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00
제200화
“예이예, 누구 명이시라고.”
이진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충 넘기려고 했다.
“야, 내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위에 개코 스트리퍼가 와 있어.”
이진영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
이효진과는 장현권 사건으로 휴전 아닌 휴전을 했지만, 이효진 이야기만 나오면 이진영은 괜히 가랑이를 오므리곤 했다.
“그 여자는 또 왜 왔대요?”
“아마 본청에서 롱꺼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나 봐. 그 사전 정리로 온 거지.”
이진영은 ‘아아’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사전 정리.
웡꺼의 돈을 받는 형사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고 이놈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롱꺼 패거리를 싹쓸이할 수 없다.
난민 방벽이 무너지고 캐논볼 레이스로 전방위적 테러를 당한 후 본청이나 청와대에서도 본격적으로 롱꺼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거철이라 눈치 보기 바쁘시고 레임덕이실 텐데 대애단한 결정을 내리셨군요.”
“선거철이니까 더더욱 난리지 뭐. 대통령은 같은 여당인 장동천이를 밀어주고 싶을 테니까.”
아들이 죽고 웡꺼의 요리사에게 호된 맛을 보고 난 후 장동천은 사람이 완전히 의기소침해졌다.
보통 때라면 TV에 나와서 ‘난민은 다 때려죽여야 합니다!’ 같은 혐오 발언을 하며 인기를 끌었을 테지만 지금은 난민의 난자도 꺼내지 않는다.
웡꺼의 요리사가 아들을 죽이고 장동천까지 요리할 뻔하면서 장동천은 큰 충격을 받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웡꺼는 딱히 장동천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장동천은 음모론에 빠진 사람처럼 웡꺼가 자신을 죽이러 올 거라 떠벌리고 다녔다.
국민들은 나쁜 놈은 대통령으로 뽑아도 찌질한 겁쟁이는 뽑지 않는다.
장동천이 위축되는 바람에 난민 방벽 붕괴라는 호재가 생겼어도 그의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차라리 아들의 살인 행각을 뻔뻔하게 변호하고 난민에 대해 강경 발언을 할 때가 나았다.
이진영은 책상의 종이신문을 보고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아사리 판이네요. 덕분에 우리 일도 많아졌고. 부장님도 집에 못 들어가시고.”
사무실 한쪽에는 세탁한 양말과 팬티가 널려 있었다.
“야, 이진영이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라잉? 영수증이랑 내역서 가져오고, 패트한테 사건배당 했으니까 그것도 확인하고.”
“예이예.”
이진영은 중세시대 예법처럼 손을 아래로 내리고 인사하고는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롱꺼와의 전면전.
중부서에는 벌써부터 살벌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각 대응팀마다 소총이 불출되어 책상에 탄창과 소총이 널브러져 있고 벌써부터 방탄모를 뒤집어쓰고 사무를 보는 형사들도 있었다.
“다들 오바하긴.”
이진영은 44팀의 팻말로 걸어갔다.
팀원들은 전부 자리에 있었고 민원 전화를 받느라 난리였다.
본청 상황실로 가야 할 전화들이 바로 직통으로 걸려온다.
이번 사태로 인해 물리적인 방벽뿐만 아니라 경비 시스템까지 무너진 여파였다.
캐논볼 레이스 중에 방벽 방어담당자 최상훈이 크게 부상을 입었고, 경비 시스템도 망가졌다.
그 바람에 다른 개구멍으로 난민들이 많이 들어왔다.
중부서에 잡혀 온 난민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난민들은 대한민국에 들어오자마자 온갖 사고를 쳤다.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중범죄는 물론이고 소매치기나 절도 같은 범죄까지 눈에 띄게 늘었다.
이진영은 행어 위에 있는 종합상황실을 올려다봤다.
높으신 양반들이 그곳에서 회의 중이었다.
마침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민호가 딱 이진영과 눈이 마주쳤다.
이민호는 이진영에게 검지와 중지로 담배를 피우자는 시늉을 했다.
이진영은 두 손으로 O자를 그리고는 먼저 흡연장으로 나갔다.
“오, 이진영이 센스 있는데?”
