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4
제184화
시청자들은 더더욱 열광하고 있었다.
어빈은 권투기술이 아니라 쿵푸 기술을 썼다.
도대체 어디서 딥러닝을 한 건지 영춘권의 자세를 취하더니 내려오는 낙하물들을 가볍게 옆으로 휙휙 흘렸다.
이진영은 어빈의 모습을 보면서 깔깔 웃었다.
“이진영, 왜 웃는 건데?”
“국장님, 이브이 저 녀석 TV에서 영화만 봤다 하면 따라 하는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다니까요? 왜 있잖아요? 서부영화를 보면 총잡이 흉내를 내고, 슈퍼맨 영화를 보면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하는 거.”
“아, 그러면…… 저건.”
“최근 엽문 영화를 같이 봤거든요.”
“아…….”
이민호는 멍청한 표정으로 영춘권을 쓰는 해괴한 경찰 로봇을 바라봤다.
아마 제이미 킴이 이 사실을 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나오는 권법은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연출된 상황이라 가능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진 허상인 권법 영화에 취해 권법을 하다 큰코다쳤다.
그러나 EV-1은 달랐다.
녀석은 인간의 근력 혹은 스피드의 한계가 없었고 고속으로 팔을 움직이면서 제리처럼 물건들을 튕겨냈다.
이제 짜르 등 선두그룹 로봇들도 더 던질 건 없었고 5미터 앞까지 육박한 제리와 어빈을 맞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전은 피해라.
이번만큼은 어빈 역시 세컨드의 말을 들었다.
두 로봇은 선두그룹이 점거하고 있는 47층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밧줄을 잡아당겨 위로 도약했다.
어빈이 규격에 맞지 않는 무거운 배터리를 포기하고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한 건 포기한 건 바로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두 로봇은 소방호스를 잡아당기는 탄력으로 제각각 체조선수처럼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두 로봇이 박살 난 외벽을 지나갈 때 짜르가 길쭉한 손을 뻗어 제리의 몸에 초전자 펀치를 날렸다.
그러나 제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빈이 토우케이블을 사출하여 제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벽면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쾅!
어빈의 주먹이 콘크리트에 박히고 어빈은 액츄에이터의 한계까지 가동시켜 제리를 위로 튕겨 보냈다.
제리는 아슬아슬하게 짜르의 펀치를 피하고 먼저 50층 꼭대기에 발을 디뎠다.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바를 아슬아슬하게 넘듯 제리가 옥상의 난간을 뛰어넘고 케이블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어빈의 차례였다.
“이진영, 이번에는 어떤 영화냐?”
“아마도 와호장룡이요.”
어빈은 와호장룡의 한 장면처럼 타닥하고 벽을 딛더니 제리가 잡아당기는 힘과 벽을 박차는 힘으로 크로커다일의 이빨을 피해 휙하고 날아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스타디움 안에서도, TV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동시에 이 짜릿한 광경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선두그룹이 비겁하게 계단을 박살 내며 사다리차기를 하는 통에 흥미가 떨어졌었다.
사람들은 이대로 나카토미 빌딩에서 어지간한 로봇들이 다 리타이어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량급 두 로봇이 멋진 장면을 연출하며 처음으로 체크포인트를 통과했다.
제리와 어빈은 옥상 위에 있는 스캐너에 팔을 갖다 대고 1착으로 1번 체크포인트의 스탬프를 찍었다.
– 제리, 어빈! 1착 통과아아아! 이변입니다! R-1 리그의 로봇을 제치고 R-3 리그의 로봇이 선착 통과 합니다아아아! 아 그리고 말씀드린 순간 세 번째 선착 로봇! 어어! 이건 아마추어 참가자군요! 서울대 하늘달리기 팀의 스카이러너! 제리, 어빈의 뒤를 쫓아 달립니다. 이변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뜻밖에도 아마추어 참가팀 로봇인 스카이러너가 세 번째로 체크포인트를 통과했다.
스카이러너는 발에 호버대시가 아니라 고성능 진공청소기 두 대가 붙어 있었다.
제리와 어빈이 화려하게 선두그룹의 이목을 끄는 사이 이 로봇은 차근차근 건물 외벽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여 수직으로 걸어 올라와서 체크포인트까지 도달했다.
