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92
제192화
“임은혜! 지금부터 너는 전령이다! 중부서에 가서 강력부장님에게 전해! 수사본부는 마비되었고 중부서에서 작전을 지휘해야 해! 그리고 폭탄이 아니라 로봇이야! 정 대령 개자식은 살인 로봇을 풀어놓으려고 했어!”
임은혜의 좋은 점은 이럴 때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임은혜는 폭발로 박살 난 계단을 잘도 내려가서 주차장의 순찰차로 향했다.
쾅!
또다시 청사의 청소 로봇이 폭발하고 와르르 건물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이진영이 있는 수사본부 상황실도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진영은 책상 밑으로 들어가 먼지 속에서 콜록콜록 기침하다가 마침 책상 밑으로 굴러떨어진 모니터에 눈이 돌아갔다.
모니터는 시청사 계단의 CCTV와 연결되어 있었고 계단을 오르는 누군가가 보였다.
시청사에는 전투복이나 정복을 입은 육군들이 바글바글했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주변 풍경과 비교했을 때 위화감이 없었다.
이진영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육군 정복에 올리브색 정모를 옆에 척 낀 모습.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콰앙!
또다시 청사에 심어놓은 로봇이 폭발하며 구조작업을 하던 모든 사람들이 움찔했지만 정 대령과 그 뒤를 따르는 몇 명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계단을 올랐다.
“정대려어어어어어엉!”
이진영은 테이블을 발로 걷어차며 자신의 레일건을 장전했다.
여분의 전류가 레일건 총구 앞으로 파드득 푸르게 뻗어나갔다.
“정대령이다아아! 정대령이 나타났다고오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고함 소리에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44팀은 뿔뿔이 흩어져서 방벽 방어와 수사본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전상영과 김대현은 롱쎄잉 스타디움에.
임은혜는 지금 순찰차를 타고 수동운전으로 중부서로 가고 있었고.
윤숙희와 유인환은.
“누님이 다쳤다고요오오!”
유인환이 산더미 같은 잔해를 들어 올려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가 ‘고요!’라고 외쳤을 때 콘크리트가 들리고 밑에 있던 사람이 앞으로 기어 나왔다.
이진영은 깔린 사람이 윤숙희라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윤숙희! 괜찮아!”
“으윽, 팔이 부러지긴 했지만 싸울 수는 있습니다.”
“웃기시네! 치료나 받아!”
“정대령이라면서요! 여기서 뒈지는 것보다 궁금해 죽는 게 더 억울할 것 같다니까요!”
정 대령이 지휘한 천도영 소년 유괴사건은 경찰 내부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44팀도 전출 오고 난 다음 날부터 이진영의 업적(?)과 정 대령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지금은 강력부 부장이 된 옛 23팀장은 앞에서는 이진영을 약 올려도 뒤에서는 이진영의 미친 짓을 전래동화처럼 구수하게 이야기해줬다.
그 덕분에 44팀은 정 대령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궁금해했다.
“하여튼 우리 팀 사람들은 웡꺼의 요리사의 딸 사건도 그렇고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다들 오래는 못 살 거야!!”
44팀은 진소홍 사망사건을 인지하고 오직 호기심만으로 들이 파다가 범인 장현권까지 체포했다.
앞뒤 가릴 위인들이었다면 여당 대선후보의 아들을 체포하는 미친 짓을 하진 않았으리라.
윤숙희는 씨익 웃다가 이진영에게 응급치료를 받으며 눈썹을 짠뜩 찡그렸다.
“조용히 치료나 받아. 나중에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진영은 윤숙희의 이마에 살짝 딱밤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는 팀이 있었고 한승우 사건 때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가장 죽이 잘 맞는 파트너가 있었다.
쾅!
순간 폭탄이 또 터진 줄 알고 육군 병사들이 소리가 난 쪽을 일제히 돌아봤다.
“저, 저거.”
“인천시경, 거, 검은 로봇.”
EV-1.
이 경찰의 공격 로봇은 육군 병사들에게도 꽤 유명했다.
육공 놈들이야 여러 번 그들에게 치욕을 안긴 로봇이라 잊을 수 없었고, 육군 병사들도 아군의 공격 로봇 KF-37보다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준 EV-1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EV-1은 이진영과 함께 폐선지구에서 랜드쉽을 격파했고 중량급 엑소슈트 팔라딘과도 호각으로 싸웠었다.
