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03
제203화
“어, 알았어.”
진가구는 조직원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였다.
지금 진가구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저 봉기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제 ‘그만하자’라는 한하린의 말을 거부한 것도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잉꺼 조직에 몸담고 있어야 관련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심 부장이 보여준 특별기여자 서류가 부질없는 희망일지라도.
조금만 더.
진가구는 주먹을 꽉 쥐고 체잉꺼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이제는 전과 같지 않았다.
곳곳에 무기가 널브러져 있고 사무실을 드나드는 조직원들은 방탄조끼에 완전무장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진가구. 잘 왔다.”
“예, 형님.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또 도박 배당률에 관한 문제인가요?”
“아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체잉꺼는 EBR-14E 저격소총을 턱하고 진가구에게 내밀었다.
진가구는 업무 특성상 무장할 일이 거의 없었고 고개를 갸웃하며 소총을 받아들었다.
“시험 삼아, 몇 놈 죽여야 할 것 같아.”
“시험 삼아요?”
체잉꺼는 테이블에 노란 경찰 인사카드를 한 장 내려놓았고 진가구는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의 사진이 박혀있는 카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뇨. 이 사람도 짭새였어요? 저도 친하게 지내던 형님이라.”
“어, 나도 좀 충격받았다. 시발 경찰 새끼들 어디까지 바늘을 박아놓은 거야?”
카드의 남자는 잠꺼 산하의 작은 밀수조직 두목이었다.
작은 조직이지만 두목이 경찰이라?
이 카드가 맞다면 원래 조직원이었던 자를 경찰이 포섭했고, 그가 두목 자리까지 꿰찬 것이었다.
“아무튼, 이걸 왜 보여주시는…….”
“진가구, 네가 처리해.”
“제가요?”
진가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직 내에서 사람 처리는 그의 일이 아니다.
“죽이고 귀를 잘라 와. 만수가 같이 갈 거야.”
만수는 키가 작고 딴딴하게 생긴 놈이었고 칼을 잘 쓰는 걸로 유명했다.
진가구도 친하지는 않지만, 직급이 비슷해서 잘 알고는 있는 사이였다.
진가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총기를 점검했다.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총 챙겨가야지.”
“아니 저격총이 무슨 필요가 있나요? 그냥 잡아서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마 그쪽 조직원들이 난리가 날 테니 먼저 저격으로 발목을 잡고 나중에 고문해.”
진가구는 EBR-14E의 망원조준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시험 삼아’라고 말씀하신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건가요?”
“끝? 끝 같은 소리 하네. 이제 시작이지. 네 총솜씨가 우리 조직에서 가장 좋다길래 맡겨보는 거야.”
체잉꺼는 방아쇠 당기는 시늉을 했다.
광동자유군 시절 진가구는 옥상에서 꽤 많은 북중국군을 저격했고 학생들이나 자유군 사이에서 나름 유명했다.
“아, 그랬군요. 저는…….”
하마터면 진가구는 얼떨결에 자신의 정체를 말할 뻔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들킨 상황이고,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같은 동료 경찰을 죽이라는 건가 생각했다.
“저는 뭐?”
“아뇨,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깔끔하면 안 되지. 가능한 한 잔인하고 드럽게.”
체잉꺼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진가구는 따라서 웃을 수는 없었다.
진가구는 부사수격인 만수와 함께 사무실 문을 나섰다.
만수가 뒤따르는 게 영 마뜩잖았는지 진가구는 자꾸 옆을 힐끔거렸다.
“왜?”
“아니, 그냥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싶어서.”
“넌 이쪽 일해 본 적 없잖아. 말하자면 나는 감독관이라 이거야.”
감독관, 관리관.
진가구는 그 말을 굉장히 싫어했다.
“감독관이라니 말 잘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뭘 준비하려는 거지?”
“나도 몰라.”
