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9
제19화
“지령?”
– 또한 무장연결기도 결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EV-1은 방금 제압한 로봇의 사진정보를 바로 글라스모듈에 띄워줬다. 군용로봇이 미사일 등 중화기를 발사하려면 물리적인 회로 연결기인 무장연결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방금 전 EV-1이 박살 낸 로봇은 조종패널 근처에 있어야 할 나사 모양의 무장연결기가 없었다. 그 무장연결기는 공격 로봇 중대장이 부랴부랴 케이스에서 불출해서 봉인지를 뜯고 공격로봇에 연결하고 있었다.
“뭐야! 그럼 놈이!”
– 또 로봇 살인입니다.
이진영은 온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놈들은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고 했지! 그, 그럼 이건!”
– 암살입니다. 아마도 경위님을 처음부터 노리기 위해 세팅된 것 같군요.
EV-1은 고속으로 육군 로봇을 따라붙으면서 짧게 정리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팝업마인입니다.
육군 로봇은 주차장으로 변한 고가도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면서 뒤로 대인도약지뢰를 사방에 흩뿌려 놓았다. 놈은 자신의 성능이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는지 자세를 낮추고 EV-1에게 교묘하게 싸움을 걸었다.
EV-1이 다가가자마자 지뢰가 글자 그대로 팝업하면서 통통 튀어 올랐다. EV-1은 슬라스터 노즐을 이용해서 붕하고 위로 도약했다. 단 한 발의 지뢰도 EV-1을 잡을 수 없었다.
EV-1은 고가도로 위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롤러대시를 하며 K-841에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박!
도약지뢰가 사방에서 딱지 뒤집듯 튀어 오르면서 온갖 차량이 걸레짝이 되고 박살이 났다. 거인에게 펀치를 맞은 듯 차량이 옆으로 밀리다가 고가도로 난간을 들이받고 아래로 떨어진다.
차에 타 있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지만 로봇은 무정하게 개틀링건을 난사했다.
차량에 구멍이 퐁퐁퐁퐁 뚫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진영은 EV-1의 등 뒤에서 몸을 바짝 기대고 신음을 내뱉었다.
“과, 광저우.”
간위예 전쟁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광저우 전투는 역사상 그 어떤 전쟁보다 더 처절했다.
중공군-북중국군은 ‘살인 로봇’까지 동원한 대규모 관구군으로 간위예 전쟁의 상징이 된 광저우 일대를 탈환하려고 했고 미군, 간위예 관구군, 한국 연합군은 전쟁 막바지에 그곳에서 지옥을 맛봤다.
바로 지금 그 생지옥의 풍경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아이, 죽어가는 사람들.
로봇들은 인간을 들쳐업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다 적의 헬기에 가로막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진영은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며 오른손에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은 부분 의수인 것도 광저우 전투에서 당한 부상 때문이었다.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의 손을 짓뭉개면서 팔다리 역시 철근에 찍혔다.
만약 벨보이 로봇이 아니었다면 이진영은 건물에 깔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전쟁이 어정쩡하게 끝나고 이진영은 수술을 받았지만, 가끔 오른손과 온몸에서 지독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EV-1은 이진영이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진 걸 보고 잽싸게 교전 방침을 바꿨다.
– 경위님. 고가도로에서 내려가겠습니다. 놈은 따라올 겁니다.
EV-1은 다시 슬라스터 노즐을 분사해서 아직 공사가 진행되는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EV-1의 예상대로 문제의 K-841은 고가도로 위에서 개틀링건을 난사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맞아주고 있을 EV-1이 아니었다.
로봇은 마치 우주공간에서 작업하듯 허공에서 자세를 수정하고 오물이 뒤섞인 도랑으로 첨벙하고 착지하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더러운 물이 퍼버버벅 하고 튀기고 K-841 역시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놈은 근접전 장비인 파일벙커를 작동시키면서 EV-1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EV-1은 위를 바라보면서 대전차 저격총을 쏘려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사일 수십 발이 날아오다가 EV-1의 전자교란을 받아 고가도로와 도랑물에 쾅쾅쾅 처박혔다. 그리고 곧바로 더러운 물속에서 위에 올라왔던 놈들과 한 조인 소위 식스팩이라 부르는 또 다른 로봇들이 몸을 일으켰다.