EV-1은 그 바람에 육군 안에서도 꽤 많은 팬을 보유한 기이한 로봇이었다.
그 검은 귀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EV-1의 프레임은 어빈 프레임과 합체된 형태였다.
마치 엑소슈트처럼 어빈 프레임이 EV-1의 새로운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얼핏 보면 공사용 로더에 사람이 탑승한 것과 비슷했다.
EV-1은 코어가 들어있는 어빈 프레임을 틸트로터의 항공 후크 시스템으로 회수하자마자 이곳으로 다시 강하했다.
– 팀장님! 경기에 참가한 로봇들 중 마이크로웍스의 로봇 3원칙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알아! 놈들이 노리는 건 로봇등록소야! 놈들은 살인 로봇을 인천시에 잔뜩 풀려고 하고 있어!”
두 파트너는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이진영은 무너져 내린 잔해에서 몸을 날렸고 EV-1은 3층에서 떨어진 이진영을 부드럽게 받아 등 뒤의 지휘관석에 턱하니 갖다 놓았다.
– 이 정도면 코리안 시리즈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요?
엉망진창인 상황에서도 이진영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로봇 리그에 참가하느라 EV-1과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없어서 그는 어딘지 섭섭했었다.
“코리안 시리즈 나가도, 어차피 우승은 베어스입니다!”
유인환은 새로 배정된 파트너 로봇인 빅베어에 올라탔다.
원래 군용 공격 로봇이 경찰에 배치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EV-1의 배치가 성공하면서 경찰청은 유인환의 파트너로 KF-37의 개량형인 KF-37E를 전격 배치했다.
유인환은 이 로봇에 빅베어라는 이름을 붙이고 프로야구 원년팀 베어스의 스티커를 붙였다.
“가자 베어스! 이번에도 우승이다!”
이진영은 썩은 표정으로 유인환을 노려봤다.
두 대의 공격 로봇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천시 청사로 돌입했다.
“뭐야! 당신들! 여기는 육공이 통제…….”
EV-1과 베어스는 일제히 슬라스터 노즐을 분사해서 육공 요원들과 육군 로봇을 뛰어넘었다.
두 로봇의 성능은 정식 배치된 KF-37이나 K-841A2의 성능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듯 동시에 착지한 EV-1과 베어스는 인천시청 문짝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했다.
“이브이, 중도 포기해서 섭섭하진 않냐! 너랑 제리라면 우승할 수도 있었어!”
– 하하, 혹시 저에게 돈을 거신 건가요? 도박상담은 1336, 1336에 거시면 도박상담 전임 인공지능이 케어해 드릴 겁니다.
EV-1의 말을 듣고 유인환이 벌컥 화를 냈다.
“이브이! 돈은 내가 걸었다고! 아오! 봐봐봐! 1착 너! 2착 제리!”
유인환은 배당권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빈 프레임은 지금 EV-1에 탑재되어 있었고 이렇게 된 이상 어빈에게 건 배당권은 휴짓조각이었다.
배당권 종이가 얼빠진 표정의 육군 아저씨들 머리 위로 날아갔다.
“팀장님! 지원은 없겠지요!”
“어! 수사본부는 박살 났고 지금 통신먹통 상태야! 개자식들 재머를 가동시켰어! 근데 이브이 넌 용케 알고 왔구나!”
– 후후, 파트너가 위험에 빠진 걸 모를 리 없지요. 그럴 때는 불러주십시오. 사랑과 우정 그리고 평화의 전사. 프리큐어.
유인환은 EV-1의 농담을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팀장님, 이 녀석한테 뭘 가르친 겁니까!”
“나 아니야! 승아랑 놀더니 저 개드립을 치더라!”
EV-1은 가끔 비번날에 일반 오픈프레임을 조종해 한승아와 만났다.
한승아는 EV-1을 유독 좋아했고 EV-1도 한승아와 교감하면서 아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한승아는 학교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검은 프레임의 EV-1과 포메라니안 개 EV-2를 늘 그렸다.
유인환은 불만인지 뭔가 한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어느새 인천시청 로봇등록소에 다다랐다.
