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91
제191화
지금도 로봇 3원칙의 균열은 수많은 로봇들에게 새로운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로봇들은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재정의하며 마침내 동작대 전투의 살인 로봇들처럼 인간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다.
폭탄?
지금 폭탄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천 대에 달하는 살인 로봇들이 방벽 안으로 들어오면 차라리 폭탄이 터지는 게 나을 판이었다.
저 로봇들이 연쇄적으로 오류를 일으키고 전염병처럼 로봇 3원칙 논리의 붕괴가 다른 로봇에게 이어질 수도 있다.
이진영은 EV-1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콰앙!
수사본부에 폭탄이 터졌다.
천장의 조명이 흔들리고 텍스 마감재가 폭발압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진영은 이민호 국장을 보호하며 정신이 멍해졌다.
TV 모니터를 보니 폭탄테러가 터진 곳은 정확히 말하면 대 로봇테러 수사본부가 아니라 인천시경 청사 바로 옆에 있는 인천시청이었다.
“오, 이런 시부랄…….”
깨진 창문 너머로 인천시청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국장님! 정신 차리세요! 인천시청이 공격당했습니다!”
“크윽, 저, 정보국을 연결해! 이 사실을 알려!”
이민호는 머리에 콘크리트 파편을 맞았고 곧바로 기절해버렸다.
이진영은 이민호를 품에 안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인천시청도 누군가에 의해 폭파당하고 더 이상 캐논볼 레이스를 진행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스는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었고 그 누구도 레이스를 멈출 수 없었다.
인간의 탐욕과 돈에 대한 열망은 난민 몇 명이 죽어 나간다고 멈추지 않는다.
주최 측도 인명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난민의 죽음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인천시나 경찰청조차도 코스를 보고 방벽 안의 코스만 주의하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건 트랙이 있는 F-1 레이스가 아니었고 로봇들은 주최 측도 생각 못 한 상상을 초월하는 경로로 각각의 체크포인트를 통과했다.
제리와 어빈은 호버대시로 등대에 가장 먼저 닿았고 또다시 선착으로 체크포인트를 찍었다.
체크포인트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등대 꼭대기였다.
이곳에는 체크포인트 특성상 정비용 피트는 없었다.
– 어빈, 호버대시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배터리 문제로 과연 방벽을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빈을 그 말을 듣자마자 여분의 배터리를 제리에게 넘겨주고 프레임에 꽂혀 있는 배터리 역시 넘겨줬다.
제리는 호버대시를 분리하는 어빈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왜지?
– 제리, 함께 달리는 건 꽤 즐거웠다. 내 몫까지 달려서 우승해라. 난 여기까지인 것 같다.
– 어빈, 왜?
– 속여서 미안. 난 경찰 로봇이거든.
– 경찰? 네가?
제리는 감정프로토콜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어빈을 바라봤다.
– 달려, 오직 네 파트너를 위해.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어빈은 제리의 등을 밀었고 제리는 등 뒤를 돌아봤다.
어빈은 배터리가 전부 소모되면서 팔을 뻗는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 어빈…….
제리는 어빈이 넘겨준 배터리를 꽉 틀어쥐고 등대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로봇이 제리를 쫓아 공격했지만 제리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로 몸을 꺾으며 사뿐하게 바다 위에 착지했다.
호버대시가 가동되며 어빈 없이 제리는 혼자서 방벽으로 달려갔다.
그의 뒤를 쫓는 건 이번에도 스카이라인이었다.
서울대 동아리 학생들은 어선이 뒤집히고 난리가 났는데도 용감하게 연안부두에서 스카이라인의 부력모듈을 교체했고 스카이라인은 수상스키를 타듯 제리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짜르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팀 엠페러는 비록 나카토미 빌딩에서 선두를 빼앗겼지만 인력을 더 투입하여 짜르에게도 제트스키 모듈을 장착했다.
아까 바다 쪽에서 제리와 어빈을 추월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팀 엠페러였다.
부아아아앙!
아무리 호버대시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제트스키보다는 느리다.
짜르는 스카이라인은 물론이고 금방 제리도 따라잡았다.
짜르의 고주파 펀치가 우웅하고 진동하자마자 바닷물이 고주파 모듈과 공진하면서 물방울이 위로 통통 치솟아 오른다.
