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6
제186화
고가도로 아래는 군데군데 늪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며칠 전 비가 내리면서 유독성 가스가 섞인 폐수가 곳곳에 가스 덩이를 만들어 놓았고 서해안 특유의 뻘과 섞여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늪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뗏목에 모터를 붙인 걸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처럼 발로 판자를 밀어서 오고 간다.
중간중간 사람이 다니기 위해 널빤지나 철판을 깔아놓아 길을 만들긴 했지만, 그 길도 잘못 밟으면 푹푹 빠지게 된다.
이 늪에 빠져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제리와 어빈은 이곳에 대비하기 위해 이미 호버대시를 장비하고 있었다.
합성고무 튜브가 부풀어 오르고 밑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어빈과 제리는 그 자리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문제는 두 로봇을 바짝 따라오던 스카이러너였다.
스카이러너는 지금까지 차륜형 롤러대시를 가동하며 악착같이 따라왔지만 호버대시 같은 비싼 아이템을 장착하지 않았다.
– 스카이라인! 스키패널을 내리고 냅다 늪으로 뛰어듭니다아아! 워낙 가벼워서 빠지지 않습니다!
로봇은 마치 수상스키를 타는 것처럼 스키패널을 커다란 두 바퀴에 붙이고 늪 위를 달렸다.
가볍다는 것이 늪지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부다다다!
넓적한 스키패널과 폭이 넓은 타이어가 뒤로 진흙을 뿜어내면서 늪 위를 질주했다.
호버대시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스카이라인은 늪에 빠지지 않았다.
반면 다른 중량급 로봇들에게는 이 늪이 무덤이 되었다.
그들도 스키패널을 준비하긴 했지만, 무게가 워낙 나가는지라 늪에서 몇 미터 나가지도 못하고 푹푹 몸체가 빠졌다.
– 말씀드리는 순간 R-3 리그의 킬러비!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옵니다! 그렇죠! 공 모양으로 생긴 몸체를 이용해서 앞으로 데굴데굴 구릅니다!
뜻밖에도 킬러비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나카토미 빌딩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중위 그룹이었지만, 제리와 어빈이 빌딩을 휘저어놓으면서 킬러비는 엘리베이터 줄을 이용해 단숨에 빌딩 옥상까지 올라갔다.
다른 로봇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킬러비는 빈 엘리베이터 칸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 케이블에 직접 완강기를 걸고 위로 올라갔다.
노숙자들의 공격 역시 초합금으로 이뤄진 공 모양의 몸체에는 잘 통하지 않았고 워낙 재빨라서 고가도로 구간을 고속으로 돌파했다.
킬러비는 늪을 고속으로 이동하면서 늪에 빠진 중량급 로봇들을 공격하는 걸 잊지 않았다.
부식액이 분무기처럼 뿌려지면서 늪에 바퀴가 빠진 R-1 리그의 로봇이 녹아내린다.
킬러비에게 한국 R-1 리그와 일본 R-1 리그의 로봇이 속속 당해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겨우 킬러비 같은 간단한 로봇에게 당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초반 승부처인 나카토미 빌딩을 나오고 나서도 R-3 리그 로봇 3대와 아마추어 참가팀 로봇 한 대가 선두그룹을 형성했다.
* * *
“사기잖아! R-2도 아니고 R-3 로봇들이 선두에 서는 게 어딨어!”
“주최 측 개자식들! 엿이나 먹어라아아! 다 사기도박이야! 사기라고!”
롱쎄잉 스타디움 한구석에서 난동이 벌어졌다.
돈을 잃은 도박꾼들보다 막 나가는 작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도박꾼들의 불평이 아니더라도 캐논볼 레이스의 초반 상황은 시청자들에게도 의외였다.
수많은 로봇들이 고가도로의 로봇 사냥과 늪지대 돌파에 애를 먹고 있었지만 어빈과 제리는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빠르게 위기를 돌파하고 있었다.
“제발, 제리. 제발…….”
김용기는 스타디움에서 나와서 핸드폰으로 제리의 활약을 지켜본다.
그러나 그가 쥔 배당권에 짜르 등 주요 우승 후보의 이름이 없지만 제리의 이름도 없었다.