TV 중계는 이변을 일으킨 아마추어팀 하늘달리기를 비춰줬고 이진영은 서영은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저 양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팀장 서영은이 리포터 로봇에게 스카이러너에 대해 묻지도 않은 스펙이나 뒷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잠시 중계가 지연되고 있었다.
이변이 발생하자 도박꾼들은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번 도박은 단순히 우승 선착하는 다섯 대의 로봇만 거는 방식이 아니었다.
각 체크포인트 사이의 구간별 우승 로봇에 단기로 거는 도박도 있었고, 첫 체크포인트를 누가 가장 먼저 돌파할까 하는 도박도 있었다.
첫 체크포인트 1, 2, 3등은 각각 제리, 어빈, 스카이러너.
돈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R-3 리그가 유명하다곤 해도 3부 리그였고 사람들은 이변을 만들어낸 제리와 어빈에 대해 찾아보고 돈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카토미 빌딩의 격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먹통이 되었고 내려가는 길은 짜르 등 선두 그룹이 장악하고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저놈들을 죽여!”
“놈들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해!”
팀 엠페러의 세컨드들이 무전으로 로봇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미 선두그룹의 로봇들은 벌써 자율적인 판단으로 제리와 어빈을 제거하기 위해 부랴부랴 나카토미 빌딩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어빈과 제리는 이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계단이 아니라 옥상에서 낙하?
“짜르! 낙하산일 거야! 낙하산을 펼치면 ‘폭쇄점혈’로 찢어 버려!”
팀 엠페러 역시 첫 체크포인트를 넘기기 위해 낙하산 모듈을 장비했고 어빈과 제리 역시 낙하산을 이용할거라 생각했다.
짜르가 콘크리트 조각을 손에 쥐고 고주파 펀치를 날렸다.
R-1 리그에서도 미사일이나 레일건 등의 투사체는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콘크리트 조각이나 기타 등등 파편을 고주파로 터뜨려서 공격하는 방식은 로봇 리그의 룰상 아무 문제가 없었고 짜르는 이 ‘폭쇄점혈’로 수많은 로봇들을 쓰러뜨렸다.
콘크리트와 철근파편이 파드득 고주파로 진동하더니 부채꼴로 앞으로 퍼져나갔다.
위에서 아래로 파편이 산탄총을 쏘는 것처럼 쏟아져나오고 철근 조각이 마치 레일건 탄환처럼 가속되어 어빈과 제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어빈과 제리는 낙하산을 펼치지 않았다.
두 로봇은 소방호스를 잡고 떨어지고 있었다.
짜르가 쏘아내린 파편이 아슬아슬하게 어빈과 제리를 스쳐 지나가고 저 밑에 떨어지면서 폭쇄점혈로 박살 낸 철근 파편이 승용차 하나에 내리꽂혔다.
삐융삐융!
도난방지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운 없는 승용차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파편에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
이미 인천시 당국이나 캐논볼 레이스 주최 측에서 나카토미 빌딩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여러 번 방송했지만, 이곳은 불법 체류자나 난민들이 잔뜩 사는 곳이었다.
인천시의 퇴거 명령도 듣지 않는 판에 방송에서 하는 이야기 따위에 귀 기울일 리 없었다.
“크로커! 소방호스를 끊어! 뭐 하는 거야!”
크로커다일은 뒤늦게 소방호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어빈과 제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방호스의 케이블 릴 뭉치가 소화전에서 떨어져나오면서 크로커다일의 머리를 강타했다.
캉!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크로커다일의 이빨 일부분이 케이블 릴 뭉치에 박살 났다.
릴 뭉치가 바닥에 갈리고 텅 소리를 내며 옥상의 난간에 걸렸다.
“저 소방호스 다발을 박살…… 아, 아니다.”
짜르의 세컨드는 어빈과 제리가 보여주는 임기응변에 할 말을 잊었다.
어빈은 소방호스의 길이를 측정하고 나카토미 빌딩 10층 정도에서 스스로 소방호스를 놓았다.
그리고는 두 로봇 다 주먹을 외벽에 박아 콘크리트를 갈아내면서 속도를 줄였다.