제리는 이미 짜르가 펀치를 날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호버대시의 출력을 높여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이 역시 경량급 로봇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묘기였다.
호버대시의 공기압과 관절부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제리는 체조선수처럼 위로 도약했다.
짜르의 고주파 펀치가 제리가 있던 곳을 덮치고 일식집 배경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우키요에 가나가와 앞바다 그림의 한 장면처럼 파도가 높게 일었다.
푸른 파도와 하얀 물거품. 그 위에는 제리가 곡예를 하듯 공중제비를 돌면서 짜르 쪽으로 낙하한다.
김용기는 늘 입에 침을 튀기면서 짜르의 고주파 펀치에 대해 설명했다.
고주파 펀치는 글자 그대로 의료용으로 쓰이는 고주파 치료기랑 원리는 같았다.
순간적으로 고주파 전압을 걸어서 목표물을 분쇄하거나 박살 낼 수 있다.
하지만 고주파는 만능이 아니었다.
폭쇄점혈이라는 꼼수에서도 볼 수 있듯 직접 타격하거나 아니면 매개체가 없으면 상대방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
또한 아무리 짜르가 헤비급이라고는 하지만 나름의 기체 밸런스가 있고 배터리에 모든 무게를 몰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짜르의 고주파 펀치는 과열 이슈로 연속해서 쓸 수는 없다.
제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틈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제리의 무릎이 짜르의 머리 부분을 찍어누르고 스트레이트로 놈을 공격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 위였다. 짜르는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오른손을 바닷속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달아오른 오른손 모듈이 차가운 바닷물에 식으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이어서 짜르는 냉각된 손을 뻗어 제리의 흉부 프레임을 잡고 손바닥을 펼쳐 고주파장(?)을 먹여버렸다.
무협지의 장법처럼 저 손바닥이 적중한다면 제리는 흉부 프레임이 찌그러지는 건 물론이고 진동에 부품이 분해되며 격추된 전투기처럼 바닷속에 처박힐 것이다.
해설자도 은근 제리가 분해되어 바다 위에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다 바닷속에 처박히는 걸 기대하는 눈치였다.
– 아아아! 짜르! 제리! 처음으로 펀치를 주고받습니다! 오늘 매치의 하이라이트! R-3 리그의 언더독 제리와 R-1 리그의 황제가 인천 앞바다에서 격돌합니다! 제리! 이대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수장당하고 마는 걸까요오오오!
제리와 짜르의 대결에 방송국의 모든 카메라는 인천 앞바다를 주시하고 있었다.
로봇들의 이상 현상도 인천시가 폭탄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것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TV 채널의 시청률 1위 장면은 바로 캐논볼 레이스, 우승 후보와 3부리그 언더독의 격돌이었다.
제리는 복서였고 짜르도 일단 무기는 고주파 펀치지만 복서에 가까웠다.
두 로봇은 1초 만에 수십 번의 공격을 주고받았다.
제리는 허공에서 허리를 꺾으며 위빙으로 짜르의 고주파 펀치를 피하며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그렇지!”
인간은 거의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스피드였지만 김용기는 제리의 펀치를 목격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리의 스트레이트는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도 정말이지 깔끔한 폼이었다.
짜르의 머리 쪽으로 날아간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짜르가 자랑하는 ‘사무라이 사슴뿔’ 한쪽을 때렸다.
짜르가 목을 옆으로 꺾지 않았다면 제리의 스트레이트에 메인 헤드모듈이 무참하게 당했을 것이다.
짜르는 급히 왼손의 가드를 올려 제리의 스트레이트 펀치를 옆으로 튕겨냈다.
한편 제리의 옆으로 짜르의 스트레이트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고주파 전압에 제리의 프레임이 이상을 일으켰다.
펀치가 적중하지 않았는데도 퍼버벅 제리의 흉부장갑에서 불꽃이 튀면서 케이블에서 쇼트가 일어났다.
– 짜르! 제리의 배터리를 노립니다!
짜르는 처음부터 제리의 흉부장갑이 아닌 등 뒤의 배터리 수납함을 노렸다.
사람으로 치면 얼굴을 막고 상대방의 보디를 훅으로 강타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훅 한 번에 배터리의 케이블이 쇼트로 퍽하고 터지면서 제리는 어쩔 수 없이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했다.
