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97
제197화
지는 게 당연했던 로봇이 당당하게 살아 돌아와 마지막 체크포인트에 서 있다.
빵끗.
이곳에는 김용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상영은 촉촉해진 눈으로 씩 웃으면서 제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치켜들었다.
RR-04는 벌써 제리의 부품교체를 마쳤다.
폭발로 떨어져 나간 왼팔과 왼다리에 새로운 팔다리를 붙이고 전상영은 다시 한번 오케이 사인 삼아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쳐들었다.
– 주인님, 결승선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제리가 다시 힘차게 롤러대시를 가동했다.
김용기는 차마 그의 로봇을, 제자를 볼 낯이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털썩하고 플렉스 폭탄을 떨어뜨렸다.
“팀장님…… 나는 쓰레깁니다. 제리를…… 체잉꺼가 제리가 선두로 달리면 다 쓸어버리라는. 조끼에 폭탄을 넣어서…….”
전상영은 말없이 그가 떨어뜨린 폭탄을 주워들고는 RR-04에게 내밀었다.
–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위험 습득물, 폐기처리.”
RR-04는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전상영을 바라봤다.
– 습득물이요?
“음, 주운 거야. 누가 떨어뜨렸는지 몰라.”
전상영은 포메라니안을 쓰다듬었고 개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앙앙거리며 짖었다. 다른 로봇들을 추격하는 제리를 보며 그는 빵끗 웃었다.
“청춘이군.”
여전히 그의 표정만큼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감격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 *
제리는 단숨에 챠밍걸과 스카이러너를 따라잡았다.
새로 교체한 부품은 어빈 프레임의 검은 팔과 검은 다리였고 출력은 제리의 원래 수족과 비교할 수 없었다.
제리는 두 로봇과 함께 선의의 경쟁을 하며 폐차장으로 접어들었다.
무너진 쓰레기 산 때문에 경로가 바뀌긴 했지만 제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제리는 호버대시를 적절하게 사용하며 단숨에 짜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짜르도 제리가 기적적으로 뒤따라온 걸 인식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폐품들을 집어던졌다.
제리는 권투 패링기술로 자동차 엔진이며 냉장고 같은 잡동사니를 가볍게 튕겨냈다.
EV-1이 제리의 영향을 받았다면 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리는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영춘권의 초식을 이용해서 가볍게 방향만 바꿨다.
짜르는 아직 멀쩡한데도 제리와의 정면대결을 피했다.
아까 인천 앞바다에서 진동 블레이드에 호되게 당하면서 경량급이지만 제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중량급이라고 해도 제리가 품속으로 파고들어 블레이드로 난도질을 하면 크로커다일처럼 일격에 승부가 결정 날 수도 있었다.
“짜르! 달려! 우승이다! 저런 자잘한 놈 따윈 신경 쓸 것 없어! 넌 곧 세계의 짜르가! 세계의 황제가 될 것이다!”
로봇에게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까?
짜르는 세컨드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자꾸 뒤를 의식하며 제리가 쫓아오지 못하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
이제 롱쎄잉 스타디움이 서서히 보이고 이 길고 긴 3시간의 대장정도 끝을 낼 때였다.
몇몇 로봇들이 짜르의 앞을 달리는 게 보였지만 전부 제물포역 체크포인트를 찍지 않고 온 반칙패 로봇들이었다.
짜르는 화를 풀기라도 하듯 로봇들을 고주파 펀치로 마구 공격했다.
놈은 제리에게 아직 배터리가 많이 남아 있다는 걸 위력 시위로 보여줬다.
애꿎은 반칙패 로봇들이 길바닥에 분해되어 널브러지고 고주파에 쇼트가 일어나 발작 일어난 사람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제리와 두 대의 로봇은 롱쎄잉 스타디움까지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속력을 높였다.
스타디움 안의 관중들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마지막 1.5킬로미터 구간을 남기고 짜르와 제리가 롤러대시로 미친 듯이 경주를 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제리는 전차처럼 캐터필러로 구동되는 롤러대시였지만 짜르는 고속주행을 위해 군용 타이어로 바꿨다.
놈은 이 타이어로 방벽 안에서 간신히 군용 로봇과 엑소슈트의 추격을 따돌렸다.
