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7
제187화
체잉꺼는 낄낄대면서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제일 맛있는 게 앞에 달리고 있구만.”
뜻밖에도 제리와 어빈은 고가도로 지대를 무사히 나와서 늪지대에서도 선두를 유지했다.
두 대의 로봇이 호버대시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발판에서 발판으로 이동하며 인천역까지의 최단 거리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도박꾼 놈을 섭외하길 잘했어. 그놈 이름이 뭐였지?”
체잉꺼의 부하인 진가구가 광동어로 대답했다.
“예, 김용기입니다. 용기 있다 할 때의 그 용기입니다.”
김용기의 이름은 한자로 金勇氣였다.
그의 부모님은 김용기가 씩씩하게 자라길 바라며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을 거다.
“브레이브, 용헤이. 재미있군.”
체잉꺼가 김용기의 명함을 눈높이로 들어 올려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 똑똑하고 누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진가구는 잽싸게 문을 열었고 눈앞에 선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가면을 쓴 사람.
진가구는 이내 롱꺼 조직 신년 보스 회의 때를 떠올리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쎄잉꺼 형니이님! 체잉꺼 형님! 세잉꺼 형님이십니다!”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체잉꺼도 깜짝 놀라서 다리를 움츠리고 이등병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쎄, 쎄잉꺼 형님!”
쎄잉꺼는 듄의 ‘사다우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호위부대가 있었다.
웡꺼의 공격부대가 반군 군대처럼 느슨하게나마 중대 대대 따위의 편제로 돌아간다면 쎄잉꺼의 휘하부대는 달랐다.
이들은 하얀 우주복 장갑모듈을 유니폼처럼 갖춰 입었고 근접 격투전에 능했다.
아무래도 쎄잉꺼의 영역이 궤도 엘리베이터 위의 궤도스테이션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보니, 그 위까지 폭력을 투사하기 위해 무중력 전투 경험자를 우대했다.
이 흰 우주장갑복을 입은 놈들의 상당수는 궤도 스테이션 전투에 참여한 놈들이었다. 따라서 광동자유군 출신이 있을 턱이 없다.
이들 중에는 북중국 우주군 출신도 있고 미군에 한국이나 유럽 쪽의 궤도전투경험자도 많았다.
각양각색의 사다우카 특수부대 역시 쎄잉꺼의 영역이 링로드와 궤도엘리베이터 일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들이 사다우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난민지구의 3일 전쟁 때 보여준 압도적인 전투력 때문이었다.
쎄잉꺼의 우주장갑복 부대는 소수지만 일당백으로 롱꺼나 웡꺼의 부대들을 압도하며 흰 장갑복을 붉게 물들였다.
교환비는 한 명당 백 명을 넘어 거의 천 명에 다다랐다. 만약 웡꺼가 부리는 엑소슈트 부대가 아니었다면 그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그 후로 롱꺼의 모든 조직원들은 경외감을 가득 담아 소설 듄에서 사다우카라는 이름을 따와 쎄잉꺼의 휘하부대에 별명으로 붙여줬다.
그 사다우카가 자그마치 20명이나 넘게 세잉꺼와 함께 들어왔다.
체잉꺼도 나름 폭력이라면 일가견이 있지만 사다우카의 위세에 침을 꼴깍 삼키며 바짝 긴장했다.
쎄잉꺼는 붉은 줄이 그어지고 형광펜 떡칠이 된 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체잉꺼의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TV에는 캐논볼 레이스가 중계 중이었다. 해설자는 호들갑을 떨며 선두로 나선 제리와 어빈을 칭찬하고 있었다.
“혀, 형님. 혀, 형님의 사업을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 그저.”
쎄잉꺼는 아무 말 없이 배당표와 승부조작 현황을 노려봤다.
마침 배당표의 상위권 로봇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난민들이 달려들어 배터리와 구동기어 따위를 가져갔다.
쎄잉꺼는 바짝 군기가 든 체잉꺼를 바라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체잉륀쵕(蓮長-중대장), 내가 자네 사업을 가지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야.”
“예, 옛! 에잉쵕(營長-대대장).”
체이꺼는 마치 전쟁 때로 돌아간 것처럼 두 발을 모으고 턱을 치켜들며 꼿꼿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자네는 이 레이스가 왜 열렸는지 모르고 있군.”
“예, 예? 큰 레이스를 열면 돈이 오고 가고, 그러면 월미도에도 돈이 돌고…….”