그는 배당권과 제리의 활약을 바라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배당권에는 체잉꺼가 형광펜으로 칠해준 이름이 쓰여 있었고, 체잉꺼는 그가 빌린 돈에 더해 자신이 더 꽁짓돈을 빌려주며 김용기 대신 걸어줬다.
이 배당권이 맞기만 한다면 김용기는 캐논볼 레이스 상금까지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체잉꺼가 자선업자도 아니고 김용기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건 아니었다.
제리는 여차하면 체잉꺼의 필승전략으로 사용될 것이다.
체잉꺼는 이미 이 승부조작의 세팅을 다 준비했다.
나카토미 빌딩이나 고가도로에서 로봇들이 불운한 사고를 당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로봇들은 정교하게 세팅된 배당표대로 제거되고 있었다.
고가도로에서 노숙자들에게 무기를 댄 사람은 누굴까?
왜 하필 고가도로를 지나가게 코스가 설계되었을까?
사실 로봇 격투는 야구나 축구보다도 승부조작이 간편했다.
인간은 범죄를 저지르는 걸 꺼릴 수도 있었고 또한 처벌을 두려워하여 자백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승부조작이 덜미가 잡히는 건 가담한 인간들이 공포 혹은 양심에 못 이겨 자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봇은 다르다.
승부조작을 하기 위해 일부러 져주거나 스스로 다리를 파괴시키라는 명령을 로봇은 거부하지 못한다.
로봇끼리의 격투에서 그냥 상대방에게 져주거나 기권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로봇 3원칙 중 그 어떤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물론 EV-1처럼 인간에 가까운 고도의 이익형량을 할 수 있는 로봇이라면 주인의 명령이라도 네트워크를 통한 이익형량을 통해 ‘법’이 우선된다고 판단하여 거부할 것이다.
도덕성의 판단은 고도의 사고와 지능을 요구한다.
인간과 동물은 어떤 행동이 사회적인 법이나 도덕에 반한다는 것을 학습을 통해 알아야 한다.
개나 고양이의 배변 훈련이 바로 그 예다.
개가 자연적으로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이 과연 당연한가?
개는 끊임없는 배변 훈련으로 때론 맞기도 하고 때론 큰소리를 들으며 ‘아 이곳에서는 똥을 싸면 안 되는구나’하는 결론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인간들은 기저귀를 통해 배변 훈련을 하고 점차로 화장실에서 변을 보게 되고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부모나 사회로 배우게 된다.
도덕관념 역시 그러한 학습이 필요하고 로봇 역시 어떤 것이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옳은 것’인가를 인식하려면 고도의 딥러닝이 필요했다.
바로 ‘법 사고’와 ‘법률적 양심’의 딥러닝 문제였다.
로봇의 승부조작 문제에서도 로봇들은 그 상황이 구체적인 법 현실과 위배 된다는 걸 알기 위해 딥러닝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격투 로봇의 설계 방향성은 경찰 로봇과는 다르다.
격투로봇들은 이익형량보다 상대의 공격에 대한 고속반응과 그에 대한 카운터에 집중되게 설계되어 있다.
이들의 임무는 격투뿐이었다.
고속으로 적의 무기를 피하거나 아니면 두터운 장갑으로 오로지 적을 파괴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제3원칙 : 1, 2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과 인공지능은 자신을 지킬 수 있다]이 또한 곱씹어보면 과연 어디까지 자신을 지킬 것인 그 적용이 애매하다.
50% 파손?
60% 파손?
게다가 상대방 로봇의 파괴에 있어서도 신희정이 지적했든 ‘살인하지 말라’라는 규정이 빠져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로봇을 과연 어디까지 파괴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골치 아픈 현실의 인식과 이익형량 문제는 이들 격투 로봇들이 관중들과 철저히 분리된 볼케이지 안이라면 아무런 오류가 발생할 수 없다.
제3원칙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도 인간의 법률로 치면 ‘정당방위 상황’이니 별문제가 없으리라.
그저 격투 로봇은 제조사에서 설계한 스펙대로 트레이너나 세컨드가 딥러닝한 쇼맨십을 보여주면서 상대방 로봇을 화려하게 박살 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곳은 관중과 분리된 영광의 아레나가 아니다.
캐논볼 레이스의 코스는 나카토미 빌딩에서 대놓고 드러나듯 난민들이 사는 곳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로봇은 인간을 공격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로봇을 공격해서 파괴할 수 있다.