이민호는 이진영에게 커피를 받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강력부장님이 왜 쫓겨 내려오셨나 했더니 국장님도 계셨었네요?”
“야, 나도 눈치 보느라 죽갔다. 와대 직원도 있어.”
“청와대요?”
“롱꺼를 박살 내기 전에는 안 돌아갈 기세야. 제기랄, 정부가 언제부터 월미도를 그렇게 신경 썼다고. 아무튼 이진영이 이효진도 와 있으니까 당분간 팀원들에게 조심하라고 해.”
“예, 이미 들었습니다. 근데 육공이 머리를 안 디미는 게 이상하네요.”
“그야…….”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이민호의 말을 대신 이어 말했다.
“그야 정 대령이 나타났으니 육공은 기가 죽을 수 밖에요.”
이진영은 담뱃불을 붙이는 신희정을 보고 씩 웃었다.
“흐흐흐 아이고 잘쌩긴 요원님, 전 방벽 무너지고 숙청당했을 줄 알았는데요?”
“뭐, 제가 사내 정치에 있어서는 달인 수준이라. 그리고 팀장님 덕분에 계보가 딱 잡혀있어서 괜찮습니다.”
장현권 사건 때 정보국의 일부 세력이 장동천의 하수인 노릇을 했고 그때 신희정 계파의 정적들은 다 쓸려나갔다.
신희정은 뒤늦게 이민호 국장과 악수했다.
“아, 그리고 국장님은 저엉말 오랜만이네요. 천도영 유괴사건 이후 처음인가요?”
“신희정 차석.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이진영은 처음으로 신희정의 직함을 듣고는 뭔가 어색한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요원님이 온 걸 보면.”
“골치 아픈 일들이 생겼다는 거죠, 뭐. 아이고, 정보국에서 백업하게 되었고 월미도를 잘 아는 제가 배정된 거죠.”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군요.”
“그것도 뭐 그렇죠. 뜨거운 감자라.”
신희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보국은 당연히 국가안보와 관련 있는 월미도를 주시하고 있었고 수많은 정보자산으로 롱꺼의 정체를 쫓고 있었다.
“아무튼, 국장님도 요원님도 자주 보겠네요. 그건 좋네요.”
이민호, 신희정 둘 다 씩 웃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다시 줄담배를 피우려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정문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이고오오. 어째 너구리굴 멤버들이 모였다 했더니 마지막 멤버분께서 오셨네요오?”
정문에 선거유세 차량이 멈춰 서자마자 경찰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차량으로 몰려왔다.
“이세화! 이세화!”
“꺄아악! 언니 팬이에요오오! 사인 좀 해주세요!”
이제 초여름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이세화는 긴 팔 블라우스에 바지정장 차림이었고, 선거운동 중이라 서가영의 이름이 쓰인 핑크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선거유세 차량에서 내렸다.
이세화의 인기는 장동천이 몰락하며 더더욱 치솟았다.
지금 지지율은 안보문명당 후보 서가영보다 이세화가 더 높았다.
그녀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면 정말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만요오. 중부서 들렀다가 다시 나올게요.”
이세화는 미소를 지으며 팬들을 뒤로하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오! 뭐야뭐야. 저 기다리신 거예요?”
이세화는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 남자를 바라봤다.
이진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우연입니다. 요렇게 두 분은 일 때문에 중부서에 오셨고요.”
“알아요. 담배나 하나 줘봐요.”
“그, 피워도 되겠어요?”
이진영은 이세화의 어깨 너머로 중부서 입구에서 환호하는 팬들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어차피 나 담배 피우는 거 이미 토론에서 신나게 공격당했으니까. 그리고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제법 멋지게 찍었더라고요.”
세 남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세화까지 합류하면서 너구리굴 멤버가 전원 모였다.
이진영이 한승우 사건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신희정이 정 대령 때문에 고초를 겪으면서 다시는 열리지 못할뻔했던 너구리굴 회의가 다시 열린 것이다.
“근데 이세화 선배 진짜 왜 오신 거예요?”
“난민 문제 상담소 때문에요.”
“아, 그거어.”
방벽이 무너지면선 난민 문제는 더더욱 기묘하게 변했다.