“아니, 아니야. 왜 우리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가며 이런 경기를 후원해야 했을까를 묻는 거야.”
웡꺼가 되지도 않는 난민봉기니 국가건립이니 하는 걸 쫓는 이상주의자라면 쎄잉꺼는 철저히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월미도 난민지구를 기반으로 삼아 지금은 아프리카 자원의 허브가 된 케냐 쪽에도 힘이 닿았고, 그동안 번 돈을 바탕으로 저 외우주 개발 사업에까지 뛰어들고 있었다.
성망개발공사는 피와 살육으로 벌어들인 돈을 궤도 태양광 개발이나 달 개척지 개발에 투자한다.
쎄잉꺼의 절묘한 현실감각이 없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웡만허이 그 새끼보다 체잉륀챙 자네가 훨씬 나아. 언제적 광동자유군이야? 흥, 다 지난 이야기지.”
체잉꺼는 유독 쎄잉꺼 앞에서 맥을 못 췄다.
이들의 호칭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간위예 전쟁 때 중대장, 대대장의 관계였다.
“아무튼, 이 레이스의 목적은 방벽 무력화에 있다.”
차를 따라주는 진가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체잉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방벽 무력화요? 저 난민 방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잉, 자네는 이럴 때는 너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게 문제야. 그럼 뭐 하러 내가 이딴 웃기지도 않는 광대놀음을 추진하겠나?”
TV 화면에는 수녀 옷을 입은 로봇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고가도로를 달리거나 야구 마스코트 분장을 한 로봇이 조깅하듯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캐논볼 레이스에는 우승을 노리고 참가한 사람들보다, 유명한 축제에 참여하듯 지루한 나날의 활력소로 삼아 참가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체잉꺼는 TV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목표는 방벽. 아마 뻥지(榜子) 경찰도 그 정도는 벌써 눈치챘겠지, 우리 조직 전체에 짬(針-바늘)을 존나게 많이 찍어놨을 테니까. 그쪽으로 정보가 꽤 많이 흘러 들어갔을 거야.”
쎄잉꺼는 체잉꺼의 부하들을 둘러봤고 체잉꺼는 물론이고 부하들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혀, 형님 여기 있는 애들은 다 믿을 만한 애들입니다. 부모 확인도 했고 경찰청 정보도 털었어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자네 역시 이 게임의 목적을 몰랐으니 그걸 말해주려고 온 거였고. 사업을 하려면 진작 나한테 상의하지 그랬나?”
체잉꺼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면 전화로 말씀해주셔도 되는 것을.”
“내가 믿을 건 자네밖에 없지 않나? 이런 핑계로 자네 얼굴도 보고 말이야.”
체잉꺼는 다시 한번 과장된 몸짓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쎄잉꺼는 체잉꺼의 팔을 잡아당겨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볼펜으로 놈의 손등을 찍어버렸다.
“누가 멋대로 로봇을 공격하라고 했지?”
“크, 크으윽 형님, 아니 대대장님. 그, 그게. 제가 번 돈은 다 상납하려고.”
쎄잉꺼는 볼펜을 비틀면서 체잉꺼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그깟 푼돈을 벌자고 이 무슨 피칠갑 잔치야? 안 그래? 중대장, 너 뭐 하는 거니? 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으으으윽, 대대장님. 제가, 사, 사과드립니다…….”
체잉꺼는 쎄잉꺼의 흉폭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쎄잉꺼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면 너머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경기에 참가한 로봇을 내버려 둬.”
“로, 로봇을요? 하, 하지만 로봇 한두 대가 박살 난다고 해서 저, 전체적인 레이스는…….”
“내가 말하는 걸 끝까지 잘 들어야지. 중대장, 이 게임의 묘미는 로봇이 터지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로봇을 살리는 게 묘미야.”
“살리는 게요?”
체잉꺼는 순간 쎄잉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봇 격투 레이스는 하나라도 많은 로봇이 탈락해야 우승자의 윤곽이 가려지고 돈을 딸 수 있는 로봇들이 추려진다.
체잉꺼처럼 승부조작을 하지 않으면 이득이란 게 고작해야 쥐꼬리만 한 참가비밖에 남지 않았고, 그딴 참가비는 체잉꺼의 전체 사업 규모로 보면 푼돈에 불과했다.
쎄잉꺼는 피 묻은 볼펜을 뽑아서 진가구 쪽으로 집어 던졌다.
