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02
제202화
근육질 사내는 팔로 봉을 막았지만 진가구는 봉의 궤적을 틀어서 창처럼 내질렀다.
목이 찔린 백인 남자가 캑캑대며 쓰러졌다.
빡!
진가구는 뒤이어 달려오는 일행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는 놈의 갈비뼈를 봉으로 내리쳐 부러뜨렸다.
단숨에 뚱땡이까지 세 놈이 데굴거리고 관광객 일행은 진가구의 봉술에 놀라서 주춤거렸다.
진가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뚱땡이에게 다가가 맥주병으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한하린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진가구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깨진 유리병을 뚱땡이의 목에 가져다 댔다.
탕탕탕!
이곳 챔피언 거리는 롱꺼의 영역이었다.
양복 차림에 붉은 완장을 찬 롱꺼 조직원들이 허공에 공포를 쏘면서 몰려들었다.
롱꺼 조직원들은 진가구의 완장으로 그가 체잉꺼의 조직원이라는 걸 알아봤다.
“무슨 일이야. 형제?”
“아니, 이놈이 내 여자를 강간하려고 했어.”
“뒈지려고 환장했군. 형제의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걱정 마. 우리가 알아서 혼찌검을 내 주지.”
진가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깨진 맥주병을 버렸다.
이곳은 롱꺼의 영역이고 제아무리 같은 조직원이라지만 여기서 사람을 해치는 건 월권행위였다.
진가구는 피 묻은 봉을 라멘 노점에 되돌려 주고 한하린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오빠는?”
“다 봤잖아? 난 무적이야,”
진가구는 여자친구 앞에서 한껏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한하린의 표정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고 겁을 먹은 채였다.
진가구는 한하린을 안아줬다.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이젠 술집에서 일하지 말자. 나도 월급이 올랐는데 이런 데서 일할 필요는 없잖아?”
한하린은 작은 새처럼 진가구의 품 안에서 덜덜 떨었다.
사실 그녀는 희롱한 놈들보다도 진가구가 더 무서웠다.
희롱 따위야 술집에서 일하다 보면 늘상 마주치는 거였고 근처에는 롱꺼 조직원들이 늘 순찰을 돌기에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방금 롱꺼의 조직원들이 없었다면 진가구는 뚱땡이를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깨진 맥주병으로 목을 찌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진가구는 다정한 남자지만 가끔 눈이 돌아가면 폭력적으로 변했고 한하린은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진가구는 사이드7 점장에게 하린이랑 먼저 퇴근한다고 말했고 점장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들이 사는 곳은 텐트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곳도 아니었다.
굴다리 가장 깊숙한 곳에는 난민용으로 세워진 3층짜리 임시 가건물이 늘어서 있다.
난민들을 수용할 때 만든 임시 건물들이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난민들은 계속 신간척지에 뿌리를 박고 살게 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컨테이너 구조의 임시 가건물은 창문도 있었고 그나마 괜찮은 숙소였다.
상당수의 난민들은 파란 방수포를 친 난민용 텐트 아래서 살아간다.
진가구와 한하린이 처음 보금자리를 꾸민 것도 바닷가에 있는 텐트였다.
그래도 젊은 연인들은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며 춥디추운 한국의 겨울을 버텨냈고 진가구의 급료도 오르면서 그들은 임시 건물의 방을 잡았다.
“어, 진가구. 술 한잔할 거면 이리로 와. 좋은 안줏거리가 생겼어.”
근처에 사는 아줌마가 오리를 손질하다가 들어 보였다.
진가구는 한 손을 들어 됐다는 표시를 하고 계단을 올랐다.
이웃 주민들은 진가구가 체잉꺼의 조직원이라는 걸 알고도 친근하게 대했다.
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적이다.
어차피 젊은 남자들은 웡꺼의 공격부대나 체잉꺼, 잠꺼 같은 조직원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심지어 13살, 14살짜리들이 웡꺼의 공격부대에 지원해서 마약에 취해 총을 쏘기도 했다.