만수의 표정만 보면 놈도 자세한 건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 업무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체잉꺼는 주 사업 분야가 도박, 연예계 쪽이라 굳이 경찰 사냥에 가담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잠꺼 산하의 조직이라면 잠꺼가 처리해야지 뭐하러 체잉꺼가 처리한단 말인가?
왜 저격총으로 먼저 쏘라는 건지도 의문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잠입경찰을 주로 사냥하는 건 웡꺼의 공격부대였다.
웡꺼 패거리들은 노란색 카드를 가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고 왔다.
비슷하게 생긴 애꿎은 사람이 몰매를 맞아 죽기도 했고,
심지어 잠입경찰이 아닌데도 경찰이라고 뒤집어씌워 죽이기까지 했다.
노란 인사카드는 웡꺼 놈들의 살생부가 되어 난민지구를 흉흉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인사카드를 장례를 지낼 때 뿌리는 저승 노잣돈(紙錢)이라고 불렀다.
하필 지전도 노란색이고 인사카드도 노란색이었다.
그 저승 노잣돈 한 장을 들고 진가구는 구 인천항으로 향했다.
밀수조직은 구 인천항이 본거지였고 이곳은 웡꺼와 잠꺼의 영역이었다.
노란 완장을 한 놈들이 돌아다니다가 체잉꺼의 푸른 완장을 한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두 사람은 간이부두 주변을 서성이다가 사다리를 타고 수산공판장 건물 위로 올라갔다.
건물 옥상은 낡은 콘크리트 가루가 날리는 삭막한 곳이다.
누가 어제 여기서 밤을 불태웠는지 쓴 콘돔과 휴지가 버려져 있었고, 먹다 버린 컵라면 용기들도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진가구와 만수는 옥상 구석에서 밀수업체 건물을 쌍안경으로 확인했다.
과연 체잉꺼가 괜히 저격총을 준 게 아니었다.
30여 명 정도의 조직원들이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으니, 대뜸 인사카드를 내밀며 잠꺼를 잡으러 왔다고 하면 아마 난리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웡꺼들이 경찰이 아닌 사람들도 죽이고 했는지라 인사카드가 있어도 시빗거리가 된다.
“그놈 나오면 쏴.”
“흥, 그걸 누가 몰라.”
이미 체잉꺼는 주변 상인들에게 전화해서 타겟인 당해룡이 출근한 걸 확인했다.
어젯밤에 밀수했던 배도 들어왔으니 그걸 확인하러 배에 오를 것이다.
“진가구, 생각보다 만만찮은데?”
“그러게.”
군소조직이라고 생각했더니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체잉꺼는 당해룡을 죽이고 귀를 잘라 오라고 말했다.
그냥 원거리 저격으로 죽이고 오는 거면 몰라도 시체까지 확보해야 했다.
만수는 가볍게 말했다.
“전부 다 죽여야겠네.”
“저, 전부 다? 저 조직에 있는 사람들이 다 경찰은 아니잖아? 우리 형제들이라고.”
“그럼 어쩌게? 형님은 귀를 잘라 오라고 했어. 저놈들 다 제끼지 않으면 너나 나나 총알받이가 되는 거야.”
당해룡의 조직원들도 전부 완전무장을 하고 잠꺼의 상징인 보라색 완장을 차고 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순간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만수, 차라리 퇴근할 때 노리는 게 낫겠어.”
“여기서 저녁까지 버티자고? 미쳤어? 후딱 해치우고 가자.”
“아니, 기다려야 해. 분명 타이밍이 올 거야.”
진가구는 전쟁 때 저격수 노릇을 하며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기다리기 싫으면 시발, 너 혼자 총알받이가 돼서 앞으로 나가든가.”
“야, 그럼 차라리 쟤네들한테 당해룡이 짭새라는 걸 보여주면 안 될까?”
“안 될걸? 너 체잉꺼 형님이 잠복경찰이라면 믿겠냐? 같은 조직도 아니고 다른 조직에서 띡 나와서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겠어.”
만수는 잠시 생각하다 코웃음을 쳤다.