러다이트계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 기본소득자였고 난민 문제에 강경파들이었다.
아직도 서울대를 점거하고 있던 학생 운동가들이 난민 사무소를 습격했다.
예로부터 인간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인간들에게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인간해방’은 국경을 넘어 모든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는 게 맞지만, 테러리스트들은 난민까지 잡아 죽였다.
테러 양상이 난민 습격도 겸하게 되면서 점점 더 뒤틀린 형태로 변했다.
이세화는 바로 불탄 난민 사무소에 들러 직원들을 위로하러 왔다.
“그리고, 팀장님하고 마침 이민호 국장님도 계시네요. 두 분에게 부탁드리러 왔어요. 롱꺼와의 전쟁이 벌어지면 많이들 죽게 될 거예요.”
“예, 경찰도 강경하게 나갈 테니까요.”
“부디 현장에서 피해자가 많이 생기지 않게. 잘 부탁드립니다.”
이세화는 이민호와 이진영에게 고개를 숙였고 두 사람은 급히 고개를 숙여 맞절했다.
이세화는 여전히 고고했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훅하고 내뱉고 신희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왜 내 전화 안 받았어요?”
“그게…… 어젠 좀 일이 바빠서. 그리고 그건요. 그, 여기서 할 말은…….”
“뭐야아. 감히 내 전화를 안 받아요? 죽을래요?”
이진영은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이세화, 신희정은 둘 다 잘 생기고 예뻐서 그런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아무튼 이따 호텔에서 봐요. 기자들은 알아서 잘 따돌리고.”
“그, 그것도. 여기서 할 말은…… 흠흠.”
신희정은 일류 정보요원답지 않게 귀까지 빨갛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사정을 모르는 이민호는 이진영의 팔을 잡고 ‘뭐야? 뭐야?’를 연발했다.
“자아아, 다들 바쁜 분이시니. 2차 너구리굴 회의는 여기서 끝. 저도 영수증 정리하고 배당받은 사건 확인하러 가야겠습니다.”
이진영은 제때 신희정을 도와줬다.
신희정은 헛기침을 연발하다가 표정이 되돌아왔고 이세화는 얄밉다는 듯 이진영을 흘겨봤다.
네 사람 다 정말로 바쁜 사람들이었다.
네 사람은 각자 신발 바닥에 담배를 끄거나 재떨이에 담배를 끄며 서로 악수를 했다.
신희정과 이세화는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지금 바깥에는 기자 로봇들이 잔뜩 있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찍히기라도 한다면 정보국은 물론이고 안보문명당에서도 난리가 날 상황이었다.
이진영은 괜히 신희정의 어깨를 툭툭 쳤고 이민호는 계속 옆에서 꿍얼거리며 이진영에게 캐물었다.
“뭐야? 뭔데? 호텔이 뭔데? 차석님, 이세화나 안보문명당이랑 정보국이 설마 뭐 꾸미는 거 있어요?”
“아, 그런 게 있습니다. 뭐 꾸미기는 꾸미겠지요. 다른 거겠지만. 패밀리라던가.”
신희정은 다시 귀가 빨개졌다.
“아, 아무튼 저는 일이 바빠서.”
“예이예, 바쁘시겠지요. 호텔에서도요.”
신희정은 두고 보자는 듯 이진영에게 삿대질을 하고는 먼저 뚜벅뚜벅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민호는 이런 쪽에는 눈치가 둔했고 계속 이진영을 잡고 정보국과 안보문명당의 패밀리 커넥션(?)을 캐물었다.
청사 안에서는 마침 윤숙희가 자판기 커피를 들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신희정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팀장님. 저 사람이 그 잘쌩긴 요원이에요?”
“하이고오. 하여간 죄 많은 남자라니까. 윤숙희 팀원. 전에도 말했지만 상대가 좋지 못하다네.”
“아니 상대가 좋지 못하다니 그게 뭔 소리예요?”
“꿈 깨라는 소리지. 윤숙희 팀원, 우리는 사건이나 수사해야 하네. 일하자고. 일.”
이진영은 윤숙희의 등을 두 손으로 밀면서 말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빡세질 테니까.”
그는 예언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넘버즈
5부 처리번호 나G 8859213,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