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9
제189화
진가구는 전화기에 부식액을 들이붓고 위성전화기가 뽀글뽀글 녹아내리는 걸 한참 동안 지켜봤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시발…… 시발……. 이제 어쩌지? 진짜 어쩌지?”
그는 지갑을 열어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그의 아내 한하린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의 사진 옆에는 그의 신분증이 꽂혀 있었다.
경찰신분증?
그딴 게 있을 턱이 없다.
난민번호 02689110
지금 진가구는 그저 난민이었다.
경찰 측은 완벽한 잠입을 위해 난민 진가구와 접촉했고 이면 서류로 신분보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딴 종이쪼가리 따위, 롱꺼 패거리의 영역에 있는 진가구에게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진가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신세였다.
지금 잠입 경찰 짓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냥 그는 기본소득조차 나오지 않는 난민이었다.
스티로폼을 타고 대한민국 내륙으로 들어오는 걸 시도해 봐야 할까?
아니면 밀수선을 타고?
어찌어찌 내륙으로 들어오는 걸 성공한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무적자(無籍者)로 아무런 신분보장이 되지 않았고 한하린과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대한민국 시민이 되지 못한다.
두 사람의 아이도 그저 2등, 3등 시민으로 바닥을 벅벅 기다가 일용직을 전전하게 될 것이다.
“미래를…… 미래를…… 그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진가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한하린은 지금도 노점에서 요리를 팔면서 관광객들에게 희롱당하고 있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자기들이 무슨 왕이라도 된 것처럼 난민들을 대한다.
어차피 난민들을 때리거나 심지어 죽여도 경찰이 수사에 나서지 않는 판에 성희롱 정도야.
진가구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잠입경찰 제안에 응했다.
경찰은 가종보험으로 보장받고 연금이나 월급이 기본소득보다야 훨씬 더 좋았다.
나름 내륙에 가서 9개월 동안 수사 훈련도 받고 각종 특수전 훈련도 받았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애써 꽂아 넣은 진가구 같은 잠입 경찰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진가구는 그저 정보자산에 불과했다.
진가구는 눈물을 훔치고 자기 몫으로 산 배당권을 바라봤다.
“시발, 걸어도 또 왜 제리한테 걸었담?”
배당권은 그저 1등만 맞추는 간단한 도박의 배당권이었고 그는 제리에게 푼돈을 걸었다.
하지만 체잉꺼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제리는 온전하게 캐논볼 레이스를 끝까지 달릴 수는 없고 우승할 수도 없었다.
우승할 수 없는 제리.
그는 알면서도 거기다 돈을 건 자신의 모습이 더더욱 꼴사납게 느껴졌고, 제리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1등으로 들어올 수 없는 제리.
아무리 열심히 헌신해도 경찰이 될 수 없는 진가구.
그는 무의식중에 언더독 중에 언더독인 제리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제리…….”
그는 배당권을 구겨서 버리려다가 다시 곱게 펴서 남방 포켓에 잘 갈무리했다.
“제리, 나도 포기 안 할 거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마라.”
진가구는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분이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직 완전히 절망하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조금의 희망.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 * *
어두컴컴한 절망을 향해 달리는 건 제리도 마찬가지였다.
제리와 어빈은 수많은 추격을 따돌리고 선두로 인천역에 다다랐다.
인천역은 신간척지가 생기기 전에는 인천항이랑 제일 가까운 역이라 꽤 번화했지만, 신간척지가 생긴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전에 김상현과 김대현이 곤욕을 치른 구 인천항과 가까웠고 방벽 바깥에 있는 역이라 급격히 슬럼화되며 역의 기능을 상실했다.
유독 물질 늪지대를 지나고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건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선들이었다.
통통배나 각종 불법 어선들이 오늘도 물고기를 가득 싣고 되돌아온다.
아마 로봇들이 사람이었다면 썩어가는 물고기 비린내를 맡고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제리와 어빈은 인천역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멈춰 섰다.
이곳부터 방벽까지는 불과 5백 미터 거리였고 체크포인트는 인천역 역사 안이 아닌 연안부두 등대에 마련되어 있었다.