바로 그걸 이용해서 늪지대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런 리스크 없이 부품을 노리고 로봇들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평생 철창에 갇혀 시합하던 로봇들이 처음으로 로봇 3원칙의 이익형량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청소 로봇이나 공공 근로 로봇이라면 매일매일 인간과 부대끼면서 나름의 딥러닝으로 판단할 테지만, 이들 격투 로봇들은 철창에서 갓 풀려난 무기징역수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들에게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폐쇄된 고가도로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몇몇 로봇들은 굳이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몇 번 팔다리를 휘저으며 저항을 하던 로봇들은 끝내 로봇 3원칙의 오류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능이 정지됐다.
격투 로봇이 위험하기 때문에 인공지능 OS 제조사에서 만든 안전장치였다.
R-1 리그의 로봇들 몇 대와 미국 2부 리그의 로봇들이 잇따라 로봇 3원칙 오류로 정지하면서 노숙자들은 멀쩡한 로봇을 얻을 수 있었다.
“하하하. 이거 완전 땅 짚고 헤엄치기구만.”
체잉꺼는 대형 TV를 보면서 낄낄거렸다.
놈의 사무실에는 김용기에게 준 것과 비슷한 표가 커다랗게 벽면에 걸려 있었고 조직원들이 로봇들이 리타이어할 때마다 하나둘 붉은 선을 그었다.
“저놈 저거 잡아. 배당률이 너무 높아.”
체잉꺼가 앉은 자리에서 손 하나 까딱하면 노숙자 사이에 숨은 베테랑 저격수가 로봇을 공격한다.
로봇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이익형량을 하느라 속도가 느려졌고 저격수는 어렵지 않게 오토바이형 로봇의 타이어 한 개를 터뜨렸다.
타이어를 잃은 로봇이 좍 미끄러져 텐트 하나를 들이받고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부딪쳤다.
로봇은 사람으로 치면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비록 저격 공격을 받은 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지만 인간이 부상 당하며 피를 로봇의 차체에 흩뿌렸다.
로봇은 제조사의 안전 프로토콜을 작동시켰다.
– 경찰이나 구급팀이 올 때까지 구급절차를 실행하겠습니다.
이곳에 경찰도 구급팀도 올 턱이 없다.
이곳은 방벽 밖 난민지구였고 타살 흔적이 분명한 변사체도 한국인이라는 증명이 없으면 변사체 A로 처리해서 그냥 화장시킨다.
로봇은 오토바이 차체에 달린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자신에게 치인 난민을 구조하다가 그만 오류를 일으켰다.
어째서 구급팀이 오지 않는 것일까?
게다가 이 인간은 자신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것인가?
자신은 그저 주행 전임 인공지능이고 오토바이 로봇의 주행에 있어서 과실 없이 최선을 다했는가?
로봇은 자신의 설계 방향성에 따라 최선을 다했지만, 응급조치가 무색하게 난민은 죽고 말았다.
로봇은 이미 숨이 끊어진 난민을 앞에 두고 그저 설계 시 안전보호 프로토콜대로 구급팀이 올 때까지 구급절차를 반복 실행했다.
이대로 두면 영원히 구급절차를 실행할 것처럼.
–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 * *
체잉꺼의 사무실에서는 그 로봇의 이름 위로 붉은 줄이 죽 그어졌다.
로봇은 아직 기동 정지되지 않았지만, 주변으로 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벌써 로봇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체잉꺼는 분해되는 오토바이형 로봇을 보면서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짓할 때마다 난민지구 곳곳에 숨은 체잉꺼의 부하들이 로봇들을 갈고리로 끌어당기거나 그물로 잡아서 박살 내버리고 있었다.
체잉꺼 사무실의 화이트보드에 형광펜으로 그어진 로봇과 체잉꺼가 지시한 로봇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로봇들을.
참가자가 항의해봤자 레이스 코스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누가 난민지구인 월미도에서 벌어지는 레이스에 참석하라고 등이라도 떠밀었단 말인가?
항의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 갤러리도 레이스의 일부입니다.
골프의 갤러리나 축구의 심판에게 공이 맞았다고 해서 다시 칠 수 없다는 식이었다.
결국 이보다 더 쉬운 승부조작이 있을까?
로봇은 인간에게 대들 수 없고 월미도 난민지구는 소총이 생활필수품에 불과한 무법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