진가구의 얼굴에 체잉꺼의 피가 촥하고 튀었고 진가구는 얼떨결에 볼펜을 잡은 채로 공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쎄잉꺼, 월미도 조폭의 탑3 중 한 명.
웡꺼의 흉폭함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쎄잉꺼도 만만찮은 또라이에 폭력적인 놈이었다.
“대, 대대장님. 자,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혹시 제 사업이 대대장님의 사업에 영향을 준 겁니까? 호, 혹시라도 나중에 또 실수할 수 있으니 이 미진한 중대장을 선도해주십시오.”
쎄잉꺼는 체잉꺼의 귀에 짧게 속삭였다.
“동작대(銅雀臺).”
체잉꺼는 참전자였고 그 말만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이진영도 ‘동작대’라는 말을 들었다면 체잉꺼와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사무실 모니터에서 로봇들이 하나둘 노숙자들의 공격에 터져나가고 있었고 체잉꺼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무릎을 쳤다.
“그, 그럼. 그 방법으로 방벽을?”
“그래, 역시 중대장은 쓸만한 사람이야. 바로 그거야. 아마 한국 쐐이얀(衰人-짭새) 놈들 골치 좀 썩을 거다. 방벽이 무력화되면 자네나 내 사업 먹거리도 늘어나겠지.”
체잉꺼는 잠시 생각하다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흐흐흐, 물론이죠. 우리 동포들이 난민 방벽 안으로 대량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할 만한 사업은 더더욱 늘어 갈 수 밖에 없죠.”
쎄잉꺼는 화이트보드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이런 잔돈푼 따윈 벌지 않아도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체잉꺼는 굉장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새로운 사업에 대한 구상에 그는 고통을 잊었다.
“그리고.”
체잉꺼는 몸을 일으키더니 사무실에 장식된 호랑이 나무 조각을 들고 진가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짬(針-바늘)은 뽑아내야지.”
바늘(針-짬)은 광동어로 ‘잠복경관’을 일컫는 속어였다.
진가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다우카 하나가 진동 블레이드를 윙윙거리면서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세라믹 블레이드가 웅웅 진동하면서 체잉꺼를 비롯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이들은 레일건이나 화약식 총기를 쓰지 않는다.
궤도에서 벌어졌던 북중국 우주군과 미 합중국 우주군(USSF) 간의 전투는 철저히 단분자 블레이드나 초합금 방망이 같은 냉병기 전투였다.
북중국, 미국 혹은 참전한 그 어떤 나라도 궤도 스테이션이 상하는 건 원치 않았고 가능하면 멀쩡한 형태로 궤도 엘리베이터를 손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탐욕이 끔찍한 저중력 지옥을 만들었다.
그 전투에 참여한 자들은 피와 살점들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그 사이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서로를 손도끼나 칼날로 찔러댔던 끔찍한 전투를 잊을 수 없었다.
사다우카는 바로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고 총이 아니라 전자 토마호크, 쇠꼬챙이, 블레이드 따위로 쑤셔서 죽여버린다.
괜히 듄의 사다우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짬, 짬. 난 어릴 때부터 바늘이 싫었어. 찔리는 것도 찌르는 것도.”
사다우카가 블레이드를 작동시키고 쎄잉꺼는 진가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진가구는 쎄잉꺼의 위세에 눌려 피 묻은 볼펜을 달그락 떨어뜨렸다.
쎄잉꺼는 볼펜을 주워 들었다.
그때 진가구의 옆에 있던 뚱땡이가 겁을 집어먹고 창문으로 몸을 날려 도망치려고 했다.
이걸 그냥 두고 볼 사다우카가 아니었다.
사다우카 한 명이 놈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고 뚱땡이는 어이쿠하면서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쎄, 쎄잉꺼 형님! 저는 아닙니다! 저, 저는 정말 바늘이 아니에요!”
쎄잉꺼는 놈의 목을 서서히 짓밟았다.
중국 전통 검은 천 신발이 목을 누르자 남자는 목이 막혀서 점점 변명보다 바람이 새는 소리로 색색댔다.
“아브지, 화, 확인.”
“그래애애, 니 아버지. 누가 뭐래? 홍콩 출신, 우산부대. 광동자유군 의용군.”
체잉꺼의 조직은 조직원의 부모까지 확인하고 난민의 가족인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딱히 체잉꺼만 그런 게 아니라 웡꺼나 롱꺼 같은 조직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