듯 다른 로봇이 그 기세에 휘말려 넘어지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어빈은 다른 로봇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킬러비의 부식액 분무를 유인했다.
어차피 이건 3, 4시간은 더 걸릴 장기레이스였고 킬러비도 보급을 받지 않으면 무한정 부식액을 분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빈이 장비한 호버대시 모듈 역시 전의 데이터를 고려해서 개량된 최신 모델이었다.
어빈은 호버대시를 가동해서 공중에 붕 뜬 후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조선시대 환도 모양이었고 얼핏 보면 일본의 카타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칼 손잡이 끝에는 케이블이 달려 있고 어빈의 메인동력 배터리와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우우웅,
단분자 진동 커터가 가동되면서 칼끝이 파르르 떨렸다.
– 아! 어빈! 신무기입니다아아! 킬도저! 썰립니다아아아! 두부를 썰 듯 옆으로 베어서!
어빈의 단분자 진동 블레이드 칼날이 킬도저의 전면장갑은 물론 안에 있는 동력전달계까지 베어버렸다.
킬도저의 옆구리에서 퍼륵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빈은 단 한 번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킬도저를 일격에 박살 내버렸다.
우웅.
블레이드의 진동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퍽, 윤활유가 피처럼 솟아오르면서 킬도저가 정지했다.
“아니, 어빈 개새끼가! 저딴 사기템을 장착하고 오다니! 저거 반칙 아니에요? 저거 군용 블레이드잖아요!”
뚱땡이가 주최측에 항의했지만 심판 로봇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사일, 레일건, 화약식 총기탄자 판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저게 반칙이면 짜르의 고주파 펀치도 규정 위반입니다. 감사합니다.
심판 로봇의 깍듯한 말을 듣고 뚱땡이는 더 길길이 날뛰었다.
고작해야 R-3 리그 로봇이 군용 단분자 진동 블레이드를 장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지금 어빈이 장비하고 있는 칼 하나의 가격이 어지간한 격투 로봇보다 비쌌다.
그러나 괜히 제리가 전투를 피하자고 말한 게 아니었다.
김대현은 어빈에 남아있는 배터리를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누굴 닮아선 저러는지……. 초장부터 사고를 거하게 치셨구만.”
블레이드는 단박에 고등어 뼈를 발라버리듯 킬도저를 잘라버렸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보조 전력으로 블레이드를 가동하기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고육지책이었다.
전상영과 아선의 기술팀은 어빈의 스피드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메인 동력 배터리에 연결해버렸다.
캐논볼은 레이스고 상대방 로봇을 무작정 공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이 블레이드를 계속해서 써먹었다간 어빈은 동력 정지로 실격이었다. 방금 일격으로 경기 초반부터 어빈은 총 배터리의 5분의 1을 소모했다.
그러나 다른 팀은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어빈은 사무라이 검객 영화에서 본 걸 따라 하며 멋지게 칼날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파일벙커만 장비했을 때도 굉장히 강했는데 진동 블레이드라니?
킬러비는 원래 킬도저와 동맹이었고 동맹 로봇이 당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로봇의 주인들은 어차피 언젠가는 서로 배신할 걸 알고 있는 사이였다.
놈은 어빈이 뜻밖의 무기를 선보이자 깔끔하게 어빈과의 교전을 피하고 도망쳤다.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빈은 아마추어 로봇들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제리의 뒤를 쫓았다.
어빈은 금방 중위 그룹에 합류했다.
스타디움 출구는 짜르와 선두그룹이 남겨놓은 잔해들로 가득했다. 놈들은 무자비하게 아마추어 참가 로봇들을 박살 냈고 아직 모터를 가동할 수 있는 로봇들은 기면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빈은 잠시 멈춰서서 그 로봇들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달렸다.
-인간은 잔인하다.
EV-1은 엄밀히 따지자면 감정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딥러닝된 로봇이었고 이진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뿐이었다.
로봇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를 위해 수많은 로봇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의 로봇 처형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EV-1이 로봇 격투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바로 러다이트 테러리스트와의 구분이었다.
단지 처분할 수 있는 소유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는 테러 행위가 되고, 어떤 행위는 합법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로봇들은 로봇공학 3원칙에 의거하여 충실히 인간들의 명령을 들었다.
이 경우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3원칙보다 인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2원칙이 우선 적용되어 로봇들은 그 이유도 모른 채 레이스에 참가한 것이다.
– 살인하지 말라.
EV-1은 신희정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로봇 격투에는 신희정이 지적한 ‘살인하지 말라’라는 규정이 없었다.
– 경쟁보다는 관용을. 증오보다는 화해를, 서로에 대한 이해를.
서로에 대한 이해. 이것이 로봇 서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일까?
EV-1은 이진영의 건배사를 중얼거리며 제리를 쫓아 속력을 높였다.
스타디움 밖에서도 곳곳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봇들은 1차 체크포인트 지점인 나카토미 빌딩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 어빈, 왜 그런 거지? 배터리의 20퍼센트가 소모되었다.
어빈은 제리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얀색과 검은색, 색이 대비되는 두 로봇은 나란히 나카토미 빌딩을 향해 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컨드의 지시를 받은 로봇들이 페차장에서도 처절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동맹을 맺은 로봇들끼리 편을 갈라 상대편의 팔을 뜯고 머리통을 날리면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 캐논볼 레이스는 딱히 정해진 트랙은 없다.
최단거리가 있긴 했지만 제리와 어빈은 이미 사전답사로 폐차장 산등성이를 돌아가는 식으로 코스를 잡았다.
몇몇 아마추어 로봇들은 GPS에 찍힌 대로 산을 기어오르거나 산 밑으로 내려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폐차장의 고물 산더미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약간의 진동만으로도 매일매일 무너졌다가 그 위에 새로운 고물들이 덮이는 식이었다.
고물산 주변에 온갖 로봇들이 롤러대시를 가동하거나 쿵쿵대니 고물산이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코스를 잘못 계산한 로봇들은 산등성이를 타고 달리다가 고물산이 무너지면서 무거운 잡동사니에 깔렸다.
산 옆으로 돌아가는 로봇들 역시 무너져 내리는 고물들에 마치 눈사태에 휩쓸린 것처럼 휩쓸려 파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