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08
제208화
“갑자기 타라고 한 건 미안한데. 이왕 탄 김에 그냥 뜬 소문이라도 좋고 하다못해 농담이라도 좋아. 뭐라도 말해주겠어?”
전항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녹음 되는 거 아니죠?”
“장사 하루이틀 하냐?”
“하긴, 아저씨는 믿을만 하지. 그런 말이 있어요. 구룡의 눈.”
“구룡(九龍)의 눈? 까우롱?”
구룡은 홍콩의 구룡반도를 뜻하는 거라 광동사람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단어였다.
오히려 그래서 전항매 같은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 롱꺼가 구룡의 눈을 찌를 거라고. 그런 소문이 있어요. 이것도 술집에서 지나가는 말로 들은 거예요. 치 가우롱게 응안(刺九龍嘅眼).”
전항매는 오늘 벌어진 서가영 피습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이진영은 운전석에서 아예 몸을 돌리고 백 달러를 더 얹어서 전항매에게 건넸다.
“받어. 돈이 많이 필요해질 거야. 생필품이랑 먹을거를 미리 쌓아둬라. 전쟁이 터지면 아마 유니세프나 자선단체의 난민지구 지원도 끊길 거야. 너 딸린 식구도 많잖아.”
“…….”
“새끼, 받으라니까. 돈은 가지고 있는 편이 나아.”
전항매는 사비를 털어 주는 이진영을 보고 울컥했다.
“아저씨…….”
“이제 다시 너를 부르지 않을 거다. 일이 다 끝나면 같이 밥이나 먹자.”
사실 이진영은 전항매를 보고 정보를 캐려는 의도보다는 돈을 주려고 불렀다.
전항매는 조직원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경찰 끄나풀부터 날품팔이까지 가리지 않고 했다.
경찰과 롱꺼 조직과의 전쟁은 이런 일반 소시민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를 바 없다.
자선단체 지원도 끊길 테고 변변한 일거리도 싹 마를 테고 이 상황에서는 정말로 굶어 죽는 사람도 발생할지 모른다.
이진영은 전항매더러 가족을 위해 돈으로 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재기 할 때는 조금씩 몰래, 뭐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전항매는 돈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냥 방벽 넘어오는 건 어때? 넌 한국 국적 있잖아?”
전항매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생들 때문에?”
“예.”
“유언이었거든요. 잘 돌봐달라고.”
이진영도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전항매는 딸린 동생들이 많았고 그 아이들은 난민번호를 부여받은 난민이었다.
이진영은 다시 핸들을 잡고 으슥한 곳에서 전항매를 내려줬다.
전항매는 영리하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거리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었다.
“저승노잣돈이라 그 정도면 끄나풀도 거의 다 잡혀 죽었을 거야. 저 자식…… 무사해야 할 텐데.”
EV-1은 ‘잘 될 거다.’라는 식의 무책임한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편이 이진영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이 충직한 로봇은 잘 알았다.
“아무튼, 이브이. 저 녀석 만날 하릴없이 돈만 타가다가 이번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줬군 그래.”
– 구룡의 눈 말씀이십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대권주자를 뭐라 부르지?”
– 잠룡(潛龍)이요.
EV-1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잠룡.
아직 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물속에 있는 용.
이 관용어는 대통령 후보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경선에서 탈락한 사람들이나 당내에서 유력자들에게도 자주 잠룡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롱꺼 이 미친 새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관여하려고 하고 있어. 이민호 국장님하고 신희정에게 긴급메시지를 넣어. 구룡의 눈. 최소 아홉 명이 노려지게 될 거야.”
EV-1은 이진영이 시키는 대로 긴급메시지를 발송하고 이진영에게 말했다.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회 혼란이 목적이라면 왜 서가영 후보를 노린 걸까요?
“페어차일드.”
이진영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EV-1이 뛰어나도 이진영처럼 메타정보를 뛰어넘는 사고를 할 수는 없었다.
– 페어차일드 개발이요?