거기에 난민끼리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고 중국 특유의 꽌하이(關係) 문화로 똘똘 뭉쳐 있다.
진가구는 늦은 밤인데도 안부를 묻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컨테이너 겉은 허름하지만, 안은 한하린이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화사한 파란색 벽지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붙어있고 조촐한 화장대와 작은 TV, 냉장고 따위가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한하린은 진가구보다 두 살 어린 21살이었고 한창때 아가씨답게 꿈도 많았다.
곳곳에는 자기계발서에서 옮겨적은 좋은 문장이나 목표들이 번체자 한자로 적혀 있었다.
진가구는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괴로웠다.
자신이 한하린의 미래를 얼룩지게 한 게 아닌가 끊임없이 생각했다.
“오빠, 손 줘봐.”
“괜찮아. 내 피 아니야.”
진가구는 싱크대 겸 세면대로 가서 손을 닦았고 한하린은 그를 뒤에서 안고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오빠, 이제 그만 하면 안 될까? 레이 아저씨가 요리 가르쳐준다고 그랬어. 그 아저씨 가게 잘 되는 거 알잖아?”
손을 닦는 진가구의 동작이 멈췄다.
수챗구멍으로 물이 줄줄 흐르고 진가구는 한동안 피와 섞인 물이 흘러가는 걸 바라봤다.
한하린이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잠그고 진가구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만하자. 오빠 무섭다고 늘 그랬잖아.”
“하린아. 하지만…… 돈이 모자라. 조, 조금만 더 모으면 국적을 살 수 있을 거야.”
진가구가 한하린에게 댄 핑계였다.
난민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주는 브로커도 있었고 돈만 있다면 법의 뒷구멍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방법도 있다.
“난, 국적 필요 없어. 그냥, 그냥 평생 이런 데서 살아도 좋아. 오빠만 무사하면.”
“하린아, 여긴 가정을 꾸리기엔 너무 안 좋아. 알잖아? 난민들은 미래가 없어. 남자아이들은 깡패가 되거나…….”
차마 진가구는 ‘여자들은 창녀가 되거나’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차가운 현실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도 직업을 갖지 못해서 ‘라종 인생’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데 난민들은 오죽하랴?
진가구가 잠입경찰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아이들에게 난민이라는 딱지를, 라종 인생이라는 딱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걱정 마.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조금만 더 참으면.”
그는 관리관 심 부장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말하고 있는 진가구 자신도 과연 그 ‘조금만’이 언제가 될지, 또 이 잠입경찰의 굴레가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린아. 그리고 나…….”
한하린이 물기 어린 눈으로 진가구를 바라본다.
“나…… 사실은.”
목까지 ‘나 사실은 경찰이야.’라는 말이 올라왔다.
“나 사실은. 배고프다.”
“뭐야아. 밥도 못 먹고 다니는 거야? 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간단한…….”
“아니, 네가 먹고 싶다는 거였어.”
진가구는 한하린을 꼭 끌어안고 키스했다.
한하린의 호흡도 거칠어지고 진가구는 바텐더 조끼를 벗기고 한하린의 가슴을 틀어쥐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찰이니 조직이니 하는 걸 내던지고 진가구는 한하린의 남자친구로 있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 쓰러지면서 서로의 몸을 탐닉했고 거친 호흡과 야릇한 교성이 컨테이너 안에 가득 찼다.
“아 니들 적당히 좀 박으라고! 날이면 날마다 박아대니 침대가 남아나겠냐!”
방음이 안 되는 곳이라 옆집 사람이 벽을 두드리며 광동어로 불평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사랑을 나눴다.
* * *
다음날, 진가구는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한하린의 가슴을 어루만지려고 옆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 출근한 건가.”
한하린은 낮에는 값싼 기념품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밤에는 바텐더로 일한다.
반면 진가구는 일이라는 것이 출근 시간이 정해진 일이 아니었다.
주 업무는 도박장 관리였지만 때론 수금을 하기 위해 출장을 갈 때도 있고 가끔 방송국에 가기도 했다.
체잉꺼의 사업영역은 로봇 도박이나 경마, 혹은 연예계 사업이었다.