지금까지 타이어는 펑크가 나지 않고 잘 버텨 줬지만, 하필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짜르와 킬러비, 킬도저는 출발할 때 마구잡이로 로봇들을 학살했었다.
그 업보가 짜르에게 되돌아왔다.
주최 측은 박살 난 로봇들을 거의 수거했지만 뾰족한 팔의 경골 부품 하나가 직선주로에 남아 있었다.
그 부품이 짜르의 차륜형 롤러대시를 찔렀다.
인과응보였다.
뾰족한 프레임 부품이 타이어를 펑크내고 롤러대시 구동모터를 찌르며 한쪽 다리에 급제동이 걸렸다.
제동이 걸린 바퀴가 뒤로 확 쳐지고 다른 다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짜르는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고 제리! 가라아아아!”
“짜르의 목을 따버려어어어!”
마침내 운명적으로 짜르와 제리가 마주치게 되었다.
짜르의 다른 쪽 롤러대시도 엉덩방아를 찧을 때 바닥에 부딪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롤러대시도 포기하고 인간처럼 뜀박질하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다른 로봇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제리도 짜르의 앞에 멈춰 섰다.
한껏 달아오른 관객들의 긴장감은 지금, 이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챠밍걸이나 스카이러너 같은 후위 그룹은 아직도 뒤에 있었고 제리와 짜르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김용기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전상영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봐야죠. 끝까지.”
중화대루에는 관광객더러 관람하라고 커다란 스크린에 캐논볼 레이스 중계가 나왔다.
방송국은 일부러 짜르 뒤에서 카메라를 잡아 제리의 모습이 작게 보이게 연출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제리도 짜르도 움직였다.
쿵쿵쿵!
짜르는 바닥에 닿을 듯이 오른손 주먹을 내렸다가 부웅하고 올려 쳤다.
단순한 어퍼컷이지만 이건 헤비급의 자존심이 담긴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제리는 바로 뒤로 백스웨이하면서 어퍼컷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가볍게 잽을 먹였다.
잽?
잽 따위가 헤비급의 짜르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렇지! 제리! 콤비네이션이다!”
어느새 김용기는 전광판 화면을 보면서 복싱 자세를 취했다.
공공 로봇이었던 제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주었던 바로 그 콤비네이션 공격이었다.
잽, 잽.
짜르는 단숨에 제리의 손을 잡아 패대기치려고 했지만 제리는 그것 역시 꿰뚫어 봤다.
조금 전까지 제리는 어빈이라는 최고의 그래플러와 함께 팀을 이뤘었다.
제리는 짜르의 손을 패링해서 아래로 튕기고는 짜르의 메인 헤드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지면을 떠받친 다리에서 쭉 뻗은 오른손까지 온전히 한 점에 모든 동력이 집중된다.
그리고 지금껏 아꼈던 도어노커 탄약이 터지면서 쿵하고 진동이 짜르의 머리로 전달되었다.
짜르의 머리가 짜부라지면서 제리의 오른손이 짜르의 머리통 깊숙이 박혔다.
“그렇지! 그거야 제리! 그거라고오오오!”
김용기가 전국체전 금메달을 땄던 바로 그 깔끔한 스트레이트였다.
어찌나 제리의 손이 깊숙이 박혔는지 짜르의 가슴팍에 있는 양자두뇌를 타격했다.
퍽!
푸른 전류와 검은 유동액이 치솟아 오르고 제리의 앞에 거대한 짜르의 몸뚱아리가 무릎을 꿇었다.
제리는 힐끔 약 7백 미터 뒤에 있는 챠밍걸 등을 확인하고 한 발을 짜르의 목에 대고 두 손으로 놈의 찌그러진 머리통을 뽑아 들었다.
“제리이이이! 제리이이이이이!”
김용기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옆에 있던 정비사 서 씨는 입을 떡 벌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김용기가 늘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진짜로 벌어졌다.
“저, 정말로 스트레이트로 짜르를 쓰러뜨렸어.”
캐논볼 레이스 최대의 이변이 발생했다.
R-3 리그의 제리가 R-1 리그의 헤비급 챔피언 짜르를 복싱 기술로 무너뜨렸다.