짜르는 부서진 난간을 창 삼아 아래로 내질렀다. 그러나 이 창 역시 제리와 어빈을 맞추지 못했다.
두 로봇은 정말 얄밉게도 2층 정도의 높이에 다다랐을 때 외벽을 발로 차고 체조선수나 발레리나처럼 허공으로 몸을 비트는 게 아닌가?
짜르가 던진 창이 저 밑에 있는 애꿎은 로봇의 가슴에 박히더니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그 사이 발레라기보다는 공중에서 수중발레를 하는 것처럼 두 로봇은 완벽히 똑같은 동작으로 몸을 휘돌리더니 동시에 슬라스터 노즐을 분사했다.
두 로봇은 지면에서 1미터 정도에 다다랐을 때 치익하고 슬라스터 노즐을 사용하여 속도를 줄이고 멋지게 히어로 랜딩 자세로 착지했다.
쿵.
이제 막 나카토미 빌딩으로 들어오는 후발 주자 로봇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어빈과 제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놈들이 1 체크포인트 선착이다! 잡아아아아!”
“어빈과 제리를 잡아!”
수많은 로봇 세컨드들이 자신들의 로봇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아직 나카토미 빌딩 옥상에서 스탬프도 찍고 오지 못한 주제에 어빈과 제리를 잡으려고 했다.
어빈, 제리가 그 장단에 맞춰 줄 리가 없었다.
두 로봇은 캐터필러를 가동시켜 옛 지하철 1호선 라인 고가도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 어빈, 일일이 상대할 필요 없다.
– 알고 있다. 탈리오의 법칙 수준으로 대항하고 있다.
제리는 롤러대시로 고속주행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로봇은 무선회선이 이어져 있긴 하지만 제리는 어빈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 탈리오 법칙이 뭐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간단히 풀어서 설명한 것도 제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리는 오직 격투와 ‘살육’에 특화된 인공지능 OS였고 어빈은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경찰 로봇 OS였다.
두 로봇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였지만 그 속알맹이는 각 로봇의 프레임 색깔만큼이나 달랐다.
그리고 또한 EV-1은 어빈 프레임을 움직이면서도 자신이 왜 이 로봇 격투에 참여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EV-1은 경찰 로봇이었다.
어빈 프레임에는 고성능의 센서류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로봇 리그 사무국은 그저 어빈이 전투에 이 센서들을 이용할 거라 착각하고 각종 센서류 따위를 허가했다.
어차피 무게 제한이 없어진 마당에 쓸데없이 무게만 늘릴 센서류 따위를 탑재했다고 해서 항의할 사람도 없었다.
EV-1은 스쳐 지나가는 로봇 거의 전부의 표면 검사와 폭약 반응을 스캔하고 있었다.
어빈 프레임과 돌돌이, 알알이 등 감식 로봇이 스캐닝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금도 수사본부에 실시간으로 수많은 로봇들의 사양과 특이사항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EV-1은 미리 정해놓은 연락지점을 통과하면서 이진영에게 암호 메시지를 보냈다.
– 특이사항 없음.
이 기묘한 로봇 레이스는 인천시의 협조를 받아 로봇들이 방벽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시점에서 방벽 폭파를 노릴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이민호는 실시간으로 계속 스캔되는 로봇들의 온갖 사양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브이 원을 미리 잠복시켜 놓기를 잘했군. 제기랄 이거 로봇이 너무 많아.”
현장에서 EV-1이 먼저 정보를 정리해서 처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대 로봇 테러 수사본부에서도 밀려드는 로봇들의 정보로 인해 과부하가 걸렸을 게 분명했다.
“국장님, 놀라시긴 이릅니다. 누가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룰 자체가 굉장히 테러범들에게 유리해요. 각 체크포인트에서 모듈을 자유자재로 교체할 수 있으니까요.”
일반 로봇 격투의 묘미가 중량 제한이 달린 와중에 각 부품의 무게를 계산해서 장갑과 공격무기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이 캐논볼 레이스의 묘미는 파츠 교체였다.
피트가 있는 체크포인트에서 로봇들은 무한정으로 다음 트랙에 맞는 모듈로 교체하고 출격할 수 있다.
바꿔말하면 피트나 혹은 주행 도중 언제 어느 때든 로봇에 폭탄을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