로봇 배우들을 보유한 기획사 중 두 개가 체잉꺼의 업체였고 은근슬쩍 방송, 영화계에도 체잉꺼의 자본이 뻗쳐있었다.
진가구는 잠입경찰이 된 후 체잉꺼 패거리에서 향불을 들었지만, 수완이 좋아서 그냥 똘마니는 아니었다.
체잉꺼는 눈치가 빠른 진가구를 꽤나 좋아했고 그에게 이런저런 일을 맡겼다.
“오늘은…… 사무실이로군.”
진가구는 비키니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옷을 꿰입었다.
한하림의 살림살이는 딱 부러지고 야무졌다.
옷장에는 깔끔하게 세탁한 옷이 정갈하게 걸려 있다.
어제 두 사람이 뒹군 침대 주변도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나란히 널려있다.
이만한 아내감도 없었다. 가끔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할 때가 있었으니.
진가구는 빙긋 웃고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나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아…….”
진가구의 완장만큼은 한하린이 세탁하지 않았다.
때가 묻고 핏방울도 튄 완장이 옷장 밑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늘 이 푸른 완장을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벽이 무너진 후 조직원들은 무조건 이 완장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웡꺼 공격부대가 피아식별을 위해 찼던 완장 문화가 롱꺼 산하 모든 조직으로 퍼져나갔다.
진가구는 완장을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제 불평을 했던 노인이 주먹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냈다.
“작작 좀 해. 아주 여자를 잡드라 너.”
“흐흐흐, 죄송. 죄송.”
노인도 딱히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고 반쯤은 놀리는 투였다.
텐트촌에서도 아기는 태어나고 남녀는 사랑을 나눈다.
시끄럽지만 않다면 그깟 섹스 따위야.
난민들은 고향을 떠나온 후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문화가 생겼고 난민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다 형제자매 같은 분위기였다.
어제 오리를 손질하던 아주머니는 오리가 남았다며 억지로 진가구의 입에 고기를 물려줬다.
난민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며 진가구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삼촌! 나 봉술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어, 아랑, 나중에 가르쳐줄게.”
“에이, 만날 나중이래.”
아이들은 진가구가 가끔 수련하는 봉술이나 팔극권 흉내를 내면서 합합하고 자기들끼리 치고받았다. 진가구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힘차게 앞으로 걸었다.
어제 한하린과 뜨거운 밤을 보내서일까?
가슴속에 있던 불안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것 같았다. 노점 거리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노점 거리 가로등에는 새로운 시체가 걸려 있었다.
바늘. 針.
시체의 이마에는 바늘이 꽂혀있고 바늘에는 노란색 경찰 인사카드가 같이 꽂혀있다.
시체의 이마에 노란색 카드가 있다 보니 어딘지 영화에 나오는 강시가 부적을 붙인 모습과 비슷했다.
진가구는 머뭇거리다 인사카드를 바라봤다.
죽은 남자는 웡꺼 산하의 중대장급 인사였고 중년 남자였다.
진가구는 구토를 참으며 뒷걸음질 쳤다.
쎄잉꺼와 웡꺼는 여봐란듯이 잠입경찰들을 하나하나 사냥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체를 걸어놓은 건 경찰더러 보라는 뜻이고 함부로 쳐들어왔다간 이 꼴이 될 거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잠입경관들에 대한 경고였다.
쎄잉꺼는 자수하면 용서하겠다고 공언했고 잠입경찰들을 전부 다 안다고도 말했다.
쎄잉꺼의 의도는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잠입경찰인 진가구는 그 어떤 때보다 공포를 느꼈다.
지금 매달린 시체도 그냥 단숨에 죽인 게 아니다.
몸 곳곳에는 고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불로 지진자국이나 손톱도 깨져 있는 걸 보면 모진 고통을 받다 죽은 게 분명했다.
삐리리리.
진가구는 자신의 핸드폰 소리에도 화들짝 놀랐다.
– 형님 어딨어요? 빨리 와요. 체잉꺼 형님이 찾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