“그래, 롱꺼는 정 대령을 매개체로 손을 잡았어. 놈들이 바라는 건 이 난민지구를 갈라 먹고 링로드의 이익을 꿀 빨기 위해서지. 그럼 다음 수순은 뭘까?
– 아, 이제야 서가영을 왜 노렸는지 알겠군요. 잠룡들을 제거하면 또 다른 잠룡이 승천할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거야. 롱꺼와 페어차일드는 선수교체를 하려는 거야.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걸 실행하는 실행범이 바로 정 대령, 혹은 롱꺼일 테고.”
– 페어차일드 연찬회에 참석한 명단 검색했습니다. 아, 그리고 페어차일드 측의 잠룡이 누가 될지는 곧 드러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 직접 보십시오.
EV-1은 허리케인의 네비게이션에 지금 막 뜬 뉴스를 띄웠다.
“자, 장동천이 사퇴했다고?”
구룡의 눈.
분명 그 잠룡들 중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장동천이 사퇴했다.
이진영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동천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장동천은 꽤나 심이 질긴 인물이었다.
아들이 죽어 나가는 판국에도 사퇴하지 않았고 웡꺼의 요리사에게 호된 맛을 보고도 두문불출할지언정 절대로 사퇴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생각보다 굉장했고 여러 가지 세력이 대통령 후보를 떠받치고 있다.
장동천은 원래는 사퇴하고 싶어도 사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그 장동천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정계까지 은퇴한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퇴 내용은 ‘아들의 죽음을 자연인인 아버지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라는 것이었지만 이진영은 그게 핑곗거리라는 걸 잘 알았다.
만약 그런 이유였다면 웡꺼의 요리사에게 피습당한 직후 사퇴했을 것이다.
대선을 한 달 남기고 장동천이 사퇴하고 서가영이 피습당하면서 두 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서가영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앞으로 선거 때 어떻게 될 것인지 불투명하고 벌써부터 문명당 내부에서는 선수교체 이야기가 떠돌았다.
“미, 미친 새끼들.”
이진영도 충격에 빠져 잠시동안 넋놓고 뉴스 화면만 노려봤다.
“이브이,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만약, 페어차일드가 키우는 잠룡이 난민들의 정부를 인정한다면…….”
– 롱꺼 놈들이 바라는 대로 봉기와 함께 폭력조직으로 이뤄진 임시정부가 들어서겠죠. 그리고 그 정부는 미국, 페어차일드와 손을 잡고 난민지구를 개발하고 링로드의 이익을 독점할 테고요.
생각만 해도 아찔한 미래였다.
이진영은 난민들의 문화를 깊이 존중하지만, 롱꺼 조직과 폭력배들은 아니었다.
놈들은 질서유지를 핑계로 난민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폭군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링로드와 한 조각 신간척지 난민지구를손에 넣기 위한 탐욕이었고 그 탐욕의 화차가 천천히 빙글빙글 돌며 월미도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 *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진영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행어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이지만 거의 모든 형사들이 일어나서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양당은 긴급 의원회의를 소집해서 밤새도록 마라톤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에 신이 난 것은 방송국뿐이었다.
안 그래도 대선 기간이라 시청률이 달달한 판에 양 당의 후보가 어제 각각 다른 이유로 사고가 터지면서 하루종일 뉴스가 편성되었다.
44팀 팀원들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다들 금강산도 식후경이야. 먹고들 하자고.”
이진영은 족발과 생수통에 담아온 중국술을 흔들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44팀이었다.
이진영은 취조실 하나를 빌려서 책상에 술과 족발, 막국수 따위를 늘어놓았다.
안 그래도 밤새도록 시장했는지라 사람들은 와구와구 족발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하이고오. 니들은 하다하다 경찰서 안에서 술판이냐? 아예 사내 술집이라도 만들어주랴?”
강력부장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취조실 문을 열고 한심하다는 듯 44팀을 바라봤다.
“아, 거 직원 위로차원입니다. 다들 피곤한데 잠이라도 잘 자야지요.”