“그건 그렇네. 두목급이 짭새라니.”
이만수는 경찰 인사카드를 보며 흐흐흐 음흉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근처 편의점에서 요기거리를 사오고 지루하게 기다렸다.
당해룡은 뜻밖에도 사무실에 계속 처박혀 있었다.
조직원들은 밀수선에서 물자를 내리고 트럭에 싣고를 반복했다.
이만수는 따분했는지 여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니 여자친구 진짜 이쁘드라? 밤에 어때? 밤일 잘해줘?”
“…….”
진가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걔랑 한 번만 자면 안 되냐??”
“죽고 싶냐? 하린이는 건드리지 마라.”
“닳는 것도 아닌데. 부탁해봐 봐?”
진가구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이만수를 노려봤다.
“치겠다.”
“맞고 싶냐?”
이만수는 나이프를 꺼내며 씩 웃는다.
“꼬우면 뜨던가? 니가 봉술을 그렇게 잘한다메? 진가 창법의 계승자라고?”
가뜩이나 중압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만수까지 난리였다.
진가구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다시 쌍안경을 들었다.
“저건 또 뭐야?”
당해룡의 사무실에 조직원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고 있었다.
“동우 엔지니어링? 어 저거 팀 어빈의…….”
진가구도 아는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남자와 음침하게 생긴 남자.
“동우 엔지니어링 망하지 않았나?”
짧은 시간 R-3 리그를 불태웠던 어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제리만큼이나 검은 프레임의 로봇을 아쉬워했다.
소문으로는 동우 엔지니어링이 불법 인공지능 OS 개조로 마이크로웍스에게 제소당해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진가구, 아는 사람이야?”
“어, 너 모르냐? 어빈이랑 제리.”
이만수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진가구는 자세히 설명해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그는 왜 김대현과 전상영이 당해룡의 사무실에 나타났는지 궁금해했다.
웡꺼는 중부서의 어지간한 형사들을 다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44팀 일부 형사들의 얼굴은 잘 몰랐다.
장현권 사건 때 강력부 대응 1팀이 뿌리째 뽑혔고 이효진의 내사 11팀에 웡꺼의 돈을 받은 형사들이 잡히면서 웡꺼의 정보망에도 구멍이 생겼다.
형사들은 이효진을 두려워해서 웡꺼에게 정보를 잘 전달하지 않았고 44팀의 신상은 그저 경찰 24시에서 단편적으로 나온 사진들만 떠돌아다녔다.
창문 너머로 그 전상영과 당해룡이 뭐라뭐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로봇을 가져오는 거였는데.”
보조 로봇이 있다면 독순술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낼 수도 있다.
당해룡은 전상영과 악수를 하고 이내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전상영은 음침한 얼굴로 빵끗 웃고는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조직원들 중 몇 명은 전상영을 아는 건지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이만수가 쌍안경을 보다 말고 말했다.
“저 새끼들 짭새 아니야?”
괜히 진가구가 움찔했다.
“짭새라고?”
“짭새 특유의 냄새가 나.”
“냄새는 무슨.”
“그리고 생각해봐. 당해룡이 짭새니까 저 박스 안에 조직의 정보들이 담겨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저놈들은 뭐겠어? 짭새지.”
이만수의 말은 근거가 부실했지만, 소 뒷걸음질로 쥐 잡듯 얼떨결에 김대현과 전상영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놀라운 감이었다.
“진가구? 저놈들부터 처리할까?”
“저놈들부터?”
“박스부터 빼앗자고.”
진가구는 심하게 갈등했다.
잠입경찰이 같은 경찰을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죽였다고 변명해도 과연 특별공로자 자격을 받을 수 있을까?
진가구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으려다 황급히 저격총을 들었다.
“지금 그거 생각할 때가 아니야. 움직인다.”
당해룡이 퇴근을 하려는 건지 서류 가방에 물건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진가구는 총의 안전레버를 내리고 조준경으로 당해룡을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