나카토미 빌딩에서 떨어진 몇몇 로봇들은 최단 거리인 늪지대 통과가 아니라 해로를 택하기도 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물방울을 튀기면서 제트스키 모듈로 추격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리와 어빈의 뒤에도 짜르나 R-1 리그 로봇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체잉꺼가 주도한 승부조작 움직임이 쎄잉꺼의 명령으로 중단되면서 꽤 많은 로봇들이 리타이어 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로봇들의 꼴은 멀리서 봐도 백귀야행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수녀복에, 산타클로스에, 야구팀 마스코트에 아마추어 참가자들의 온갖 기발한 코스튬에 묻히다 보니 R-1 리그의 황제 짜르도 어딘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 어빈, 되돌아오는 게 문제다.
– 그렇군.
두 로봇은 퇴로를 계산하고 있었다.
체크포인트를 찍는 건 아무 문제 없었지만 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다음 체크포인트는 바로 방벽 안이었고 경찰과 인천시는 모든 로봇들이 반드시 방벽 검문소를 통과할 것을 지시했다.
방벽 검문소와 체크포인트 등대는 정반대 방향.
등대나 옛 인천역 광장에서 필연적으로 추격자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두 로봇이 멈춰선 이유는 가능하면 싸움을 피하고 방벽 안으로 들어갈 최선의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 피 맛을 본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군. 너나 내 팔 한 짝이라도 던져주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EV-1은 이진영과 함께 있으면서 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고 이번에도 제리에게 농담을 걸었다.
하지만 제리는 어빈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리와 어빈은 다시 롤러대시를 가동해서 연안부두 쪽으로 향했다.
이 역시 어빈은 여러 번 방문한 곳이었다.
고려 이머전시 사무실 앞을 지나 수많은 간이부두 저 멀리 옛 등대에 체크포인트가 있다.
제리와 어빈 같은 경량형 로봇들도 난민들의 부두가 골칫거리였다.
이 부두는 원래 있던 연안부두의 콘크리트 방파제에 드럼통이나 플라스틱 통을 붙여서 어거지로 갖다 붙인 시설이라 사람도 잘못하면 물에 빠지기 일쑤였다.
태풍이 불어올 때면 전부 다 박살 났다가 난민들은 온갖 잡동사니로 부두를 보수했다.
바닥에 판자나 철판이 멋대로 깔려 있다 보니 어빈이나 제리조차도 고속주행이 불가능했다.
어빈과 제리는 롤러대시를 중단하고 호버대시를 가동시키며 바다 위로 몸을 던졌다.
공기부양 모듈이 진가를 발휘했다.
제트스키 모듈을 단 로봇에 추월당하나 싶더니 제리와 어빈은 나란히 하얀 물보라를 튀기며 등대 쪽으로 달렸다.
여름 화보에 나와도 될 것 같은 시원한 풍경이었다.
반면에 짜르나 기타 등등 로봇들이 있는 곳에서는 한바탕 코미디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봇들은 지하철 타는 것처럼 각 간이부두마다 가득 몰려들었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판자가 부러지면서 로봇들이 첨벙첨벙 바닷물에 빠졌다.
이 광경 역시 시청자들에게는 깔깔 웃으며 볼만한 볼거리였다.
그러나 마냥 웃으며 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로봇들이 한 곳에 몰리면서 부두가 무너져 내리고 막 들어오는 어선에 로봇들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떨어져! 꺼지라고!”
로봇들은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선에 매달렸고 어선은 로봇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혔다.
하얀 물보라가 치솟아 오르고 각양각색의 로봇과 함께 뽀그르르 어선에 타 있던 난민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물에 빠진 어선 주인이 하얀 기포를 뿜어내면서 몸부림을 쳤고 그 옆에 있던 로봇들은 로봇 3원칙에 의해 그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긴급 구조절차가 되레 상황을 악화시켰다.
R-1 리그의 로봇들은 물론이고 일반참가 로봇들도 인공지능 OS에 탑재된 응급구조기능은 그냥 그런 게 있다 수준이었다.
격투 로봇들은 그저 일상생활에서의 부상, 즉 골절이나 출혈이라면 몰라도 해난 구조 프로토콜 있을 턱이 없었다.