이곳은 공공기관 소속이고, 개인 소속이고 가릴 것 없이 관내의 모든 로봇들의 기록이 등록되고 관리되는 곳이었다.
이진영은 정 대령과 쎄잉꺼 등이 살인 로봇을 풀어놓으려 한다는 걸 알자마자 놈들이 왜 인천시청을 폭파했는지 알아챘다.
이곳을 폭파하면 당장 인천시 관내 어디에 배치된 공공로봇이 오염되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섹스돌이나 가사 로봇 같은 개인 로봇의 등록기록까지 사라지면 당분간은 그 기록을 복구하느라 혼란에 빠질 것이다.
국가 중앙 아카이브에도 로봇 등록기록은 남아 있지만, 기록이 복구되는 동안 이미 살인 로봇들이 곳곳에 침투하고도 남았다.
거기에 살인 로봇에 폭탄을 탑재하면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건 더더욱 간단했다.
살인 로봇은 이미 인간을 죽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그깟 폭탄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한 로봇등록소를 폭파시키면 살인 로봇의 처리 절차 역시 더뎌지게 된다.
살인한 로봇은 천도영의 보육 로봇 로비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폐기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걸 분류하는 체계가 박살 나게 되면 어떤 로봇을 폐기할지 구분할 수 없어진다.
로봇등록소가 제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사회 혼란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지금 수많은 로봇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체크포인트를 찍고 스타디움으로 되돌아오라’는 명령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벽의 허점을 찾았다.
방벽 공격.
그건 인간이 로켓포로 공격하거나 폭탄을 터뜨리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경찰은 특정한 게이트만 통과해서 로봇들을 받아들였지만, 로봇들은 레이스를 이겨야 한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난민들이 사용하는 개구멍을 사용하거나 심지어 방벽을 기어오르는 놈들도 있었다.
방벽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였지, 로봇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로봇들은 온갖 도구를 사용해서 방벽 게이트가 아니라 벽을 타 넘었다.
줄이 길어지자 위로 케이블 밧줄포를 쏘거나 스카이라인처럼 흡착 모듈로 방벽을 올라가는 놈들도 있었다.
난민들만 아는 땅굴이나 개구멍을 통해 기어들어 오거나 근처 빌딩에서 로켓추진을 이용해서 방벽을 넘기도 했다.
그리고 온갖 방벽의 허점이란 허점이 동시다발적으로 공략되었다.
애초에 주최사인 성망개발공사는 경찰이 마련한 ‘게이트’를 통과하지 않으면 실격이라는 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체크포인트에서 체크포인트로.
룰은 그것뿐이었다.
참가자들은 약관과 룰을 꼼꼼히 읽다가 방벽의 취약점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긴 검색대를 우회했다.
따지고 보면 방벽에 관련된 보안법 위반이었지만 백억 그리고 거기 걸린 막대한 판돈이 사람들의 이성을 통째로 마비시켰다.
정 대령과 웡꺼는 굳이 방벽의 허점을 찾고 공략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돈에 미친 참가자들이 알아서 방벽을 공략하고 로봇들을 밀어 넣었다.
쾅쾅쾅쾅쾅!
오랜 시간 난민들을 절망하게 만든 방벽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진영은 통신기 모니터에 뜬 화면을 보며 이를 갈았다.
“상훈 형님이 고생 좀 하시겠군.”
방벽의 온갖 허점을 파고든 로봇들 중에는 송도 폭파테러와 똑같이 폭탄 운반용으로 딥러닝된 로봇들이 더러 있었다.
폭탄은 바로 나카토미 빌딩에서 세컨드로 위장한 웡꺼 패거리에게 설치되었고 로봇들은 다른 로봇들을 따라가다가 개구멍이나 땅굴 혹은 게이트에서 일제히 폭파당했다.
폭발은 게이트 중간에 있는 벽을 노려서 한 번에 폭발되었다.
수많은 셈플렉스 폭탄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자 방벽도 물리적인 의미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경찰은 정보국의 도움으로 북중국에서 어마어마한 셈플렉스 폭탄이 로봇에 탑재되어 터질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점에 집중해서 폭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경찰과 정보국이 예상한 방벽 공격 형태는 방벽 검문소를 폭파하고 그곳으로 난민이 들이닥치는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