콤비네이션 공격 한 번이,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펀치가 짜르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제리의 팬은 물론이고 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제리는 뽑아 든 짜르의 목을 들고 여유롭게 결승점을 향해 달렸다.
챠밍걸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고 이제 우승자는 제리였다.
제리는 한 손으로 가슴의 제리 캐릭터 스티커를 두드렸고 방송카메라는 로봇의 행동을 크게 클로즈업했다.
제리가 혀를 내밀고 ‘에베베’하고 메롱하는 포즈의 스티커.
정말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제리 그 자체였다.
이제 결승점은 불과 10여 미터.
제리는 여유롭게 앞을 향해 전진하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갑자기 멈춰 섰다.
– 아! 설마 다른 로봇들도 전부 박살 내려는 걸까요? 검은 폭군의 뜻을 이어받은 이 제리! 이제 하얀 폭군으로 그 폭정을 시작하려 하나요오오오!
해설자는 제리의 뜻을 오해하고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제리는 짜르의 머리를 던지고 갑자기 뒤로 달렸다.
사람들이 또 다른 이변을 감지한 건 제리가 움직인 이후였다.
김용기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제리! 너 뭐 하는 거냐!”
이제 10미터만 가면 우승이다.
어빈은 리타이어 했지만 우승 상금, 적어도 400억 원은 김용기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리는 용감하게 역주행하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살인 로봇.
챠밍걸이나 스카이러너는 무사했지만, 뜻밖에도 롱쎄잉 스타디움에는 살인 로봇이 하나 섞여 들어왔다.
이 로봇은 자동차형 로봇이었고 고가도로 근처까지 갔다가 로직에 오류를 일으키며 다시 롱쎄잉 스타디움으로 들어왔다.
“제리…… 너…….”
로봇 3원칙이 완전히 붕괴한 로봇은 스타디움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관중석으로 돌진했다.
그 앞을 제리가 막아섰다.
김용기는 제리의 모습을 보고 허허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제리를 봤을 때처럼 제리는 관중석으로 돌진하는 트럭을 또다시 막아섰다.
그때는 그냥 무력하게 뻗었던 스트레이트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어빈이 준 블레이드가 남아 있었다.
이제 제리의 배터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블레이드를 사용하면 제리는 그 자리에 정지하게 된다.
중요한 건 시간이었다.
피트의 정비 로봇이나 다른 로봇에게 배터리를 받아 배터리를 교체할 시간은 없었다.
우승?
제리는 이미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2톤 트럭만 한 자동차형 로봇을 막아섰다.
트럭 로봇이 제리의 작은 몸체를 덮쳤지만 제리는 용감하게 칼을 놈의 심장부에 찔렀다.
제리의 호버대시가 뒤로 드르르륵 밀리다가 제리의 무릎 관절이 퍼컥하고 부러졌다.
제리는 어빈의 다리로 트럭 로봇의 무게를 버티고 왼손에 든 블레이드를 비틀어버렸다.
트럭 프레임이 두동강 나면서 트럭 반쪽이 경기장 트랙에 처박혀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은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관성으로 아직도 관중석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그리고 또다시 스트레이트였다. 반동강 난 트럭 로봇의 몸체가 흔들리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그 어떤 때보다 깔끔한 스트레이트였다.
모든 힘을 담은 스트레이트 펀치가 트럭 로봇의 배터리에 꽂히고 트럭 로봇이 폭발했다.
화염이 제리의 하얀 프레임을 휘감고 제리는 한쪽 다리로 세로로 반동강 난 트럭을 막아섰다.
가가각!
아까 교체한 어빈 프레임의 다리가 지지대가 되어 트럭 로봇은 관중석 50센티미터 앞에서 가까스로 멈췄다.
“제리이이이이!”
관중석에 있던 관광객 꼬마가 불타는 제리에게 손을 뻗었다.
만약 제리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저 꼬마는 트럭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김용기는 그 장면을 보고 제리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일개 공공 로봇이었던 제리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펀치를 뻗었다.
“제리, 너는. 너란 녀석은…….”
뒤늦게 스타다움의 관리 로봇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제리에게 소화액을 뿌려댔지만, 너무 늦었다.
제리는 스트레이트를 뻗은 자세로 하얗게 불타버렸다.
하얀 복서가 거대한 트럭에 스트레이트를 찌르는 모습.
제리는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