– 경위님 여기로 유인한 것 같습니다. 함정이었군요. 식스팩 분대 로봇 전부가 오류가 난 것 같습니다.
미사일을 전부 소진한 또 하나의 K-841이 EV-1의 등 뒤에 파일벙커를 먹였다. 파일벙커는 콘크리트 도로를 파쇄 작업할 때 쓰는 장비와 같이 전자추진방식으로 초합금 쇠말뚝을 고속으로 박아넣는 장비였다.
파드득 푸른 전류가 튀면서 EV-1의 장갑 도색을 벗기며 파일벙커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진영의 머리 5센티미터를 남기고 파일벙커가 스치고 지나갔고, EV-1은 물속에서 접근한 K-841의 중심부에 몸통 박치기를 먹여버렸다.
그 사이 이진영이 화약식 총으로 K-841의 전방센서 부분을 박살 냈다. 로봇 협력병과 출신인 이진영은 로봇의 센서류가 어디 있는지 귀신처럼 알고 있었다.
로봇이 순간적으로 주춤거리는 사이에 등을 돌린 EV-1은 겹쳐서 들어오는 근접 공격을 파악하고 그쪽으로 대전차 저격총을 돌려 장갑 틈새에 두 발을 쏴버렸다.
K-841의 다리가 으스러지고 놈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는 사이 EV-1은 축구공을 차듯 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이 개자식.”
고가도로 위에서 떨어진 로봇 역시 EV-1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놈을 처리한 건 EV-1이 아니라 이진영이었다. 그는 수동 조작한 오른팔로 놈의 파일벙커를 잡고 내려오는 로봇 쪽으로 휘돌렸다.
EV-1은 파일럿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채고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더러운 개천에서 몸을 드러낸 또 다른 K-841이 ‘자이언트 스윙’에 처맞고 서로 박살이 났다.
EV-1은 쓰러진 로봇의 헤드를 밟아서 무력화시키고 발등에 달린 까마귀 같은 집게 모듈로 놈의 척추모듈을 뽑아 더러운 물속에 집어 던졌다.
아마 로봇이 인간이었다면 이보다 더 처참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멀쩡히 서 있던 로봇이 척추가 뽑히면서 후두둑 부품과 유동액을 흩뿌리며 뒤로 쿵하고 쓰러졌다. 또 다른 로봇은 이진영이 가슴을 후벼파서 동력 배터리를 박살 내고 있었다.
파드득하고 전기가 방전되면서 물속에 있던 물고기가 둥둥 떠오르고 자세를 일으키려던 놈이 그 자리에서 부들거리다 숨이 끊어지듯 진흙탕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기가 EV-1을 노리고 레일건을 쐈다. 흙탕물이 레일건 탄자의 풍압에 개천이 모세의 기적처럼 좍 갈리면서 순간 EV-1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대구경 레일건은 한창 공사를 진행 중인 대형 중장비 로봇에 맞았고 거대한 포크레인을 닮은 로봇이 일격에 숨통이 끊어졌다. 운석이 부딪친 것처럼 수많은 파편들이 시가지의 방벽 쪽으로 튀어 바바바박 꽂히고 부품들이 쏟아져 나와 후두둑 떨어진다.
로봇의 프레임 역시 기우뚱하다가 블록을 쌓듯 쌓아 올리고 있던 고가도로 기둥과 함께 쓰러져 와장창 무너져내렸다.
EV-1은 이 레일건 저격 역시 간단하게 피했다.
– 저격총 냉각 시간 10초. 식스팩 중 저격모듈입니다. 저격총 피격 시 근처 인간에게 피해 우려. 조준은 제가 하겠습니다.
EV-1은 근처에 병사 하나가 널브러져 신음하는 걸 보고 곧바로 이익형량 피해산정을 했다.
“알았다!”
이진영은 대구경 레일건을 장비한 군용 저격로봇을 노려보면서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ECM 전자교란 속에서도 EV-1은 정확히 로봇의 레일건 모듈을 조준했고 이진영이 곧바로 버튼을 눌렀다.
저격 로봇이 레일건을 발사하고 이쪽에서도 대전차 저격총이 발사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드르르르륵하고 어마어마한 기관포 소리가 들리더니 K-841의 다리부터 오른팔까지 박살이 났다. 에너지를 모으고 있던 저격 로봇은 전류폭풍에 휘말려 자폭이라도 하듯 폭발했다.