몇몇 격투 로봇들이 기초적인 구급 프로토콜에 따라 물속에서 어선 주인의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려고 했다.
인공지능의 설계 방향성에서 비용 문제로 축약된 응급구조절차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물속에서의 심폐소생술은 마치 물귀신처럼 사람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꼴이었다.
안 그래도 로봇들은 비중이 높은 금속이었고 따로 물에 빠졌을 때 떠오르는 부력장치도 없었다.
어선 주인은 결국 격투 로봇들에게 둘러싸여 산 채로 수장되었다.
뽀글뽀글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던 물방울이 사라지고 로봇들은 단체로 멍하니 서서 익사한 시체를 바라봤다.
로봇들은 로봇 제1원칙 전단부인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된다’와 후단부인 ‘위험에 빠진 인간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라는 두 가지 상반된 명제가 충돌하면서 오류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적절한 구호 조치를 못 해서 결국 인간을 위험에 빠뜨렸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렇다고 로봇들은 부작위, 즉 위험에 빠진 인간들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해난구조절차가 탑재된 몇몇 가사 로봇들이 숨을 거둔 어선 주인에게 다가가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일반참가한 가사 로봇들 역시 제1원칙의 전, 후단부가 충돌하기 시작하며 로봇들은 행동을 멈췄다.
하나, 둘 로봇들이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으며 ‘전염병’처럼 이 오류가 퍼져나갔다.
조금 전에 고가도로에서 오토바이형 로봇이 사람을 치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로봇은 로봇 3원칙의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즉시 행동을 멈추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사 로봇이고 격투 로봇이고 몇몇 로봇들은 부수적인 피해에 대한 이익형량 자체를 줄이는 코드를 집어넣었다.
로봇의 행동에 따라 인간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어도 2원칙인 인간의 명령을 우선시할 것.
따지고 보면 오토바이 로봇의 충돌사고나 어선 주인의 익사 사고는 로봇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로봇들은 설마 어선이 뒤집히거나 저격총에 맞아 바퀴가 터질 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다.
전에 도은주가 말했듯이 로봇에게 로봇 3원칙은 해가 뜨고 지는 물리법칙에 가깝다고 말했다.
지금 1원칙의 작위와 부작위 법칙이 충돌하면서 응급구조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로봇들까지 거의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캐논볼 레이스가 열리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또 하나의 인공지능 설계 오류가 충돌했다. 인공지능의 방향성과 그 성능 제한 문제였다.
가사 로봇만 해도 각 부품의 스펙은 물론이고 인공지능 OS도 성인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그러나 가사 로봇이 시속 1백 킬로로 인도를 뛰게 되면 예측할 수 있는 부수적인 피해 산정 결과를 넘어 인간을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가사 로봇처럼 인간과 가까운 로봇들은 철저하게 OS를 통해 부품의 스펙을 인간에 맞춰서 성능을 다운시킨다.
그 결과 가사 로봇들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도 보통 인간의 평균속도로만 달릴 수 있다.
그러나 격투 로봇들은 사정이 달랐다.
격투 로봇들은 볼케이지나 아레나에서 극한의 반응속도로 적을 분쇄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제리의 스트레이트만 해도 인간은 육안으로 잘 구분하지 못했고, 짜르의 고주파 펀치도 인간이 옆에 있을 때 쓰는 무기가 아니었다.
격투 로봇은 철저히 관중과 분리된 곳에서 싸우도록 만들어진 로봇이고 가사 로봇처럼 성능저하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격투 로봇은 EV-1이나 경찰 로봇들처럼 고도의 이익형량 기능이 없었다.
그 부분을 파고드는 또 하나의 오류가 있었느니 바로 특단 사건에서 시작된 환지통 오류였다.
마이크로웍스는 대규모의 패치로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했지만, 김수겸을 비롯한 이들이 발생시킨 로봇 로직의 균열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효과를 발휘했다.
김수겸의 예언 아닌 예언이 또다시 실현되었다.
그의 딸이 죽었던 비극적인 장면이 격투 로봇이나 경주에 참가한 가사 로봇 따위에 의해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