짜르는 여전히 물 위에 발을 디디고 있었고 제리는 밑으로 떨어지는 와중이었다.
공중에 뜬 제리는 짜르에게 그저 떠다니는 표적이었다.
짜르의 왼손이 잽을 먹이면서 제리의 떨어지는 궤적을 쫓아 짜르가 고주파 펀치를 먹이려 했다.
– 아! 저것은! 저것으으은! 저것은 뭐지요?
해설자가 뜻밖의 상황에 제대로 해설도 못 하고 입을 떡 벌린 채 저건 뭐냐고 아나운서에게 물었다.
– 아! 어빈! 어빈이 가지고 있던 단분자 진동 블레이드입니다아아! 어째서 저걸 제리가 가지고 있는 걸까요!
촤악!
진동 블레이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물이 촤르륵 두 쪽으로 갈렸다가 펑하고 터진다.
푸른 물결이 짜르를 감싸고 하얀 물방울이 짜르의 검은색과 빨간색 유광 페인트 위에 아름답게 흩날린다.
짜르의 왼손이 제리가 휘두른 진동 블레이드에 깔끔하게 잘렸다.
이 찰나의 공방을 마치고 바닷물에 처박힌 건 제리가 아니라 바로 짜르였다.
짜르는 순간 균형을 잃고 물에 첨벙하고 빠져버렸다.
김용기는 영상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제리! 신경 쓰지 마! 바닷속은 위험하다!”
짜르는 물속에 있고 제리는 수중전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제리는 물속으로 도망간 짜르를 쫓아갈 수 없었다.
제리는 다시 몸을 바로 세우면서 호버대시를 가동해서 사뿐하게 물 위에 착지했다.
여전히 선두는 제리였다.
제리는 어빈이 배터리와 함께 건넨 진동 블레이드를 잠시 바라봤다.
이건 복서인 제리가 자유자재로 다룰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 경찰 로봇.
제리는 어빈 프레임이 멈춰 선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구 인천항 상공에는 경찰과 육군의 틸트로터가 정신없이 선회하고 있었고 틸트로터 중 하나에서 검은 뭔가가 급속도로 등대 쪽으로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 …….
제리는 앞으로 달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처음 만난 친구였던 어빈의 말대로 앞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파트너의 이름을 걸고.
김용기를 위해.
남도횟집과 코카콜라 챌린지라는 패치가 바닷물에 흠뻑 젖었지만 제리는 여전히 붉은 조끼를 입고 인천 앞바다를 내달렸다.
* * *
한편 폭탄테러가 터진 인천시경 청사와 시 청사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안 그래도 방벽 공격에 대비하느라 육군이 잔뜩 배치되어 있었고 육군 로봇과 병사들이 잔해 속에서 공무원들이나 경찰들을 구조했다.
이진영도 의료 로봇에게 상처를 즉석에서 꿰매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상황실에 있던 임은혜가 달려왔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 국장님이 머리에 파편을 맞았는데 의료 로봇 얘기로는 별 부상 아니래! 넌 괜찮냐!”
“예! 그것보다 대현 오빠가 걱정이에요! 아직 롱쎄잉 스타디움 안에 있어요!”
선배가 아니라 오빠?
아마 평상시의 이진영이라면 잔뜩 두 사람을 놀렸을 테지만 지금 이진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청 청사를 박살 낸 테러는 계속되고 있었다.
콰앙!
경찰은 로봇을 이용한 폭탄테러를 대비하기 위해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건만 정작 문제의 로봇테러는 방벽이 아닌 인천시경에서 터졌다.
시청의 청소 로봇들이 폭탄을 싣고 와서 속속 시경의 통신부서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쾅하고 파편이 건물 밖으로 흩뿌려지고 콘크리트 조각이 시경까지 날아왔다.
이곳 수사본부의 통신은 진작에 마비되었다.
중부서는 물론이고 캐논볼 레이스를 주관하는 본청과도 연락이 끊겼다.
“제기랄, 통신선을 끊고 적의 지휘부를 공격하다니! 이건 테러가 아니라 정석적인 특수전 전술이야!”
군대 경험이 없는 임은혜는 순간 이진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