“이제 비상경계령 하루 차인데 무슨 위로야? 아무튼 이진영이 너도 차출이다.”
“또 뭔데요?”
“구룡의 눈. 니가 알아낸 정보잖아? 브리핑해야지?”
“아, 왜. 꼭 이럴 때만 불러.”
이진영은 죽엽청을 한 잔 털어 넣고 족발을 우적거리며 일어섰다.
정보국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진영은 혹시나 친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커다란 회의실에는 다른 정보국 요원이 출석해 있었다.
지루한 회의였다.
이진영이 알아낸 ‘구룡의 눈’이라는 정보로 주요 대권주자들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고 상부에서는 이진영에게 롱꺼 패거리가 노리는 타겟에 대한 추가 정보가 없냐고 물었다.
추가 정보가 있을 리 없다.
이진영은 오히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페어차일드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싶어졌다.
지금 양 당이나 경찰, 혹은 정보국에서도 물밑으로 많은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이진영은 평온하게 진행되는 회의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코를 쿨쿨 골면서 잠이 들었다.
어차피 롱꺼 놈들이 대권 주자들을 노리든 말든 현장 경찰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강력부장이 이진영의 머리를 서류다발로 빡 소리가 나게 때렸다.
좀비처럼 축 늘어져 자고 있던 이진영은 끄앗하고 기지개를 하면서 일어났다.
“술집에 이어 여관까지 차려주랴?”
“아, 이 집 룸 싸비스가 엉망이네?”
“룸서비스 같은 소리헌다. 아무튼 니네도 새로 배당이 떨어졌어.”
“예? 저희 팀 사건이 몇 갠지나 아세요?”
“경호임무야. 이젠 우리 서도 정치인들 경호까지 해야 할 판이야. 아니, 이 정치꾼 새끼들은 인천에 뭐 꿀 빠는 게 있다고 이렇게들 쳐 오는지. 누가 반긴다고.”
이진영은 현장 경호계획서를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방벽이 무너지면서 인천과 경기도 민심이 대통령 선거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여전히 경기도와 인천은 전국에서 인구가 많은 동네였고 이곳에서 밀리면 대선에서 지게 된다.
방벽이 무너진 후 인천의 민심은 더 요동쳤고, 민심을 잡기 위해 양 당의 정치인들이란 정치인들은 인천에서 집중적으로 유세를 했다.
그 바람에 죽어나는 건 경호를 담당하는 정보국 파트와 현장 경찰이었다.
“차라리 육군에게 맡기지 그래요? 그 친구들 신나서 달려들 텐데?”
“땡크 위에서 기관총을 겨누는데 그 옆에서는 선거운동하고 앉아 있으면 모양새가 안 좋잖냐? 외신 로봇들이 신난다고 사진 찍고 앉아 있겠지. 주가에도 영향이 있을 테고. 시발, 나도 주식에 물린 게 있어서.”
“또오 주식 투자하셨어요? 나 참 차라리 부장님은 유인환이 따라 로봇 격투에 거는 게 나을 거에요. 그 새끼 저번 잠복수사할 때 배틀로얄로 큰 돈 땄잖아요?”
“경찰이 도박꾼이라니 하여튼, 그 팀장에 그 팀원이다. 애들 관리 똑바로 해. 아, 그리고 니네 쪽에 새로 사원 하나 새로 배속될지도 몰라.”
“오오오, 민족의 태양이시며…….”
“시끄러. 내가 배정하는 거 아니야. 상부에서 내려온 거야.”
“뭐예요. 또 낙하산이에요?”
“44팀 애들 다 낙하산으로 받은 애들이지만 공수부대였잖아? 이번에도 잘 해봐라.”
이진영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곱게는 안 들리는데요? 인원 보충이 되었다는 건.”
“그만큼 빡세진다는 거겠지. 아무트은, 잠 좀 자 둬.”
그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력부장만큼 이진영을 잘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 챙겨주는 건 나뿐이라는 거 잊지 마라.
진가구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