탱크의 대포만 한 저격레일건 모듈이 붕하고 날아오더니 EV-1의 바로 앞에 꽂히고 EV-1은 저격총을 하늘로 겨눴다.
이진영의 앞에는 날아다니는 탱크라고 불리는 육군의 서펜트 헬기가 떠 있었다. 이 헬기는 완전히 방어에 치중한 헬기였고 겉모습도 쵸밤아머가 덕지덕지 붙어서 험상궂은 공룡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헬기의 레일추진식 기관포는 EV-1과 이진영을 겨누고 있었고 날개에 달린 장갑미사일 역시 EV-1의 예상 경로를 쫓아 연산하는 중이었다.
이진영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 경위님 군 헬기입니다. 피아식별 확인. 파일럿 탑승 확인, 유인 헬기입니다.
이진영은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EV-1의 조종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공격 로봇 한 조인 식스팩이 전부 박살 났고 군 기동로봇과 경찰 로봇, 헬기 따위가 바글바글 현장으로 날아오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서펜트 헬기는 EV-1쪽을 괜히 한 번 선회했다가 하늘로 올라가 주변을 경계했다. 그 사이 쐐애애액하고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선회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깡통아. 아이는?”
– 무사합니다.
EV-1은 경찰 로봇에 연결해서 아까 콘크리트에 깔린 꼬마가 육군 중장비 로봇에 구조되는 영상을 보여줬다.
“깡통아…… 내가 만약 너더러 그 아이를 구하라고 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 가정은 의미 없습니다.
“확률이라도 알 거 아냐.”
– 가르쳐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건방진 새끼. 니가 아주 상전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이진영은 EV-1의 등짝에서 내려오면서 놈의 팔을 툭툭 쳤다.
“근데 파일럿 탑승 확인이라니 저거랑 싸울라고? 저거 이길 수는 있었냐?”
그는 럭키스트라이크를 입에 물고 서펜트 헬기를 턱으로 가리켰다.
– 미사일이 두 발만 더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진영은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만약 제때 피아식별이 되지 않았다면 이 건방진 로봇은 육군 군용 헬기와도 정면으로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는 난장판이 된 고속도로 구간 공사를 바라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뉴스 보도대로라면 민간이 사망자 43명에 군 사망자 33명 부상자는 4백 명이 넘었다. 넷에서는 벌써 군의 대참사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아주 난리였다. 심지어 군의 쿠데타 가능성을 점치는 싸구려 언론도 있었다.
“너 혹시 경위서 대신 써주는 기능은 없을까? 만능로봇이라면 그 정도 기능은 있겠지?
– 유감스럽군요.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입니다.
이 딱딱한 로봇이 처음으로 농담 비슷한 걸 말했다.
이진영은 씩 웃었다.
– 그리고 경위서가 문제가 아닐 것 같군요.
EV-1은 중무장을 하고 그들을 포위하는 육군 로봇과 보병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후 EV-1과 이진영의 신병은 육군 공안에 인도되었고 곧바로 틸트로터에 태워져 용산 국방부 공안담당실로 옮겨졌다.
* * *
이곳은 바로 예전 미군이 주둔하던 바로 그 캠프험프리였고 현재는 국방부 요주의 시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군 상황실 같은 곳을 둘러보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사방은 우윳빛의 불투명 디스플레이였고 손가락만 까딱하면 360도에 영상을 띄울 수 있다.
“모른다니까요. 몇 번을 말합니까? 아선이나 경찰본청에 가서 물어보세요. 왜 로봇에 미사일이 탑재되었는지 모른다니까요?”
군 공안장교는 쾅하고 탁자를 치면서 이진영을 쏘아봤다.
“최소 72시간 이상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미사일이 장착된 걸 몰랐다고?”
“예, 내 눈에 엑스레이 모듈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압니까?”
“로봇 평가서는 받아봤을 텐데 몰랐다는 변명이 말이 돼? 딱 봐도 군용로봇인데?”
이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위 계급장을 보면서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쇼, 지금 나 취조하는 거요?”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파악 안 되나? 여기 육공이야!”
육군 공안부. 통칭 육공으로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